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위로하시는 예수님(3)! (요16:16-24)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오늘 말씀의 배경은 요13:1부터 시작이 됩니다. 요13:1 말씀을 읽어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드시기 위해서 어느 다락방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습니다. 이제 불과 몇 시간 후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사로잡히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채찍으로 심한 매를 맞으실 것입니다.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의 조롱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는 굵은 못이 박힐 것입니다. 예수님의 허리는 날카로운 창으로 찔릴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버림을 받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일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슬픔과 근심에 쌓인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일에 여념이 없으셨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우리의 놀라운 구세주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왜 우리를 위로하십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기뻐하며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늘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해서 슬픔과 근심에 싸여 살아간다면 예수님은 너무도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제자들을 떠나시는 것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슬픔은 곧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우리 모두도 은혜를 받아, 우리의 모든 슬픔이 충만한 기쁨으로 바뀌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네 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언질이 있습니다(the pledge, 16절).
둘째,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신 언질을 이해하지 못해 당황했습니다(the perplexity, 17-19절).
셋째,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를 들어 제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the parable, 20-22절).
넷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the promise, 23-24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도 예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 우리 슬픔의 물이 기쁨의 포도주로 바뀌는 역사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언질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pledge, 16절).
오늘 본문 요16:16입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의 언질을 주셨습니다.
첫째 언질은 “조금 있으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곧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유월절 만찬이 끝나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실 것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피땀을 흘리시면서 간절하게 기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곧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사로잡히실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다 달아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불의한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불과 몇 시간 안에 다 이루어질 일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그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둘째 언질은 “조금 있으면” 제자들이 다시 예수님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슬픔을 당하는 사람에게 가장 크게 위로를 느끼도록 해주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겪는 슬픔은 일시적인 것이기에, 곧 그의 슬픔이 끝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말일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언질이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제자들을 떠나실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해서 제자들은 슬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다시금 제자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실 것이라는 언질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다시 보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며, 그와 함께 그들의 슬픔은 자연히 끝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제자들을 떠나시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일 뿐이며 제자들은 곧 다시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언질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한 가지 문제가 남습니다. “조금 있으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될텐데, 그 때가 과연 언제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선 이 때를 예수님의 재림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아무래도 무리가 많습니다.
“얘들아! 내가 이제 몇 시간만 있으면 너희를 떠나갈 것이다. 그러나 한 이 삼천 년 지나면 내가 너희에게 다시 올 것이다. 그러니 이것으로 너희가 위로를 받기 바란다.”
예수님이 이런 뜻으로 제자들에게 언질을 주신 것이라면, 이것은 제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아울러 “조금 있으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아무리 길게 잡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의 기간 곧 몇 천년이나 되는 긴 기간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때를 예수님의 부활로 간주를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깊이 생각하면 제자들에게는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불과 40일만 제자들에게 그 모습을 보이시고 다시금 제자들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얘들아, 내가 곧 너희들을 떠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흘 뒤에는 내가 다시금 너희들에게 내 모습을 나타내 보일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얼마 후에 너희를 또다시 떠날 수밖에 없구나.”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로 일시적인 위로는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로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언질이 그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기 위해서는 “조금 있으면”하는 말씀이 예수님의 재림이나 부활이 아닌 또 다른 때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그 때는 제자들이 성령님을 받게 될 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시면 제자들에게는 또 다른 보혜사로서 성령님이 오시게 될 것이라고 거듭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예컨대 요14:16-17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시면, 제자들에게는 성령님이 오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영원토록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내용을 그 다음절인 요14:18에서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여기서는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나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롬8:9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신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나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사역이 무엇입니까? 성령님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역을 하십니다. 요14:26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또 요15:26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성령님이 이 땅에서 하시는 사역은 바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오시면, 제자들은 성령님을 통해서 영적으로 예수님을 계속해서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일시적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을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사실을 조금이라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에서도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16:13-15입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그리고 난 뒤에 곧 이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입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사흘 뒤에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십 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하늘로 올리워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예수님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이 말씀대로 예수님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신 지 십여 일이 된 오순절을 기해서 성령님은 제자들에게 임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성령님은 예수님이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제자들로 하여금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들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늘 영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매를 맞으면서도, 감옥에 갇히면서도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기들과 함께 하시면서 자신들의 삶 속에 살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제자들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주신 언질을 이해하지 못해서 당황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봅니다(the perplexity, 17-19절).
요16:17입니다.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제자들은 대충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곧 이어서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하신 말씀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조금 동안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보리라고 하신 말씀과 예수님이 아버지에게로 가신다는 말씀은 현재의 그들로서는 잘 연결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결코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아직은 그들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받기 이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16:12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으셨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를 않았지만, 예수님에게 차마 물을만한 용기가 없었습니다. 요14장에서 도마나 빌립이 예수님에게 괜한 말을 했다가 예수님의 꾸중을 들었던 것처럼, 자신들도 괜스레 예수님에게 질문을 했다가 자신들의 무지만 드러내고 예수님의 책망을 받지나 않을까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물을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면서 서로에게 물었습니다.
이는 분명 어리석은 일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성령님을 받기 이전이었으므로, 그들 모두가 영적 소경의 상태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서로 의논을 하며 질문을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18절 말씀입니다.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언질 가운데서 제자들이 특별히 의아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씀을 하신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의 슬픔이 일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일깨워주심으로 그들을 위로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제자들에게는 성령님이 임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과 언제나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조금 있으면” 제자들의 슬픔은 끝이 날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그들의 근심은 도리어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의도하신 바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너무나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당하실 십자가의 고통에 대해서는 전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 주님, 저희들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저희들이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예수님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이 시간 저희들이 예수님과 함께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우리에게 좀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러한 말을 했더라면 예수님은 몹시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에 대해서는 전연 관심이 없고, 단지 자기들의 문제에만 급급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저 자기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예수님이 없이 슬픔에 잠겨 살아야 할 지에 대해서만 알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이 묻고 싶어는 하지만, 용기가 없어 차마 예수님에게 묻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무엇을 묻고 싶어하는지 그 내용을 그들에게 일러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16절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언질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마음을 읽으십니다. 예컨대 요2:24-25입니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우리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읽으신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고 부정적인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21:15, 16, 17에서 그는 세 번에 걸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비록 우리도 때로는 베드로처럼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행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아신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또 사65:24입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우리가 아뢰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응답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읽으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읽으시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긍정적인 점도 많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차라리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읽지 말아주셨으면 하고 느낄 때도 없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읽으신다는 사실을 생각만 해도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교회의 금년도 표어처럼 늘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로하시기 위해서 들려주신 비유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parable, 20-22절).
오늘 본문 20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구약 시대 선지자들은 자신이 전하는 말씀의 신적 권위를 밝히기 위해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실 필요가 전연 없으셨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중요하고 엄숙한 말씀을 하실 때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곡하고 애통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같은 뜻의 말을 두 번 사용하심으로 제자들의 슬픔이 극심할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극도의 슬픔을 안겨주게 될 것은 한 마디로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지셔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물론 마귀의 지배 하에 있는 세상은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크게 슬퍼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되어질 첫째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한 때는 제자들을 슬프게 만들었던 바로 그 십자가가 이제는 기쁨의 원천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또 조금 있으면” 되어질 둘째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지도자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데 저렇게 기뻐할 수 있을까 하면서 의아스럽게 생각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임하시고 난 후에 그들은 큰 기쁨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힘써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6:14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제자들에게 더 이상 슬픔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혹시 슬픔을 당하고 계십니까? 그것 때문에 너무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도리어 기쁨으로 바꾸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롬8:28에서 말씀한 위대한 원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지금 당장은 우리에게 슬픔을 안겨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바로 그 십자가가 도리어 우리에게 기쁨을 듬뿍 안겨다 줄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듯이, “조금 있으면” 예수님이 우리 슬픔의 물을 기쁨의 포도주로 바꾸어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 때 우리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심치 않고 예수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나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입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여자는 해산할 때에 큰 고통을 겪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결과로 내려진 저주의 일부였습니다. 창3:16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미국에서는 남편도 분만실에 들어가서 산모의 호흡을 도우면서 해산에 일조를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자기 아내가 해산할 때, 몹시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곁에서 그대로 지켜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가 해산하는 고통을 어찌 남자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해산하는 여자만이 그 고통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모든 여자들이 아이를 낳고 나면 그 극심한 고통을 씻은 듯이 잊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얻은 기쁨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계속해서 또 아이를 낳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녀를 기르시는 여성분들에게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크게 기뻐했던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마도 대다수는 아이를 해산했을 때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해산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려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얘들아, 해산하게 될 여자가 겪는 고통을 생각해 보아라. 비록 큰 고통이지만 그것은 잠시 잠깐이지 않느냐? 그 고통은 곧 큰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마찬가지로 너희들이 조금 있으면 겪게 될 슬픔과 고통도 극심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 있으면 너희들이 겪는 슬픔과 고통은 너희들 일생일대 최고의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것임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처럼 멋진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2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참으로 놀라운 위로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은 제자들이 해산을 앞둔 여자가 그 고통으로 인해서 근심하듯이 근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금 있으면”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기들이 “조금 있으면” 다시금 예수님을 뵈옵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예수님에게서 듣게 되었을 때, 너무나도 가슴이 뜨거웠을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22절 마지막 부분에서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하시면서 그들이 누릴 기쁨은 영원한 것임을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조금 전에 우리는 찬송가 169장을 함께 불렀습니다. “강물 같이 흐르는 기쁨 성령 강림함이라.” 그렇습니다. 성령님이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리게 되는 기쁨은 강물 같이 흐르는 기쁨입니다. 양적으로는 충만한 기쁨이요, 시간적으로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에게서 이 기쁨을 빼앗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컨대 사도 바울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고후6:10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바울은 지극히 곤고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감옥에도 여러 차례 갇혔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그의 대적자도, 그 어떠한 환경도 그에게서 기쁨을 빼앗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의 감옥에 갇혔어도 빌립보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당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빌4:4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빼앗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환경이 좀 나쁘다고 해서,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요15:1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모두가 늘 성령으로 충만해서 날마다 매순간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넷째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promise, 23-24절).
오늘 본문 23절 말씀입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차마 예수님에게 질문을 할 용기가 없어서, 그저 자기들끼리만 서로 물으면서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에게 성령님이 오시면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에게 아무 것도 물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14:26을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렇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은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그 때가 되면 제자들은 요14장에 나오는 도마처럼, 빌립처럼 예수님에게 물을 것도 없을 것이며, 또 지금처럼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아 그들의 중심에 의아스럽게 여길 것도 없을 것입니다. 성령님이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셔서 그들을 박사로, 학자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살아가다 보면, 또 그들이 사역을 해나가다 보면 필요한 것들이 생기게 될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 23절 하반부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얻게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분명 놀라운 약속이요, 제자들에게 주어진 엄청난 특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미 요14:13-14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그러면 예수님은 왜 똑 같은 말씀을 오늘 본문에서 또다시 말씀을 하셨을까요?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24절이 그 이유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제자들의 모든 것을 친히 돌보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굳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응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받은 놀라운 약속이요 특권입니다.
예수님은 24절 끝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기도의 응답으로 제자들의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기도의 응답에 대한 약속을 또다시 하신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기쁨과 관련해서 세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첫째, 기쁨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근심했던 제자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둘째,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십자가가 슬픔이 아니라 도리어 기쁨이 됨을 아는 사람입니다.
셋째, 기쁨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 해답을 오늘 본문 24절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비결은 한 마디로 기도의 응답에 있습니다.
예컨대 사도 바울은 살전5:16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그 다음절에서 그 비결을 밝히고 있습니다. 살전5:17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그렇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우리는 늘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 빌4:4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곧 이어서 빌4:6의 말씀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염려하고 근심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아직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삶의 현장에서 역사하시며 우리가 기도하는 것에 응답해주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충만한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며 아뢰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영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주심으로 우리 기쁨의 잔을 넘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늘 본문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들을 떠나는 것은 일시적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그들의 근심은 도리어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그들의 기쁨은 아무도 빼앗지 못하는 영원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영적 교제를 통해서 기도의 응답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기쁨은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일에 여념이 없으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기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주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계속해서 슬픔과 근심에 싸여 살아가는 모습을 예수님에게 보여드린다면 예수님은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을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내려놓으십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쁨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쉬지 말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누림으로서 기도의 응답을 받고, 또한 날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기쁨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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