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박상훈목사

[스크랩] 우리를 위로하시는 예수님(5) (요16:28-33)

우리를 위로하시는 예수님(5) (요16:28-33)


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제자들과 함께 어느 다락방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드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예수님이 지셔야 할 십자가로 인해서 마음에 근심하는 제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마지막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제자들이 근심하는 대신에 도리어 기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뻐하기 위해서는 그들 마음 깊은 곳에 평안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된 평안만 있으면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변함없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특별히 말씀하신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고전13:13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언제나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우리의 삶은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것처럼, 그저 하루하루 흘러가는 세월에 자신을 맡기고 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가 우리에게 있으면, 우리의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에는 세상이 알지 못하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이 깃 들게 되고, 그 결과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기뻐하며 감사하며 감격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우리에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를 모두 주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붙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놓치면, 우리는 모든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사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의지하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믿음에 대한 말씀도 주시고, 소망에 대한 말씀도 주시고, 사랑에 대한 말씀도 주셨습니다. 그리함으로서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제자들은 그들이 곧 당하게 될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변함없는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33절 상반부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원문 성경에는 “이것”이라는 단어가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것들”을 이르셨습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한 말씀들을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사랑에 대한 말씀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믿음에 대한 말씀과 소망에 대한 말씀을 주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우리 모두도 위로를 받고,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리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모두는 날마다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복 된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25-27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본 요16:25-27 말씀입니다.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예수님은 여기서 세 가지 말씀으로 제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금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앞으로는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the promise of understanding, 25절).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the privilege in prayer, 26절).

셋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the proclamation of love, 27절).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온 줄을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친히 사랑하십니다. 이때 예수님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흔히 사용하는 아가페가 아닌 필레오를 쓰셨습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에 비해 필레오는 가족들 사이의 각별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합니다. 아울러서 우리는 우리의 가족을 사랑합니다. 똑같은 사랑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과 우리가 우리의 가족에게 베푸는 사랑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아가페에 비유한다면, 우리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 필레오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각별하고도 특별하신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참으로 놀랍고도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사랑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시고, 곧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과 소망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 28-32절에서 말씀하셨고, 소망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 3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28-32절).


우리는 이 부분에 나오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대화를 네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A Call for Faith, 28절).

둘째,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믿음을 고백했습니다(A Confession of Faith, 29-30).

셋째,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A Celebration over Faith, 31절).

넷째,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에 주의를 주셨습니다(A Caution about Faith, 32절).

이러한 골격에 따라서 오늘 본문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본문의 내용이 좀더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A Call for Faith, 28절).

28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를 간결하면서도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요8:13-14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종교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전연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어디서 오셨으며,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왜 예수님은 세상에 오셨으며, 예수님은 이제 어디로 가시는지를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로서 나오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성을 뜻합니다. 요1:1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의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그저 한 인간으로서 그 당시의 타락한 종교계에 혁명을 일으킨 종교개혁가가 아닙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인류에게 귀한 가르침을 베푼 성현 가운데 한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누구나 이것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1:12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성육신(成肉身)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4:2-3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예수님은 육체를 입으시고 오신 하나님이신데, 이것을 부인하면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라면 누구나 예수님은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죄와 저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요1:29입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다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속 머물지 않으시고 세상을 떠나셨습니까? 세상의 핍박이 싫으셨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하늘 나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당하셔야 할 핍박을 다 당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까지 개의치 않고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9:30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하셔야 할 구속의 사역을 다 하셨습니다. 완수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누구나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또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우리를 위한 구속 사역을 완수하신 예수님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요17:24입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승천을 하셔서 창세 전에 누리시던 원래의 영광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누구나 이 사실을 또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믿음의 내용을 네 가지로 밝히 말씀해주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아버지께로서 나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한 모든 구속 사역을 완수하셨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다시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본래의 영광된 자리로 되돌아가셨습니다. 그리함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은 단순히 세계 4대 성현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음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들을 믿기를 요구하십니다.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실들에 대한 분명하고도 확실한 믿음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2)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믿음을 고백했습니다(A Confession of Faith, 29-30).

29절입니다.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의 사역을 다 마치시고, 하나님에게로 되돌아가신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25절에서 예언적으로 하신 말씀이 지금 자기들에게 성취된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때"는 예수님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시고 그 대신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임하실 때였습니다. 성령님이 그들에게 오시면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은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진전이 있었음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 동안 계속해서 근심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짓누르던 근심에서 벗어나 평안한 기색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두고 슬퍼하던 제자들은 이제야 비로소 슬픔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에게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30절입니다.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전지성, 곧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다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에 대해서도 다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요2:24-25입니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예수님은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시고, 또 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읽으십니다. 제자들도 바로 얼마 전에 똑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요16:17-19입니다.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지만, 차마 예수님에게 물어볼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묻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이 묻지도 않았지만, 그들의 묻고 싶은 질문을 정확하게 아시고 그 물음에 대답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해서도, 사람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예수님에게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서 오셔서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다시 하나님께로 가신다는 사실을 그들은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또한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처소인 아버지 집에서 영원토록 예수님과 함께 살리라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막9:24 말씀입니다.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것이 우리 모두의 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A Celebration over Faith, 31절).

31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물론 이것은 제자들이 믿는지 믿지 않는지를 예수님이 모르셔서 제자들에게 묻는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러한 질문을 던지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런 뜻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가 이제야 믿는구나. 좋다. 내가 너희의 믿음을 기쁘게 받으마.”

지금까지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당하셔야 할 고통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슬픔과 근심에 쌓인 제자들을 위로하시기에 여념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서, “우리가 믿나이다”라고 자신들의 신앙을 예수님에게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물론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직은 그들이 성령님을 받기 이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이해한 만큼 자기들의 신앙을 예수님에게 고백했습니다. 그들의 신앙도 아직은 성숙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연약한 믿음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해한 만큼 고백한 그들의 연약한 믿음일지라도 그것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따금씩 이런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었을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 살았던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었을까?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하도록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만큼만 이해하면 됩니다. 또 우리는 우리가 이해한 만큼만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것으로 족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해하는 것 모두를 다 알고 믿기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구약시대 성도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계시해주신 만큼만 이해하고 또 자기들이 이해한 만큼만 믿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시대를 살았던 성도들은 하나님이 앞으로 메시야를 보내셔서 자기들을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은 그들을 기쁘게 받으시고, 그 믿음으로 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내용을 온전히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내용이 비사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이는 그 내용이 앞으로 되어질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그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믿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한 만큼만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하나님은 족하게 여기십니다. 비록 겨자씨만큼 작은 우리의 믿음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예수님에게 고백하면 예수님은 기쁘게 우리의 믿음을 받으십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예수님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점점 더 많은 것을 깨닫게 하시며, 점점 더 큰 믿음을 갖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4)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에 주의를 주셨습니다(A Caution about Faith, 32절).

오늘 본문 32절입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아마도 제자들은 이제는 자기들의 믿음이 반석처럼 든든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반석이 아니라 조약돌처럼 미미할 뿐이었습니다. 예컨대 베드로를 생각해 봅시다. 요13:37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힘주어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그러나 그의 실상은 어떠했습니까? 요18장에 가면 그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됩니다. 다른 제자들도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육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자기들의 믿음이 얼마나 미미한 것인가를 미처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믿음을 너무 과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주의를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후12:10 말씀을 늘 기억하십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우리가 강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약하다고 느낄 때, 사실상 우리는 강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약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힘있게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다가 넘어지지 말고, 늘 겸손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주의를 주신 대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사로잡히실 때,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마26:56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막14:27에서 예수님은 이것이 예언의 성취임을 밝히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스가랴 선지자가 슥13:7에서 예언한 내용이 제자들에게 그대로 적용이 된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쳤다고 해서 그들의 믿음이 거짓이었습니까? 그들의 신앙고백이 가식적인 것에 불과했습니까?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비록 제자들의 믿음이 몹시도 흔들리기는 했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믿음은 남아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 사셨을 때, 그들의 믿음은 다시금 살아났습니다. 그들은 뒤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 바쳐 순교함으로서, 결국 그들의 믿음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32절 하반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변덕스러움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대조하고 계십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다 버리고 달아날 것이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일을 당하셨습니까?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마십시다. 인생은 연약할 뿐만 아니라, 변덕스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십시다. 하나님은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믿음에 관한 대화를 살펴보았습니다. 비록 우리의 믿음이 연약할지라도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28절 말씀을 다시 읽어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우리에게는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믿음의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첫째, 예수님은 아버지께로서 오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세상에 오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 곧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음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넷째, 예수님은 다시 아버지께로 가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사역을 완수하시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셨음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에게 아직은 이해가 되지 않고, 의심이 가는 점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기쁘게 받으시고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때로는 죄와 유혹이 우리의 믿음을 연약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다시금 우리의 믿음을 키워주시고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시간 예수님에게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면서,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소망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33절).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참으로 소망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그들을 핍박할 것임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요15:18-20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또 예수님은 요16:2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제자들은 세상에서는 핍박과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에게도 이런저런 환난이 닥쳐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우리가 환난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 이유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도 세상을 이미 이긴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주 사용하는 비유가 있습니다. 바다 위에 작은 돌섬이 떠있습니다. 보기에는 미미합니다. 그러나 태풍이 불어도, 큰 군함이 다가와서 밀어도 그 작은 돌섬은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돌섬은 지구 땅덩어리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기만 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떠한 환난도 결코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세상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사단은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사단은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사단은 사망의 권세로서 예수님을 삼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고전15:54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단은 사망의 권세를 휘둘러서 사망으로 예수님을 삼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부활로 도리어 사망을 삼켜버리시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요14:19 하반부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래서 우리는 사망을 향하여 담대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고전15:55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단이 휘두르는 가장 큰 무기인 사망의 권세조차도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한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떠한 환난이 우리를 거꾸러뜨릴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시고 승리하셨기에 우리도 자동적으로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롬8:35-37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세상의 그 어떠한 환난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떠한 환난이 닥쳐오더라도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소망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우리를 위로하시는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다섯 번에 걸쳐서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믿음에 대해서, 소망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33절 상반부에 있는 말씀이 그 이유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것(원문은 이것들, 곧 믿음, 소망, 사랑)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릴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고, 사랑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평안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요15:11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평안의 결과는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마음의 문을 활짝 여십시다. 예수님이 주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넘치도록 받으십시다. 그리함으로서 우리 모두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십시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은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는 복된 삶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