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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소망 / 행16:16-25

 사람이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연약한 존재입니다.

자신이 믿고 있던 일이 어그러지면 이내 곧 실망해버리고 절망을 해버립니다.

몸담고 있던 직장을 잃거나, 계획하던 일들이 틀어지면

헤아릴 수 없는 크기의 절망감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소망입니다.

 

누군가가 ‘가장 좋은 것은 아직 내게 오지 않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처럼 우리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는 말이 없습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먼저 확실하게 정의하고 정리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소망을 가져도 제대로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 삶을 사는 과정에서 헷갈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유혹에 대해서 결코 속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세상의 유혹이 있는지 모릅니다.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것도 있지만 교묘하게 위장을 해서 유혹하는 것은 훨씬 더 많습니다.


 

전에 섬겼던 교회의 집사님이랑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그 분은 피라미드 판매를 하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그런 일을 꼭 해야만 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가족의 미래를 위해서 미리 준비하느라고 그런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여쭤 봤습니다.

 “그럼 지금은 무엇으로 사십니까?”

그랬더니 남편이 돈 좀 버는 거하고, 자기가 버는 거 보태서 산다고 하십니다. 

제가 다시 여쭤 봤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지금 집사님의 가정을 위해서 뭘 하고 계신데요?”

그랬더니 대답을 못하시면서 다른 이야기만 하십니다.

자기가 속해 있는 피라미드 회사의 사장이

이 사회에 좋은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벌어들이는 수익의 몇 %를 기부하고 그것으로 장학금도 주고 그런답니다.

 

 “집사님! 그런 대답이 구차한 것 아시죠?

저 같으면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겠습니다.

내 실력으로 산다고 나서서 피라미드 판매를 하니

그 결국은 남들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것뿐이잖습니까?”

그랬더니 전혀 대답을 못하십니다.

 

피라미드 판매가 뭡니까?

나 잘 되자고 다른 사람들 힘들게 하는 겁니다.

아니 사실은 나도 잘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왜들 그렇게 그런 유혹에 빠져듭니까?

지금 여기서 남들보다 더 잘 살 수 있다는 욕심 때문입니다.

때문에 남이야 죽든지 살든지 관계없이 나만 잘 살면 된다고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남의 것을 빼앗아다가 내 것으로 삼으면 그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나한테만 좋은 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건 소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정말 좋은 건 나한테만 좋은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좋은 겁니다.

하나님께도,

이웃에게도,

심지어는 원수에게까지도 좋은 것이 정말 좋은 것입니다.

소망을 가져도 그런 소망을 가져야만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들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 사람들은 소망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나로 인해서 남들이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제대로 모릅니다.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소망은 뭡니까?

이 여인에게서 좋은 건 뭡니까?

귀신이 떠나는 겁니다.

귀신 때문에 점을 쳐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이 여인의 소망이 아닙니다. 

그것이 소망인 사람은 누구냐면

귀신 들인 여종이 벌어들이는 돈으로 먹고 살았던 주인들입니다.

이들은 귀신 들린 여종의 영혼의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여종이야 죽어가든지 말든지 자기들은 오로지 그 여종을 통해서

돈만 벌어들이면 모든 것이 다 형통하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19절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고 갔다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져 버린 것을 가장 분하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여종이 벌어다 준 돈만 눈에 삼삼한 것입니다.

그 여종의 삶이 피폐해져 가는 것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없는 사람들의 삶의 실체입니다.

 

밥 벌어먹기도 힘든데 무슨 교회를 다닌다고 그러느냐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나가서 일을 더해서 돈을 더 벌겠다고 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때문에 자기 자신의 삶을 점점 더 피폐하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애쓰고 수고하고 노력을 하다보니까 이제 어떤 생각까지 들게 됩니까?

남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데 까지 이르게 됩니다.

처음부터 남을 괴롭히고자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악한 생각이 처음부터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계획과 생각으로 가득차서 살다보면

어느 샌가 악한 생각들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악한 생각들이 계속되면 이제 그 영역을 점점 더 넓혀가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삶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전에는 안 그런 것 같았는데 갈수록 남들에게 악하게 하는 사람들이 다 그런 이유입니다.

 

우리는 원래 악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세상의 것에 미쳐서 살면

언제 어떻게 잃어버리는지도 모르게 우리 영혼의 심성이 다 파괴되어 버립니다.


전에 섬겼던 교회의 집사님 사업장을 취재하기 위해서 방문했었습니다.

그 분들은 아주 신실한 분이셨습니다.

교회의 이런저런 일들을 알게 모르게 감당하시면서

소리 없이 선한 일들을 하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 취재를 가서 제가 아주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집사님! 일 년 매출이 얼마나 되세요?”

“네. 몇 억이 됩니다.”

“아, 그러세요. 아주 큰 기업이시네요.”

“아뇨, 실은 그보다 훨씬 더 됩니다.

제가 드린 대답은 세금 신고할 때 내려잡은 매출입니다.”


한마디로 매출이 거짓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신실해 보이던 분들의 입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정당하게 내야만 할 세금을 덜 내면서도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다고 한 것입니다.

 

물론 세금을 더 내면 그만큼 삶은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더군다나 남들은 다들 그렇게 사업들을 하니까 더욱 유혹이 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워지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것이 정말 은혜롭게 사는 것입니다.

어려워지는 부분에 대해서 먼저 염려하고 걱정하고 사니까

하나님의 사람답게 정정당당하게 살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런 악한 부분을 감추려고 하니까

교회 안에서는 은혜로운 척을 하고, 일군인척 하는 겁니다.

 

그러나 정말 아쉬운 건 뭡니까?

그렇게 해서 교회를 섬겨봐야 그것이 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섬김이 되질 못한다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말씀을 따라 살면 삶이 더 어려워지는 것을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그럴 때 맡기고 사는 겁니다.

그것이 정말 좋은 것을 소망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의 정당한 태도입니다.


시37:3-9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이것을 믿음의 삶이라고 하는 겁니다.

믿음의 삶은 하나님으로 소망을 삼고 사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여호와를 기대하고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땅의 것에 대해서 전혀 연연해하질 않습니다.

오늘 그렇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22- 25절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 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바울과 실라의 이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세요.

자신들에게 닥친 세상의 위협에 대해서 조금도 염려하지 않는 모습으로 서 있는

이 자랑스러운 모습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삶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점점 더 어려워짐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주눅 들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저들은 지금 무슨 악한 일을 해서 옥에 갇힌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지역에 가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옥에 갇혔습니다.

갇혀도 그냥 갇힌 것이 아니라 많이 맞고 갇혔습니다.

많이 맞았다는 것은 그만큼 위협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협을 당했으면 하나님께 원망이라도 나올 텐데 전혀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하다  못해 불평이라도 몇 마디 했을 텐데 조금도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주 편하게 생각을 해버립니다.

이들은 성령이 충만해서 그렇다고....

이런 말 해버리면 그냥 끝입니다.

더 이상 우리한테 스스로 뭘 적용하질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바울과 실라는 제대로 된 믿음으로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직 우리에게 좋은 것은 오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어렵게 하지 않고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기도하고 찬송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같이 있던 죄수들이 다 들었습니다.

들었다는 것은 단순히 귀에 들렸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에 차 있는 모습을 모든 죄수들이 확실하게 봤다는 것입니다.

 

형편과 처지를 원망하거나 탄식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에 서 있는 증거요,

하나님을 온전하게 바라보고 서 있는 증거입니다.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해도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누구에게도 부담이 되질 않고 당당하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후13:4-5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우리의 약함이 곧 하나님의 강함입니다.

어려워도 힘들어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그 길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만 만족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무목교회의 소망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아직 우리에게 좋은 것은 주시지 않았습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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