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위로하시는 예수님(4) (요16:25-27)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교회에 출석한 지 얼마 안 되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그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 교회 목사님이 그에게 심방을 갔습니다. 목사님의 마음은 좀 무거웠습니다. 그 성도님이 교회에 출석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으니, 혹시라도 그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병원에 도착한 목사님은 우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목사님은 그 성도님의 건강을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를 해드렸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 목사님은 그 성도님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성도님은 자기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사실은 제가 목사의 아들입니다.”
그 말에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최근에 그 성도님이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고서 기뻐하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다소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목사님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저의 아버님은 어려운 지역만을 골라서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희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몹시도 어려웠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매일 아침마다 가족들을 모아놓고서는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요지는 언제나 같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붙잡으면 다 붙잡는 것이고, 우리가 예수님을 놓치면 다 놓치는 것이다!’
저는 아버님의 그 말씀이 너무 너무 듣기 싫었고 지겨웠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우리는 이렇게 못사는 거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지 않아도 잘만 사는 것 같은데, 왜 우리는 예수님을 붙잡는데도 이렇게도 못산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면서 제게는 아버님에 대한 반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님의 말씀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결국 저는 어린 나이에 가출을 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고학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렵게 대학을 들어갔고, 온갖 고생 끝에 외무고시에 합격을 했습니다. 저는 외교관이 되어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생각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키운 것처럼 나는 내 자식들을 키우지 않겠다.’
그래서 저는 제 능력 안에서 제가 자식들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주면서 키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굶주리고 헐벗었던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 저는 제 자녀들에게는 매 끼니마다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도록 했습니다. 새로 나온 옷이 있으면 다 사다 입혔습니다. 그리고 좋은 환경에서 최상의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 노력 때문이었든지 지금 제 자녀들은 모두가 좋은 대학에서 교수로 있습니다. 그들의 성공한 모습을 보면서 저는 지금은 천국에 가 계신 아버님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아버지, 보셨지요. 저는 예수님을 붙들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해냈습니다.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틀렸습니다. 그 말씀이 적어도 제게는 진리가 아니었어요!’
이제는 제 형편이 좋아지고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이처럼 몹쓸 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저는 얼마 있지 않으면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저는 눈을 감으면 천국에서 깨어날 것을 확신합니다. 제 인생의 막바지에서 구원의 은총을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저는 절로 눈물이 흐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 자식들은 천국과는 상관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식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어렸을 때 저의 아버님이 우리 형제들에게 하셨던 그 말씀을 저도 제 자식들에게 그대로 들려주었습니다.
‘얘들아, 예수님을 붙잡으면 다 붙잡는 것이고, 예수님을 놓치면 다 놓치는 것이란다!’
그랬더니 제 자식들이 이러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요즘 많이 약해지셨군요. 평소에 안 하시던 말씀을 다 하시고요!’
그때 저는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가난한 삶 속에서도 제 아버님은 제게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 저는 제 자식들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아버님이 저희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이 옳았다는 것을 저는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이전에는 어리석어서 그것을 알지 못하고 믿지를 못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목사님 앞에서 한참을 흐느껴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힘있게 붙잡으십시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것을 붙잡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놓치지 맙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놓치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놓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위로 받고, 날마다 매순간마다 오직 예수님만을 믿고 따르고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 말씀으로 사랑하시는 제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금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앞으로는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the promise of understanding, 25절).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the privilege in prayer, 26절).
셋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the proclamation of love, 27절).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하심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금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앞으로는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the promise of understanding, 25절).
오늘 본문 25절입니다.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여기에 “비사”(比辭)라고 번역된 단어가 있습니다. 비사라는 단어를 그대로 풀이하면, “비유적인 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 단어를 무슨 의미로 사용하셨습니까? 25절 끝에 보면 “밝히 이르리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비사라는 단어를 밝히 이르시는 말씀과 대조되는 의미로 사용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어떤 것을 비사로 말씀을 하셨다고 해서, 예수님이 그것을 불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모든 것을 분명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단지 그것을 듣는 사람의 이해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제대로 깨닫지를 못했을 뿐입니다.
예컨대 바다 위에 떠 있는 빙산을 생각해봅시다. 빙산의 크기는 엄청 납니다. 그러나 지극히 일부분만 바다 위에 떠 있을 뿐입니다. 그 대부분은 바다 밑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비사라는 말이 주는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의미는 매우 큽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일부분만 보며, 깨달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비사로 말씀하신 경우를 몇 가지로 예로 들어봅니다. 예컨대 요2:19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당시 제자들은 그 의미를 분명하게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예수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요2:20입니다.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예수님이 비사로 하신 말씀의 뜻은 나중에 가서야 분명해졌습니다. 요2:21-22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수님이 비사로 말씀하신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요6:48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곧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6:51입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요6:52입니다.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만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제대로 이해를 못했습니다. 요6:60입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예수님이 비사로 말씀하신 경우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예를 들어봅니다. 요8:56-59 말씀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비사로 말씀하신 것들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것들을 밝히 이해하지를 못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불분명했기 때문입니까? 아니지요. 요16:12-13입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렇습니다. 그 당시 제자들에게는 아직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 강림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당시로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의 빙산 일각만 볼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 말씀을 다시 읽어봅니다.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5절 말씀은 “이것”이라는 지시대명사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비사로 이르신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킵니까? 25절 마지막 부분이 “이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비사로 말씀하신 것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제자들로서는 예수님이 아버지에게서 와서, 조금 있으면 아버지에게로 가신다는 말씀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그들은 차마 예수님에게 물어볼 용기는 없고 해서 그저 자기들끼리 물어보면서 수군거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때가 이르면” 아버지에 대한 것을 그들에게 더 이상 비사로 말씀하시지 않고 밝히 이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놀라운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가 과연 언제입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해서 살펴본 대로, 그 때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 오실 때였습니다. 요14:26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과연 예수님의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 10일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제자들은 오순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 그들은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들을 밝히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비사로 남아 있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모든 것을 밝히 말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이 아버지에게서 오셨으며,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약 성경에 있는 바울이나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의 서신서를 읽어보면 이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분명하게 깨닫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단지 요한계시록의 경우만 예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당시 제자들에게 비사로 들려졌던 것처럼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말씀들은 우리에게는 비사로 들립니다.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이 앞으로 되어질 일들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모든 서신서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비사들을 우리에게 밝히 이르기 위해서 기록되어졌습니다. 성령님이 오신 이래 제자들은 예수님의 비사를 밝히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16:23 상반부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묻고 싶어했던 것은 성령님이 오시게 되면 저절로 깨달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2:9에서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보고 듣고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들보다 많이 배웠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그들보다 머리가 더 좋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그 다음절인 고전2:10에서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함께 계셔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성령님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깨달음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든지 저런 경우든지 우리를 가르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여 우리에게는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 비사로 남아있지를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에 관한 것을 더 이상 비사로 이르시지 않고, 성령님을 통해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성령님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으십시다. 그리함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이 더 이상 우리에게 비사로 남아있지를 않고, 밝히 깨달아지는 달고 오묘한 생명의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 살아 역사하심으로 우리의 삶이 말씀 안에서 날마다 풍성케 되기를 소원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the privilege in prayer, 26절).
오늘 본문 26절입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무슨 뜻입니까?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더 이상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주실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까? 이는 분명 롬8:34의 말씀과 모순이 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도 분명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이상 기도하실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에게 속한 우리에게는 기도의 문이 활짝 열렸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 26절의 뜻을 밝히기 위해서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26절의 상반부 말씀입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성령님이 오시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에게 직접(directly) 그리고 즉시(immediately) 나아가서 구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요16:23-2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성령님이 오시면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에게 직접 그리고 즉시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기도할 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다 들어주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의 정욕을 위해서 아무 것이나 구하려고 들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라는 뜻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기도할 때,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간구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제가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오게 된 것은 예수님이 저를 이곳으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것을 하나님 아버지에게 간구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입니다.”
이런 마음 자세로 기도하면 자연히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의 뜻과 일치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무한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우리의 아들이 군에 가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아들의 친구가 휴가를 왔습니다. 그 친구는 아들의 부탁을 받고서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서 우리에게 무엇을 구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올바르고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아들의 친구가 구하는 대로 그 즉시 그에게 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아들을 위한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본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아시면, 하나님은 더더욱 우리의 기도를 지체하지 않으시고 응답해주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무한하신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에게 속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에게 직접적으로 또한 즉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언제나 기도의 줄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기도의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축복이요 특권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이제 26절 하반부 말씀의 뜻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6절 하반부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전혀 기도하시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내 도움이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직접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 가서 내 이름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게 속한 너희들이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들어주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우리들이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나아가면,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받으시듯이 우리도 그대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요 특권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론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롬8:34의 말씀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주시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롬8:26 말씀을 읽어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주시는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또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를 몰라서 막막해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만큼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주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말 너무나도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조차도 우리를 위해서 다 돌보아주십니다.
그뿐 아닙니다. 요일2:1과 2절 상반부에 있는 말씀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예수님은 우리의 대언자가 되셔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우리 죄의 용서를 위하여 기도해주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하여 기도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롬8:28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예수님에게 속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끊임없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어떤 벽이 우뚝 서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벽 뒤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에게 나아가서 우리가 직접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우리가 무엇을, 또 어떻게 구해야 할 지를 모를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주십니다. 또한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 예수님은 우리의 죄 용서함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나님에게 해주십니다. What a Saviour! 정말 예수님은 우리의 놀라운 구세주이십니다.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맙시다. 언제나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시는 예수님만을 힘있게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the proclamation of love, 27절).
오늘 본문 27절 말씀입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에게 나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 나서입니까? 우리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 대답은 오늘 본문 27절 마지막 부분이 밝히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뜻하기 위해서 보통은 아가페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흔히 사용되는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독특하게도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헬라어에서 필레오는 가족들과 동기들 간의 사랑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산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게 하십니다. 이 때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친히 사랑하실 때, 아가페의 사랑이 아닌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하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마치 하나님의 가족처럼 따뜻하게, 애정 깊게 사랑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을 해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서로 사랑하는 한 가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롬8:15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종은 주인이 부르면 두려워합니다. 매맞을 일을 했을까봐 걱정이 앞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에 종처럼 떨면서 이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왔습니다. 매를 들지는 마십시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다 들으시기까지는 좀 기다려주십시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아바 아버지, 여기에 제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서 들어주세요.”
여기에 사용된 “아바”라는 단어는 아람어를 음역한 것입니다. 우리말의 아빠와 같이 아버지를 부를 때 친근하게 부르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종이 상전 앞에 서는 것처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나아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심정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회초리를 들고서 우리의 뒤를 좇아 다니시는 분이라고 생각하지를 맙시다. “이것을 하면 안 돼. 저것도 하면 안 돼. 말을 안 들으면 벌을 줄 테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스스로를 자학하면서 괴롭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좋아하십니다. 따라서 비록 우리가 성실하지 못하고, 탕자처럼 아버지를 떠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변함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독특하신 사랑, 곧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7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줄로 믿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에게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각별하신 사랑을 받게 됩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여드릴 수 있습니까? 요14:21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은 요14:23에서 다시 한번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서 예수님에게 우리의 사랑을 보여드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보여지면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줄로 믿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롬5:8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천사들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누구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해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천사들이 타락했을 때는 그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타락했을 때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보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 우리는 천사보다도 훨씬 더 귀하고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서 확증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우리가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온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세 가지의 말씀으로 제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금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앞으로는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the promise of understanding, 25절).
혹시 예수님의 말씀이 아직도 잘 이해되지 않습니까? 비사처럼 들려지십니까?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더욱 힘있게 예수님을 의지합시다. 그러면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을 밝히 이해하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the privilege in prayer, 26절).
혹시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나아가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벽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어떠한 문제라도 하나님께 아뢸 수 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를 모르십니까? 예수님을 힘있게 의지합시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간구해주십니다. 죄를 짓고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십니까? 그럴수록 예수님을 힘있게 의지합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의 대언자가 되셔서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하나님에게 기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죄 사함의 은총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the proclamation of love, 27절).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줄로 믿으십시다. 그러면 설령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를 버릴지라도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친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같은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우리를 위로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여보십시다. 오늘 본문 요16:25-27 말씀을 다시 읽어봅니다.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붙잡으면 다 붙잡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놓치면 다 놓치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를 위로하시는 예수님을 힘있게 의지함으로서 복되고 승리로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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