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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주장사 루디아 / 행16:11-15

모든 교회공동체들마다 남자 성도가 많을까요? 여자 성도들이 많을까요?

일부 교회공동체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여자 성도들이 많습니다.

때문에 여자로서 남자들에게 큰 소리를 하고 살려면

교회를 다니라는 속설도 있다고들 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여자의 이름이 불리어지는 데는 교회 공동체 밖에는 없습니다.

물론 지금은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하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일과 이름과 가치와 역량을 찾고 발휘하면서 살고들 있습니다.

이제 직장에서도 여자 상사 밑에서 일하는 남자들도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들이 큰 소리를 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특히 교회공동체 안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아니 교회 자체가 이 세상에 대해서 큰 소리를 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많은 대형교회의 목사님들이 정치 사회적으로 많은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명박 대통령을 세우는 데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들 합니다.

물론 그 덕분에 지금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엄청난 욕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소리를 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더더군다나 목사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정치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서 사는 것도 바람직하질 않습니다.

TV매체가 등장을 하고나서 목사들도 이제 스타목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는 현상입니다.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축하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걱정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는 그렇게 해서 세워지거나 만들어지는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어떤 영향력 -특별히 정치, 사회적 -을 행사하는

공동체로서 만들어진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식으로의 사역이 성경적으로 이해되고, 용인된 일이었다면

예수님의 사역 자체가 십자가로 결론을 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슨 의미입니까?


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십자가는 저주입니다.

그 저주를 예수님은 친히 당하신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가장 어리석은 방법으로 온 세상의 죄를 다 짊어지신 것입니다.

 

이것은 능률로 따져볼 때 정말 비효율적인 방법입니다.

능률이라는 말은 지금 이 세상이 얼마나 좋아합니까?

 

효과가 나타나기만 한다면 무엇이라도 한다는 것이 요즘의 세상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만 잘 된다면 어떤 것이라도 한다는 겁니다.

공부 하는 학생은 성적만 오른다면 어떤 것이라도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의 숫자만 늘릴 수 있다면 별별 짓을 다해서라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정말 별 볼일 없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판단으로는 어리석고 무능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보면 그 무엇보다도 더 능력 있고 능률 있고 효과적인 사역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의 가치가 올바르게 실현되어야만 하는 곳이 바로 교회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의 크기와 실력과 능력과 힘을 자랑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는 바보 같은 취급을 받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방법으로

살아가는 삶을 실현하는 곳입니다.

 

누가 그렇게 해야만 합니까?

바로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이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자주 장사 루디아입니다.

바로 루디아를 통해서 빌립보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런데 루디아를 통해서 교회가 세워졌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 신앙생활의 역설을 증명해주는 사건입니다.

복음이 무엇인지를 정말 확실하게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루디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루디아는 사람으로 세울 수 없는 여자입니다.

당시의 여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존재 그 자체를 내세울 수 없는 그냥 여자입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도 돌봐주질 않고 인정해 주질 않는 그냥 여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바로 그런 여자에 의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급히 부르셔서

아시아로 가려고 하는 그는 막아 세우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생각에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이 아니라 여자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것도 그 여자의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물론 교회가 세워졌다고 하는 사실은 정말 중요하고 값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사람이 아닌 여자를 통해서 세우신 것입니다.

당시에 사람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사람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런데 여자를 통해서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참된 성격을 지작하거나 생각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오늘날의 교회 문제가 뭡니까?

다른 것 아닙니다.

교회가 권력이 되고, 세력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를 키우는 것에만 열을 내다보니까

교회의 근본적인 성격자체가 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 교회와 가난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교회와 사랑이 점점 더 멀어져 갑니다.

 

정말 더 무서운 것은 교회와 십자가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능함과 어리석음과 낮아짐의 상징인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젠 성공의 상징이 되어 버렸습니다.

십자가만 바라보면 복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고,

성공이 눈앞에 삼삼하고, 능력과 힘의 상징이 되어 버렸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저주받은 나무 십자가가

이제는 세상적인 것으로 한껏 치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됩니까?


고전 1:22-31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십자가는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주의 은혜로 감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 가운데서 낮아짐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세상 가운데서의 성공과 복을 꿈꾸면서 달려가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들려지는 모든 소리가 다 세상 가운데서의 성공일 뿐입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좀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좀 더 잘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면

얼마나 더 효과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잘 된 사람이 예수 믿으라고 해야만

더 힘이 있을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도대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해야만 합니까?


마 4:8-11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사단이 예수님께 유혹한 내용에 대해서 예수님은 단호하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갖기 위해 사단의 도움이 필요 없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미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적으로 좀 더 잘 되어서 사역을 감당하신 모습을

결코 성경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는 단순히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신 것만이 아니고,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유혹이 있다는 것을 경고하시는 겁니다.

 

세상을 짝하면서,

세상에 마음을 다 주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다는 죄악 된 착각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세상의 높은 것으로,

세상의 것으로,

세상의 가치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넓혀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세상을 이용해서,

세상을 가지면서 동시에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 공동체 안에 세상의 가치가 지배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좀 더 잘 된 사람이 더 많은 복을 받은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세요.

아주 간단한 것만 생각하시면 금방 분별이 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철저하게 실패하셨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적으로 성공했던 모든 것을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하나도 남김없이 다 버렸습니다.

스스로 실패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누리지 못한 것과

사도 바울이 다 내던진 것들을

잡지 못해서 야단이 났습니다.

 

그래서 얻은 게 뭡니까?

물론 세상의 권력과 힘은 얻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 허락하신 사명은 다 잃어버렸습니다.

누가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을 합니까?

 

하나님은 자주 장사 루디아를 통해서 다시금 말씀하십니다.

복음은 세상의 권력이 아니고,

교회는 세상의 힘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이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가진 것 전혀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곳곳에 적절하게 스며들어서

이 세상에서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여인 루디아와 같은

귀한 일군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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