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요한복음 4장 21 - 24절(개역개정)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시다가 수가성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한 여인과 대화하시는 내용입니다. 야곱의 우물은 세겜에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금년에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팀이 이스라엘 갔을 때 세겜 지역을 방문했지만 야곱의 우물을 보지 못했습니다. 야곱의 우물은 야곱의 우물 교회 안에 있는데 저희들이 갔을 때는 교회 문을 열지 않아서 볼 수가 없었고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여호수아의 기념비만 보고 돌아왔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배에 대한 몇 가지 진리를 말씀 하셨습니다. 먼저는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입니다. 예배의 대상은 아버지이십니다. 물론 예수님과 성령님도 예배의 대상이 되실 수 있지만 본문에서 주님이 제시하는 예배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예배의 초점은 아버지께 맞춰져야 합니다. 사람이 영광 받거나 다른 일에 집중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문기태 목사님의 설교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중국고사에 보면 어떤 왕이 왕비를 몹시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왕비가 갑자기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습니다. 왕은 몹시 슬퍼하며 왕비를 궁궐 근처에 경관이 빼어난 야산에 장사지내고 묘만 홀로 있는 것이 애처로와 근처에 큰 정원을 만들어 좋은 나무를 심고 아름다운 꽃을 많이 심게 했습니다. 연못을 파고 아름다운 물고기를 넣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주 왕비가 묻힌 산소를 찾았습니다. 신하들에게 멋진 누각을 지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는 종종 신하들과 함께 술도 마시고 시를 짓고 하며 쉬며 옛날 사랑하던 왕비와 함께 나누던 사랑을 기억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잘 가꾼 왕비의 산소를 종종 찾던 왕은 어느 날 신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여봐라 이렇게 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에 산소가 있으니 보기가 흉하구나! 저 산소를 없애버려라.” 주객이 전도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뜻은 주인과 객이 바뀌었다는 내용입니다. 교회 안에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아름다운 예배당을 짓고, 내부를 멋지게 꾸미고 좋은 시설을 갖춥니다. 찬양대와 오케스트라 세련된 안내위원 등이 있고 리허설을 하며 준비를 철저하게 합니다. 부족함이 없이 갖추어진 예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에 마음을 쓰다가 정작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은 잊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준비된 좋은 시설, 재능을 갖춘 사람들의 충분한 연습을 통해 다듬어진 모습으로 아름답게 예배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예배에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것에 집중하면 아무리 멋진 예배도 그 예배는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사람이나 일이 아니라 아버지이십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드리는 것이지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인들이 극장에 가면 연극을 보는 것이지 연극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극장에서 연극을 보듯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찬양단의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설교자의 설교하는 모습을 보기만 하고 잘한다 잘못한다고 판단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내가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예배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왜 중요할까요?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에 예배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예배 자를 찾으십니다. 누가 예배를 드리는 가를 찾고 또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를 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몽골의 이용규 선교사님이 쓴 ‘내려놓음’이라는 책에 “소 대신 예배를 택하는 마음”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몽골 이레교회에서 개척한 베르흐 지역의 예배처소를 방문해 예배를 드리던 중, 벌러르라는 자매가 예배시간에 땀으로 뒤범벅이 돼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 자매는 몇 달 전에 기도를 통해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린 자매였습니다.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려서 소를 찾으러 뛰어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고, 소를 버려두고 예배를 드리려고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때 선교사님은 소가 아닌 예배를 선택한 이 자매의 믿음의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자마자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잃었던 소가 집이 아닌 예배 처소를 찾아온 것입니다. 소가 아닌 예배를 선택한 이 소녀는 예배와 소, 두 가지를 함께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경우 예배를 드릴 것인가 다른 일을 할 것인가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예배에 우선순위를 두기를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언제나 예배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런 신앙생활이 건강한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시는데 어떤 예배자를 찾으십니까? 참되게 예배하는 자입니다. 잘못된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지도 않으시고 받지도 않으십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생각해 봅시다. 가인도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아벨도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불로서 응답해 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아주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시고 제사를 받으신 증거로 불로서 응답해 주신 예들이 있습니다. 아론의 제단의 제사를 받으셔서 불을 내려주셨고 그 불이 약 500년간 꺼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다윗의 제사를 받으셨고 역시 하늘에서 다윗의 제단에 불을 내려주셨습니다. 솔로몬의 제단에도 하나님은 불을 내려주셨습니다. 왕상 18장에 보면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영적 전쟁을 치를 때 엘리야의 제단에 불을 내려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예배에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하나님의 임재와 응답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만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주 싫어하시는 제사도 나옵니다. 사 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제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제사 드리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하셨습니다. 사 1:11-15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11절 보니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13절을 보니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신다고 했고, 그들의 신행이 불일치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견디지 못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14절을 보니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를 싫어하셨고, 하나님에게는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이라고 하셨습니다. 15절에 보니 하나님은 눈을 감으시고 그들을 보지 않으시고, 그들의 소리도 듣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제사를 철저하게 부정하셨습니다. 말 1:10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과 제사가 얼마나 잘못 되었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제사 드리러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성전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예배를 드린다고 하나님이 다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예배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하나님께 예배 하며 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처럼 형식을 갖춘 예배도 평생 드려야 하고, 롬 12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드리는 생활의 예배도 평생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생 드리는 예배 중에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예배는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부르는 찬양 중에 ‘주를 위한 이 곳에’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내용은 참된 예배자가 없어 주님이 슬퍼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주를 위한 이 곳에/ 예배 하는 자들 중에/ 그가 찾는 이 없어(적어)/ 주님께서 슬퍼하시네/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그 예배자/ 내가 그 사람 되길/ 간절히 주께 예배하네/ 주 은혜로 이 곳에 서 있네/ 주 임재에 엎드려 절하네/ 그 어느 것도 난 필요 없네/ 주님만 경배해/ 주 은혜로 이 곳에 서 있네/ 주 임재에 엎드려 절하네/ 그 어느 것도 난 필요 없네/ 주님만 경배해” 우리 다 같이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같이 부르는데 가사를 조금 수정해서 부르겠습니다. ‘그가 찾는 이 없어’를 ‘그가 찾는 이 적어’로 수정해서 불러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가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가 되길 축원합니다. 오늘 설교는 주님이 말씀하신 예배와 관련된 진리 중에서 참되게 예배하는 원리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3,24절에서 주님은 참되게 예배하는 자는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1. 성령으로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23,24절을 보면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영은 성령님을 말합니다. 헬라어 원문에 보면 프뉴마 라는 단어입니다. 프뉴마가 무엇인가요? 성령이죠. 예배는 하나님과 교통입니다. 하나님과 교통이 없는 일방적인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과 교통이 잘 되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에는 성령님의 역사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 편에서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응답하셔야 온전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리고, 찬송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헌금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은혜 주시고, 말씀 주시고, 감동 주시고, 치유를 주시고, 응답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복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교통이 있어야 그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교통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습니다. 영과 육신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교통이 불가능합니다. 이 교통을 가능하게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역할이 필요하고 우리 영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방송국에서 전파를 보내면 우리는 그 전파를 통해서 소리를 듣고 그림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몸은 방송국에서 보내는 전파를 소리와 그림으로 전환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전파를 전환하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그 전환 역할을 하는 것이 텔레비전입니다. 텔레비전에 있는 수신 장치가 방송국에서 보낸 전파를 소리와 그림으로 전환해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좋은 것들을 우리가 감지할 수 있게 하는 일을 성령님과 우리의 영이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생명과 능력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자동차가 완벽하게 만들어졌어도 기름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듯이 우리가 부르는 찬송,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 헌금에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없으면 그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참된 예배가 되려면 반드시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 성령님의 역사가 있는 찬송과 성령님의 역사가 없는 찬송은 같은 것 같으나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으면 메마른 찬송입니다. 박자와 음정이 맞아도 메마른 찬송은 부르기가 힘듭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으면 전혀 은혜가 되질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역사하시면 은혜가 됩니다. 감동이 있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찬송 중에 행복해집니다. 그런 경험해보셨습니까?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새 힘이 임합니다. 등이 불을 밝히려면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등은 완벽한데 불을 밝힐 기름이 없다면 그 등은 무용지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하고, 헌금을 드려는 것이 하나님께 응답 되려면 반드시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참된 예배를 원하는 사람은 성령님을 인정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사모하고 인정하고 기도하는 만큼 역사해주시는 분입니다. 잠 8:17에 보면 지혜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정하고 사모하고 성령님을 구하는 기도를 하면 우리를 만나주시고 감동하시고 은혜주시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자는 성령으로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로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23,24절을 보면 참된 예배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앞에서 영은 성령님이라고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럼 진리는 무엇입니까?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 14:6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로 예배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예배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의지해서 하나님께 예배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의지할 존재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해야 합니다. 성경은 너무도 분명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직 예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 14:6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 외에는 하나님께 나아갈 다른 길은 없습니다. 행 4:12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이번 주에 교황이 대한민국을 방문했고 그의 서민적인 행보 때문에 온 국민이 열광하고 있습니다. 오늘 천주교 미사에는 다른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릴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상당히 안타깝게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눅 6:39)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는 비성경적인 혼합종교입니다. 천주교는 오래 전에 이미 성경을 떠났고 태양신을 숭배하는 이단입니다. 바티칸 마당에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습니다. 천주교를 깊이 들여다보면 사탄인 루시퍼를 숭배하는 배교 집단입니다. 사단을 숭배하는 집단이라는 부분에 반발심을 갖는 분도 있을 수 있을 텐데요. 그런 분들은 유튜브에 들어가셔서 “충격! 바티칸이 루시퍼를 칭송하는 영창을 부르다”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루시퍼는 사탄입니다. 그런데 사탄에게 찬송을 합니다. 그 영창에는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아멘 하지 마세요. “불타오르는 루시퍼가 인류를 찾으신다. 내가 말하노니 오 루시퍼여 당신은 결코 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아들입니다(어떻게 그리스도가 사단의 아들입니까). 지옥으로부터 돌아와서 평화로운 빛을 비추었던 그는 살아있고 그리고 영원히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루시퍼 즉 사단이 영원히 세상을 다스린다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교황은 곁 모습은 평화의 사도로 보이지만 사실은 많은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사단의 앞잡이입니다. 성경과 진리를 모르는 일반인들은 천주교와 교황의 겉모습에 속아서 멸망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일반인들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목사들 중에도 분별을 못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천주교의 배교의 역사를 간략하게 더듬어보겠습니다. 주후 378년에 로마의 감독 지금으로 말하면 교황이 이교도의 최고 승원장을 겸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데 이교도의 승원장을 겸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의 총회장이 불교의 총무원장을 겸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는 유일신신앙입니다. 주후 788년에는 십자가, 초상화, 성자상 그리고 유골 숭배를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런 것들을 숭배할 수 있습니까? 주후 800년에는 마리아에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그의 몸을 사용하셨을 뿐이지 마리아에게 신적인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후 1190년에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부자가 천국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는데 천주교는 사람의 영혼을 돈으로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놀라운 것은 주후 1229년에는 성경 구독을 금지시켰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참 놀랍지 않습니까? 진리를 알고 진리를 믿어야 하는데 자신들이 진리에서 떠났기 때문에 진리인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겠습� 歐� 주후 1854년에는 마리아 무죄 잉태설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주후 1870년에는 교황 무오설을 주장했습니다. 교황은 육신을 입은 인간이 아닙니까? 어떻게 육신을 입은 인간이 무오 할 수 있습니까. 주후 1870년에는 요셉을 교회의 수호신으로 정했습니다. 교회를 요셉이 지켜줍니까? 주님은 ‘내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주후 1917년에는 마리아가 은총의 중재자라고 정했습니다. 어떻게 마리아가 은총의 중재자가 됩니까? 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고 말씀합니다. 중보자는 한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마리아는 은총의 중재자가 될 수 없습니다. 또 기가 막힌 것은 주후 1931년에는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확정했습니다. 1950년에는 마리아 부활 승천설을 1962년에는 마리아 종신 처녀설을 만들었습니다. 완전히 성경에서 벗어난 이단적인 사상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우리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참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재자로 믿고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예수님 외에 그 어떤 존재도 필요치 않다고 믿는 믿음의 예배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중보자로 믿는 사람입니다.
3. 말씀으로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참 되게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입니다. 영은 성령님이고,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또 하나의 진리를 말씀합니다. 요 17:17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말씀 안에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말씀 안에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말씀은 국경선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DMZ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으로 대치중에 있습니다. 철책선 이남은 대한민국이고 이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입니다. 함부로 철책선을 넘으면 그는 총에 맞습니다. 몇 년 전에 민간인 한 사람이 철책을 넘어서 이북으로 가려다가 총에 맞아죽은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가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말씀 안에 거하면 생명입니다. 말씀을 넘어가게 되면 사망입니다. 천주교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행위나 그들의 선행이 아닙니다. 그들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 선 것이 문제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사망입니다. 하나님께는 아웃인 것입니다. 신앙의 길의 가이드라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즘 마라톤을 하는 것을 보니 바닥에 파란 선을 그어 놓았습니다. 선수들은 그 선을 따라서 달려야 합니다. 그 선을 지나치게 벗어나면 그 선수는 실격입니다. 아무리 잘 달렸고 아무리 멋지게 달렸어도 실격인 것입니다. 제가 지금 아주 쉬운 야기를 하고 있지만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 더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축구시합을 할 때 선수는 운동장 안에서 시합해야 합니다. 공을 차서 넣었는데 그 공이 골인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운동장 안에서 공을 차야 합니다. 아무리 강하게 공을 찼고 아무리 멋지게 공을 찼어도 운동장 밖에서 차면 그 공은 골인으로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선수가 비실거리며 볼품없이 공을 찼습니다. 정말 허접한 공이지만 운동장 안에서 찼고 그 공이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면 그 공은 골인으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사는데 언제나 흔들리고 요동하고 왔다 갔다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사람에게 인생의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기준이 없으니 자꾸만 흔들리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일관성이 있는 생활을 합니다. 그는 실수하여 넘어질 때는 있어도 좌로나 우로나 늘 치우치는 생활을 하지는 않습니다. 심지가 견고합니다. 잘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에게는 인생의 분명한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건축과 관련된 일을 할 때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수평과 수직을 잡는 것입니다. 수평과 수직을 제대로 잡아야 건물이 견고합니다. 과거에는 수평과 수직을 잡을 때 다림줄을 사용했습니다. 요즘은 붉은색 레이저를 쏘는 기계가 있어서 정확한 수평과 수직을 잡아줍니다. 그 기계의 이름이 레이저 수평기입니다. 인생의 수평과 수직을 잡아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말씀 위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복된 인생이 됩니다. 수 1:5-9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평생 그를 당할 대적이 없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처럼 여호수아와 함께 계시며 여호수아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족장들에게 약속했던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길이 평탄하며 형통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런 조건입니다. 수 1:8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진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약속은 그에게만 하신 약속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역시 여호수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진리 안에 거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도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진리가 기둥이고 터이기 때문입니다. 딤전 3:15에서는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고 말씀합니다. 기둥이 없는 건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터가 없이 건물을 세울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진리를 놓아버린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라는 간판을 달았으나 진리를 버렸다면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비전교회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진리대로 행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고 진리대로 행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구원입니다. 다른 것을 다 잃어버리는 일이 있어도 구원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구원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구원을 붙들 수 있는 힘을 제공합니다. 예배에 실패하면 구원을 붙들 수 있는 힘을 잃게 되어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구명 튜브를 던져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튜브를 붙잡으면 삽니다. 그런데 만약 그에게 튜브를 붙잡을 힘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는 구원을 받았으나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들에게 구원을 붙들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줍니다. 그러므로 예배자가 되십시오.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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