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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1) (행1:1-5)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1) (행1:1-5)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복음전파의 사역은 주로 예수님이 도맡아서 행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그저 예수님이 행하시는 복음전파의 사역을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로는 제자들이 직접 복음전파의 사역을 감당한 것은 불과 두 번 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눅9:1-2입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또 눅10:1-2입니다.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먼저는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을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 그 다음에는 칠십 인의 제자들을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 두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복음전파의 사역은 예수님에 의해서 행하여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사역을 모두 마치시고 승천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복음전파의 책임을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마28:18-20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이어서 복음전파의 사역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줄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제자들의 상태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증인이 되기에는 미흡한 점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아직 그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점들이 많았습니다. 아직은 그들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받기 이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의 믿음도 연약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자주 예수님의 책망을 받아왔습니다. 예컨대 마8:26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또 마14:31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또한 마16:8입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아울러 그들에게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만한 용기나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사로잡히실 때에는, 예수님과 함께 있을 생각을 하지 않고 다 도망을 쳤습니다. 뒤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있었습니다. 요20:19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처럼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서 복음전파 사역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제자들이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한 채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만드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부족을 채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능력 있게 그리고 충성스럽게 복음전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면서 변함없이 돌보아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성공적인 복음전파의 사역을 위해 제공하신 것들이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전파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the example, 1-2절).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셨습니다(the faith, 3절).

셋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셨습니다(the might, 4-5절).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서 우리 모두도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이 되어서 힘써 복음을 전함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맺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기를 소원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전파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the example, 1-2절).


1-2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사도행전의 배경이 되는 몇 가지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 말씀은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눅1:3-4입니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누가복음은 누가에 의해서 기록되었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 곧 누가복음을 데오빌로 각하를 위해서 썼습니다. 누가가 또 다시 데오빌로를 위해서 쓴 글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도 누가에 의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누가에 대한 언급이 단 세 번 나옵니다. 먼저 골4:14입니다.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누가의 직업은 의원 곧 의사였습니다. 이번에는 몬24입니다.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빌레몬서는 옥중서신입니다.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누가는 바울 곁에 머물면서 그의 건강을 돌보면서 그의 뒷바라지를 감당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딤후4:11입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순교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서신입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 바울 곁을 다 떠났지만, 누가만큼은 바울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그와 함께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이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보낸 두 번째 글이었습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하나님을 뜻하는 “데오”와 사랑을 뜻하는 “빌로”가 합쳐진 것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beloved of God) 또는 “하나님의 친구”(friend of God)입니다. 눅1:3에서 누가는 데오빌로를 가리켜서 “각하”라고 불렀습니다. 주후 2세기의 어떤 문서에 의하면, 데오빌로는 안디옥을 다스렸던 로마의 총독이었다고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누가도 안디옥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은 같은 도시에 살면서 상당한 친분을 가졌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떤 책을 쓸 때에 그 책을 자기가 잘 알고 있고 또 존경하는 인물에게 헌정을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지금 누가도 같은 방식으로 데오빌로 각하에게 누가복음에 이어 사도행전을 기록하여 헌정을 한 셈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복음전파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예수님에게서 본받아야 할 점들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는 오늘 본문 1절과 2절에서,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본받아야 할 점을 세 가지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행하심입니다(Christ's actions, 1절).

둘째, 예수님의 가르치심입니다(Christ's teaching, 1절).

셋째, 예수님의 성령으로 명하심입니다(Christ's commandments through the Holy Spirit, 2절).

첫째는 예수님의 행하심입니다. 누가는 본문 1절에서 예수님의 행하심을 예수님의 가르치심보다 앞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복음전파의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전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 자신이 우리가 전하는 그대로 살아야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마23:2-3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문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말과 행동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고 가르치는 그대로 행동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행동으로서 제자들에게 삶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우리의 삶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복음을 자신 있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복음을 효과 있게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이었던 디도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딛2:7-8, 그리고 10절 하반부에 있는 말씀입니다.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며, 우리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자연적으로 설득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제자들을 말씀으로 계속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까지 계속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3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예수님은 세상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정치에 대해서, 경제에 대해서, 문화나 외교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나라의 일, 곧 복음에 대해서만 가르치신 것입니다. 호4:6 상반부 말씀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바르게 전할 수도 없고 또 무엇을 전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마땅히 전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일은 전하지 않고, 세상 나라의 일에 얽매이고 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심하게 되면 교회에 나오는 초신자를 상대로 해서 돈을 빌려달라, 보험에 들어달라고 난처한 부탁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그 초신자는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시험이 들어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생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일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4:12 말씀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깊이 묵상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운동력이 있게 전달이 되어 그것을 받는 이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으로 명하심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은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성삼위 하나님의 삼위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곧 삼위의 하나님은 언제나 일체로 역사하십니다.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또 성자 예수님은 이 땅에서 성부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요4:34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그리고 성자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자신의 사역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몇 구절의 말씀만 찾아보겠습니다. 눅3:21-22입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눅4:1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눅4:14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마지막으로 한 곳만 더 찾아봅니다. 눅10:21입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삼위 하나님은 언제나 일체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는 언제나 성삼위 하나님이 일체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의 권능으로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그 놀라운 일을 듣고서는 무엇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까? 마12:24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그때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2:31-32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그냥 명하셨다고 말씀하지 않고, 성령으로 명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이것을 본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인 줄 압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특히 복음을 전할 때에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전하려고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신 것처럼,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에는 성령으로 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복음을 전하고, 성령님의 권능으로 복음을 전할 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씨앗은 비로소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전도의 문이 활짝 열리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을 본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행하십시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을 전하십시다. 아울러 우리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우리 자신을 맡기십시다. 그러면 사도들에게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렸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전도의 문은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셨습니다(the faith, 3절).


3절 말씀입니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여기에 세 가지 사건이 순차적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예수님은 해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셋째, 부활후의 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시면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확실한 많은 증거로 자신의 친히 사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컨대 부활하신 예수님은 문을 걸어 잠근 방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요20:19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못 박히신 상처를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눅24:39입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같이 먹기도 하셨습니다. 눅24:41-43입니다.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너무나도 확실한 증거로 자신의 다시 사심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요21:12은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이 이처럼 확실한 증거로 자신의 다시 사심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셨습니까?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면, 제자들이 무엇을 믿고서 또 무슨 근거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나아가서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예수님이 다시 사신 자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시지 않으셨더라면, 제자들은 실망 가운데 자신들의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 가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기독교도 끝이 나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신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도 사십 일 동안 확실하고도 많은 증거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결과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일에 관한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사실임을 확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순교하기까지 기쁨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곧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 앞에서도 조금도 거리낌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행2:22-24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에 겁을 집어먹고 숨어 있던 제자들이 이처럼 담대하게 복음의 증인이 된 것만 보아도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누구에게 자신의 친히 사심을 나타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저희에게” 곧 “택하신 사도들에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부활장인 고전15:5-8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의 친히 사심을 나타내신 자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직 자신의 택하신 자들에게만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전연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지를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 앞에 나타나시면 그들이 돌이켜서 회개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까요?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이 해 받으시기 이전에는 복음전파의 사역이 예수님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예수님은 그 일을 누구에게 맡기셨습니까?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친히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에게 전적으로 복음전파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살아 계신 예수님과 날마다 함께 동행하는 바로 우리들에게 그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육안으로는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예수님은 요15:26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님이 하시는 사역은 살아 계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갈2:20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언제나 살아 계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늘 살아 계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의 친히 사심을 나타내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되,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힘써 복음을 전할 때,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통하여 친히 역사하실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셨습니다(the might, 4-5절).   


오늘 본문 4절 말씀입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수님은 눅24:49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우리가 오늘 본문 5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는 물론 성령님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사셨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자기들이 아무 때라도 자신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성령님을 받기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그곳에 그대로 머무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성령님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금 전에 읽은 눅24:49이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받아야,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행1:8에서도 같은 내용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이런저런 전도훈련을 많이 받고, 또 아무리 전도하기 위해서 많은 물질을 쓴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해서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히우기 전에는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죽은 영혼을 되살려 영생을 얻게 하는 일이 인간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는 성령님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오시기까지는 기다리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세례 요한도 이와 같은 말씀을 이미 한 적이 있었습니다. 요1:26입니다.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또 요1:33-34입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요16:7입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제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먼저 하늘 나라로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제자들에게는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이 오시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약 한 주간 정도를 기다렸습니다. 그때 그들은 오순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절기 가운데 하나인 오순절은 유월절 이후 오십 일째 되는 날에 지키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드신 직후에 사로잡히셨습니다. 곧 바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흘 동안 무덤에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십 일 동안 이 땅에 머무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셨습니다. 계산상으로 보면, 그로부터 칠 일이 지났을 때가 바로 오순절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분부하신 날로부터 한 주간 정도를 기다린 셈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오순절을 기해서 모두가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을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행2:1-4입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제자들은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해서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히웠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비로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충성스럽게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다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님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사정이 다릅니다. 롬8:9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들인 우리에게는 이미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에게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이 입히운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왜 나는 이다지도 능력이 없을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비록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지만, 우리가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마8:23-27에 나오는 내용으로 설명해봅니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제자들이 탄 배에는 분명 예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시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전혀 체험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깨어 역사하실 때,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은 분명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령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서 성령님이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더라도 우리는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엡5:18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술에 취하면 술로 충만해지는 셈입니다. 그러면 절로 술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우리는 절로 성령님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엡5:19-20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곧 이어서 바울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의 실례를 남편과 아내의 삶에, 부모와 자녀의 삶에, 또 상전과 종의 삶에 적용을 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와 똑같은 내용을 골로새서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골3:16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리고 계속해서 부부 사이를, 부모와 자녀 사이를, 상전과 종의 사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베소서에서는 성령의 충만함이 골로새서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한 것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면, 자동적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으로 충만하기를 바라십니까? 늘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절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능력이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또한 소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예수님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능력 있는 일군이 되도록 예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이미 제공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제공해주신 세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전파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the example, 1-2절).

둘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심어주셨습니다(the faith, 3절).

셋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권능을 주셨습니다(the might, 4-5절).   

예수님은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순종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순종했습니다. 행5:42입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6:7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또 행9:31입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날마다 믿는 자의 수가 더 많아지니라. 우리도 순종함으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날마다 믿는 자의 수가 더 많아지는 크고도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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