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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주 예수를 믿으라 / 행16:26-34

어떤 교회의 장로님 가정이 어느 날 갑자기

다니던 교회를 그만 두고 다른 교회로 옮겨 버리셨습니다.

그 장로님은 다니던 교회의 창립멤버였습니다.

안수집사로 교회를 섬기다가 그 공로를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인정을 받아서

 장로까지 되셨는데 갑자기 교회를 옮기신 겁니다.

담임목사님과 불화하지도 않았고,

성도들과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런 것입니다.

 

이유는 딱 하나였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외동딸이 그만 대학입시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누구나 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을 갈 것이라고 말하고,

장로님 부부도 그렇게 큰 소리를 쳐왔는데 그만 딸이 대학을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장로님이 교회 다니기가 창피하다고 그만 교회를 옮기신 것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부터 교회의 온갖 일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열정을 갖고 모든 성도들에게 귀감이 되었던 장로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장로님은 그동안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신 것일까요?

정말 주 예수를 믿기는 하신 것일까요?

교회는 다니는데 예수 믿지 않고 다니는 성도들이,

아니 그런 분들은 그저 교인이라고만 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성도들은 없고 교인들만 난무하고 있습니다.

 

성도와 교인은 분명하게 차이가 있습니다.

단어에서도 차이가 있지만 그 의미에서는 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교인은 교회를 다니는 멤버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주 예수를 믿으라.” 는 말의 절대적인 의미가 뭘까요?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믿지 않는 것과 같은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다시금 반듯하게 세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본문의 핵심은 역시 “주 예수를 믿으라!”입니다.

본문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가 등장하고 있는 이유는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이렇게 물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자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 봐야만 할 내용은 간수가 가진 마음입니다.

지금 간수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왜냐?

그는 옥문이 열려서 죄수들이 다 도망을 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즉시 자결을 하려고 할 만큼 그의 절망감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옥에 갇힌 죄수들이 도망을 갔으니 그의 생명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큰 소리로 그를 말립니다.

놀랍게도 옥문이 활짝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수인 바울과 실라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옥문 안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을 간수는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수들이 어떤 죄수들입니까?

간수인 자기보다 팔자가 더 나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재판 결과가 나올지 모르는 생명을 부지하는 일이 정말 어려운 그런 인물들입니다.

옥문이 열렸으면 뒤도 돌아보질 않고 도망을 가야만 하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옥문은 열렸는데 옥 안에 갇힌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은 것을 본 것입니다.

 

그 때 간수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바로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과 처지를 어떻게 해야만 해결을 하겠느냐는 식의 질문입니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런 식으로 믿음과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나무목교회의 성도들이라도 이 부분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구원이 우리의 형편을 좋게 하는 것이고,

믿음은 그 수단이 되어 버린 신앙생활이 너무도 팽배합니다.

 

때문에 오늘 내 삶 속에서 드러나는 어떤 환경적인 결과나 현실에 대해서

너무 쉽게 비관을 해버립니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이 뭡니까?

신앙생활을 안 하는 겁니다.

아까 장로님의 경우처럼 교회를 옮겨 버리는 겁니다.

 

신앙이 있고 믿음이 있고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모두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에 근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잘 될 때는 전혀 드러나지 않다가

잘 안되고 생각대로 안 되니까 고개를 쳐든 것입니다.

구원이 현실적인 것에만 제한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모두 불신입니다.

유일하고 참된 신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게 아니고,

그냥 하나님이라는 자기만을 위하는 우상을 하나 만들어서

자기만을 위해서 섬기는 겁니다.

지금 그런 식의 신앙들이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때문에 오늘 망한 것 때문에 옛날에 잘 나갔던 것만 기억하고

신앙생활을 등진 사람들에 너무 많습니다.

구원을 지극히 현세적인 것으로만 이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을 가는 티켓인 믿음이 그저 오늘 내가 사는 동안

이 땅에서의 복으로만 이해를 하는 겁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데 거기는 갈 마음조차 없고

그냥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서만 잘 살게 해주세요라고 고집을 하는 겁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알라딘의 마술램프에 나오는 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오늘 필요와 요구만을 들어주시는 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기독교의 가장 큰 위험이요,악입니다.

 

현대 기독교의 가장 큰 악함은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과 사람의 입장이 그 위치에 있어서 서로 뒤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들이 비서나 조수쯤 되어 버리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것으로 온갖 큰소리를 다 치는 악당이 되어 버렸습니다.

 

때문에 기독교가 지금 이 세상의 기득권이 되어버렸고, 권력이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 속에서의 약함과 무능함과 부족함과 가난함을 드러내야만 할 기독교가

인간적으로 가장 똑똑한 집단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원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 된 교회를 이 땅에 세우실 때는 이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가난하고 보잘 것 없고 무능하고 외롭고 힘든 사람들의 공동체였습니다

.

오늘 사도 바울의 한 말이 무엇입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입니다.

 

전도하거나 이웃에게 권면을 할 때 입에 달고 사는 말입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구원은 오늘 현실에 대한 돌파구로서의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복으로서의 구원이 아닙니다.

아직 우리 눈에 그 구원은 다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맛봬기를 이 땅에서도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맛을 볼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에는 어떤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까?

 

오늘 간수에게는 옥문이 열렸다는 것만으로도

자기의 행할 일은 스스로 죽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간수가 가지고 있는 가치의 한계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자신의 해결방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 우리가 불신으로 가게 됩니까?

오늘의 현실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과 가치를 가지고

그것으로 현실을 극복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힘과 자기의 실력과 자기의 가치로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어디까지나 판단은 자기 몫입니다.

자기가 알아서 결정한다고 합니다.

 자기들에게 알아서 할 만한 충분한 실력과 이성과 지성과 믿음이 있다고 생각들을 합니다.

때문에 갈수록 목회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성도들이 갈수록 교인들이 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면 거부해야만 옳습니다.

너무 믿음이 좋다고 무조건 덮어놓고 믿으면 안 됩니다.

목사의 말이라고 해서 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거부하는 건 거부해야만 합니다.

따를 것은 따라야만 합니다.

 

그럴 때 그 기준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기준이어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어야만 합니다.

지금 여기 이 땅이 아니라 천국이 기준이어야만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바로 그런 것들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까불지 말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절망이라고 덩달아 한숨 쉬고 죽을 것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판단하고 우리가 결정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을 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고 경험하고 있고 배운 것이 있고,

생각하고 있는 가치나 철학에서 벗어나서 살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만 결론을 내지 말라는 겁니다.

이 땅에서의 누리고 있는 것으로만 결론을 내지 말라는 겁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언제나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이 바로 오늘 여기 우리들의 현실 속에서

드러나고 자랑되고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때문에 기독교는 언제든지 내세적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억울하게 죽어도 아무 억울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성도가 되질 못하고 교인으로 전락을 해버립니까?

지금 여기서는 여기서 대로 잘 살고, 또 죽으면 천국가지라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서든지 천국이든지 한 가지만 골라야만 하는 겁니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곧 천국을 가는 것에만 집중하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천국을 가는 주택부금 넣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겠다고 다짐을 하고 덤비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 예수를 믿는 성도라고 하면

오늘의 현실이 주는 과정에 대해서 그렇게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형편과 처지 때문에 인간적으로 수치스럽고 창피한 것 없습니다.

자녀가 대학을 떨어졌더라도,

남편의 사업이 좀 안되더라도,

건강이 남들보다 못하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들로 인해서 신앙생활의 자세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성도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세상의 것으로 창피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의 일 때문에 스스로 목숨 끊고 죽을 일도 없습니다.

우리의 그 모든 인간적인 조건들을 다 받으시려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신 겁니다.

 

주 예수 안에서는 그 어떤 인간적인 것들이라도  

큰소리를 칠 이유가 없고, 주눅 들어 지낼 이유도 없습니다.

 

주 예수를 제대로 믿고 사세요.

오늘 현실의 벽만 바라보는 어리석음을 벗어나서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책임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히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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