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출애굽기 25장 10 - 22절(개역개정)
10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짜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1 너는 순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위쪽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금 테를 두르고 12 금 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쪽에 두 고리 저쪽에 두 고리를 달며 13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싸고 14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15 채를 궤의 고리에 꿴 대로 두고 빼내지 말지며 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17 순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8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 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20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만들도록 명하신 성막의 기구들 중에서 법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법궤는 성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법궤는 조각목을 금으로 씌워서 만듭니다. 조각목이 드러나면 안 됩니다. 조각목은 완전히 가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습니다. 어느 회사 사장이 공장내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사장은 수시로 목사가 바뀌었습니다. 3개월 만에 바뀐 적도 있었습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었습니다. 예배당에 자기가 앉는 의자는 강대상 앞에 특별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분은 금은 안 보이고 조각목만 보이는 분입니다. 어느 날 목사도 아닌 젊은 전도사가 부임하였습니다. 그 전도사는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러 나가서 사장이 오기 전에 의자를 밖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마침 사장 차가 창문가에 주차되어 있다가 박살이 났습니다. 사장이 들어 와보니 자기 의자가 없어졌습니다. 전도사는 쫓겨날 생각을 단단히 하였기게 강하게 말했습니다. “사장님도 저 자리에 사원들과 같이 앉으십시오.” 사장은 처음으로 사원들 자리에 가서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얼굴이 죽을상이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서 나가 보니 자기 차가 박살났습니다. 전도사는 사표를 써들고 사장실로 갔습니다. 사장이 전도사를 맞으면서 말했습니다. “전도사님이 참 목자요. 고마워요. 같이 일해요.” 그리고 멋지게 같이 일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교회에서 사람이 나타나기 쉽습니다. 금 속에 감추어져야 할 조각목이 드러나면 안 됩니다. 법궤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법궤는 조각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조각목은 예수님의 인성을 보여줍니다. 조각목을 금으로 쌌는데 금은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법궤 위 뚜껑인 속죄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만나주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법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 2개와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습니다. 십계명 돌판은 우리에게 새계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만나를 담은 항아리는 우리의 양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오늘 설교는 크게 두 부분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법궤의 일반적인 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둘째는 법궤가 주는 영적인 교훈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법궤의 일반적인 면 1) 법궤의 모양 법궤는 가로 125cm, 세로 75cm, 높이 75cm의 크기의 조각목으로 만들었습니다. 조각목은 아카시아과의 싯딤나무를 말합니다. 법궤의 안과 밖은 정금으로 싸고 돌아가며 금테를 둘렀습니다. 그리고 윗가로 돌아가며 금고리 넷을 만들어 운반에 용이하게 만들었습니다. 법궤를 나르는 채 역시 조각목에 금을 입혀서 만들었습니다. 법궤 위에는 두 그룹 천사를 금으로 쳐서 만들었습니다. 그 그룹이 편 날개는 법궤 뚜껑인 속죄소를 덮도록 만들었습니다.
2) 법궤의 이름 법궤의 이름은 몇 가지입니다. 첫째, 증거궤입니다. 하나님을 증거 하는 말씀으로 십계명을 담고 있다고 해서 증거궤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는 법궤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셨고 증거궤라는 이름을 사용하셨습니다. 둘째, 법궤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으로 십계명을 담고 있다고 해서 법궤라고 불렀습니다. 셋째, 언약궤입니다. 시내산의 언약의 내용으로서 십계명을 담고 있다고 해서 언약궤라고 불렀습니다. 넷째, 여호와의 궤입니다. 법궤의 주인이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여호와의 궤라고 불렀습니다.
3) 법궤의 용도 하나님은 법궤를 만들게 하실 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게 하신 것 같습니다. 법궤는 다음과 같은 용도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용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임재하실 때 성막에 임재 하셨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막 안에서도 지성소 안에 임재 하셨고, 지성소 안에서도 법궤 위에 임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용도입니다. 법궤의 뚜껑을 속죄소라고 했습니다. 다른 이름은 시은좌입니다. 시은좌(施恩座)는 한문으로 베풀 施(시)에 은혜 恩(은) 자리 座(좌)를 씁니다. 은혜를 베푸는 자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임재하시는 자리가 법궤였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은혜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물의 세계에 나온 내용입니다. 동물 연구가가 산속에서 호랑이 새끼를 발견하였습니다. 잡아다가 동물원에서 길렀습니다. 사람과 같이 살았습니다. 온순한 호랑이가 되었습니다. 산으로 돌려보낼 때가 되어서 온순한 호랑이를 산속으로 놓아 주었습니다. 사람과 함께 살던 호랑이가 호랑이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호랑이들은 그 온순한 호랑이를 잡아 죽였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호랑이의 야성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살면서 호랑이의 야성을 잃어버렸기에 다른 호랑이들이 잡아먹은 것입니다. 호랑이들이랑 살려면 호랑이 야성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려면 하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죽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주시는 용도입니다.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법궤의 뚜껑 위에 임재 하셔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만나주셨습니다. 넷째,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사해주시는 용도입니다. 법궤의 뚜껑의 이름은 속죄소입니다. 죄를 속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셨는데 어디서 사해주셨습니까? 법궤의 뚜껑인 속죄소에서 사해주셨습니다. 이 속죄소가 우리의 죄를 속죄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시기 위한 용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주셨습니다. 민 10:33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좋으신 목자이십니다. 여섯째,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기 위한 용도입니다. 수 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 하나님은 언약궤를 앞 세우셨습니다. 수 6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주실 때에 법궤를 앞 세우셨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에너지를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 수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화폐 위조범으로 체포되었습니다. 5만 원짜리를 그렸는데 전문가도 구별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알아보니까 5만 원 권 한 장 그리는 시간이면 500만 원짜리 초상화 하나를 완성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5만 원 권 한 장 그리는 시간에 500만 원짜리 초상화를 그리는데 사용했다면 돈도 얻고 명예도 얻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집중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2. 법궤가 주는 영적 교훈 1) 하나님은 우리와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법궤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기 위한 용도로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법궤로 나아갔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만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궤가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을 붙들어야 아버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만약 교회는 오랫동안 다니는데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또 과거에는 하나님을 만났는데 지금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교회생활은 하지만 곤고한 사람입니다. 늘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2) 하나님은 쓸모없는 것도 귀하게 사용해주시는 분입니다. 법궤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가 되기 때문에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법궤는 조각목으로 만들었습니다. 조각목은 아주 쓸모없는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쓸모없는 나무로 귀한 법궤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적한 길을 따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발길을 멈추고 무엇인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남의 집 정원 한 구석에 놓여 있는 아무렇게나 생긴 대리석이었습니다. 그는 주인을 찾아 가서 말했습니다. “저 돌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주인이 이상하여 물었습니다. “저렇게 쓸모없는 돌을 가져다 무얼 하시려고요?” 그가 말했습니다. “저 안에 예술이 갇혀 있군요. 그것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어서요.” 그 사람은 그 돌을 가지고 가서 최고의 조각품을 만들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최고의 미술가 미켈란젤로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예술가의 손입니다. 쓸모없는 돌멩이 같은 사람을 붙잡아서 위대한 작품을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조각목으로 된 법궤가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조각목이라는 말을 들을 때 무슨 생각이 나십니까? 저는 집성목이 생각이 났습니다. 조각목은 아주 작은 나무입니다. 그래서 법궤의 판을 조각목 한 조각으로는 만들 수 없습니다. 집성목이 여러 개의 나무 조각을 붙인 것처럼 조각목도 여러 조각을 붙여야만 법궤의 판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조각목은 백향목처럼 크지 않습니다. 광야를 지나다보면 아주 드물게 볼 수 있는 나무가 조각목입니다. 광야에서 자라니 수분도 재대로 공급 받지를 못해서 잘 자라지도 못합니다. 아주 작고 구불구불하게 생겼습니다. 조각목은 올리브나무처럼 귀한 열매가 열리지도 않습니다. 포도나무처럼 맛있는 과일이 열리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찮은 나무를 가지고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심도 비슷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조각목처럼 그리 잘난 부분도 별로 없습니다. 조각목처럼 보잘 것 없는데 하나님이 택하셔서 연합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성전을 삼아주셨고 하나님의 교회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고 감사고 자랑인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만하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3) 믿음은 모든 약점을 덮어버립니다. 조각목을 금으로 쌌습니다. 조각목을 금으로 싸니 조각목은 보이지 않고 귀한 금만 보입니다. 신앙생활이 이런 것입니다. 나는 약점이 많지만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 거하면 모든 약점이 가려지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양이 있습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입니다. 1절 가사가 이렇습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당한 어린 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나는 약하지만 주님 때문에 강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가난하지만 주님 때문에 부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불의하지만 주님 때문에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나는 지옥에 가야 하지만 주님 때문에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과 나의 연합니다. 바울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주님과 내가 연합하면 나의 약함도 나의 미련함도 나의 가난함도 나의 불의함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과 연합하면 내 능력이나 내가 자진 것이 일이든 백이든 천이든 만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와 연합하는 주님이 무한대이시기 때문입니다. 부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살림을 합치는 것이 부부라고 설명을 하더군요. 여러분의 재산이 1,000조라고 가정을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의 재산이 얼마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배우자의 재산이 아무것도 없든, 천만 원이 되든, 1억이 되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두 사람의 재산이 합쳐지기 때문에 가난한 배우자는 여러분 때문에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자인 여러분이 가난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그런 것입니다. 믿음은 나의 모든 약점이 주님으로 덮어지는 것입니다. 군산에 가면 군산제일교회라고 있습니다. 거의 2,000평 되는 교회이니 큰 교회지요. 그 교회에 아주 불행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이 확실 집사님입니다. 할머니는 손자 하나 데리고 거의 20년간 종이로 봉투를 만들어 살림을 꾸리며 살았습니다. 기구한 운명의 할머니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과 며느리가 죽었습니다. 손자 하나는 간질병 환자였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뒹굴었습니다. 할머니의 가슴은 온통 멍들어 있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우울증이 괴롭혔습니다. 자기마저 죽고 싶어도 간질병 손자 하나 불쌍하여 죽지 못했습니다. 정말로 약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교회가 봉헌을 할 때에 1,000만원이나 되는 강대상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할머니는 1,000만원을 드려 성물을 봉헌하면서 “하나님! 간질병은 불치라면서요? 그러나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줄 믿습니다. 내 재산을 다 드리니 고쳐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할머니는 사랑의 하나님의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할머니의 기도를 들으시고 손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손자는 지금 간질병에서 완전히 고침 받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가진 주님을 향한 믿음 때문에 주님이 할머니의 약점과 손자의 약점을 덮어주셨습니다.
4)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법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각목이 아닙니다. 금도 아닙니다. 뚜껑에 금으로 쳐서 만든 천사도 아닙니다. 법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신앙생활은 언제나 이 원리를 잊지 말고 해야 합니다. 내가 대단한 능력이 있어도, 내가 대단한 인기를 얻어도, 내가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도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임재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의 실패는 주님의 임재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다른 것에 우선순위를 두기 때문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탈무드 이야기입니다. 양계장을 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 속에 양계장이 점점 번창하였습니다. 그런데 축복을 받으니 신앙생활을 점점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랍비가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왜 신앙생활을 게을리 합니까?” 양계장 주인이 말했습니다. “랍비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쉬지 않고 회당을 드나들고 있습니다.” 그 때 랍비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양계장을 하루에 수십 번 드나든다고 닭이 되나요? 회당에 수없이 드나든다고 성도가 되나요?” 그렇습니다. 양계장을 하루에 수십 번 드나들어도 닭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거듭나고 그래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미국 미네소타 교회 목사님이 교회 앞에 있는 건물을 교육관으로 사용하려고 사고 싶어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건물을 달라고 맹렬히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돈 것처럼 7 바퀴를 돌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팔려서 교회가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실망하고 있는 데 영적으로 낙타가 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선물을 가지고 오는 동방박사가 탄 낙타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했습니다. “더 좋은 선물이 오고 있다.” 그리고 “낙타가 오고 있다”라는 글을 썼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 마굿간에 탄생하셨습니다. 그 때 먼 동방에서 동방박사 세 분이 낙타를 타고 오고 있었습니다. 그들 손에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별을 따라 오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추한 곳, 아무리 더러운 곳이라 할 지라도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는 낙타가 오고 있습니다. 아무리 목수같이 천한 직업이라 할지라도,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낙타가 오고 있습니다. 범궤에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5) 축복과 저주는 사람의 어떠함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삼상 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불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습니다. 삼상 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재앙으로 치셨습니다. 삼상 6장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로 인하여 재앙을 당하니 법궤를 젖 나는 어미 소 2마리에 실어서 이스라엘로 보냅니다. 삼상 7장에 보면 법궤가 아비나답의 집에서 20년간 머물게 됩니다. 삼하 6장에 보면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려고 하다가 웃사가 죽었습니다. 법궤를 실은 수레가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뛰니 웃사가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법궤를 붙잡았습니다. 그 일로 웃사가 현장에서 죽었습니다. 삼하 7장에 보면 법궤가 다윗성으로 가지 못하고 오벧에돔의 집에 3달을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석 달 동안 오벧에돔의 집이 큰 복을 받습니다. 다윗이 그 소식을 듣고는 오벧에돔의 집에 있던 법궤를 다윗성으로 가지고 갑니다. 이 과정을 간단하게 정리합시다. 법궤가 블레셋에 가니 블레셋 사람들 저주를 받았습니다. 법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20년 있었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 있었는데 오벧에돔의 집은 큰 복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는 사람의 어떠함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가 축복과 저주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이 복입니다. 법궤의 경로를 보면서도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주셔서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여인이 병든 남편을 두고 도망하다가 피곤하여 길가에 앉았습니다. 도마뱀이 먹이를 물고 가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심심하여 도마뱀을 잡았습니다. 도마뱀은 꼬리를 떼어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여인은 도마뱀을 쫓아갔습니다. 도마뱀이 바위틈에 몸이 아파 벌렁 누워있는 자기 수컷에게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이 깨달았습니다. ‘아! 나는 병든 남편을 버리고 도망가는 중인데 이 미물은 자기 짝을 이렇게 사랑하는 구나!’ 깨닫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두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축복을 받느냐 저주를 받으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중국 속담에 “누가 얼굴에 침을 뱉어도 닦지 말라. 조금 있으면 마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유 있는 중국인들의 성격을 보여주는 속담입니다. 우리는 반대입니다. 너무 조급합니다. 외국인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한국말이 “빨리 빨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도 조급하게 합니다. 신앙의 복도 빨리 빨리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정도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육신으로 살면 잘 될 것 같아도 하나님이 막으시기 때문에 결국 멸망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안 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도우시기 때문에 결국은 승리하는 것입니다. 정도를 걷는 것은 느린 것 같아도 가장 빠른 길입니다. 늘 이걸 기억하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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