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개역개정)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믿음은 가까운 것을 잘 볼 수 있는 안경과 같습니다. 믿음은 미세한 것을 잘 볼 수 있는 현미경과 같습니다. 믿음은 멀리 있는 것을 잘 볼 수 있는 망원경과 같습니다. 믿음은 속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내시경과 같습니다. 믿음을 갖게 되면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참 신기합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보아야 보이는 책입니다. 믿음 없이 성경을 보면 허구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가득한 책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갖고 보면 성경에서 진리가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믿음을 갖고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예수님이 보입니다. 성령님이 보입니다.
믿음은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비밀은 숨겨진 것들입니다.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비밀입니다. 성경에는 비밀이 많습니다. 천국이 비밀입니다. 영적인 것도 비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비밀입니다. 교회도 비밀입니다. 복음도 비밀입니다.
비밀을 아는 사람은 천국을 사모합니다. 비밀을 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영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비밀을 알기 때문에 복음에 인생을 거는 것입니다. 비밀을 알기 때문에 교회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것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보고 광신적이라고 말합니다. 비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신앙생활이 훌륭해서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어떤 면이 본이 되었습니까? 본문에서는 3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입니다.
오늘 설교는 믿음의 역사에 대해서 다루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役事(역사)’는 ‘일’이나 ‘행위’를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역사’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되는 일,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크게 두 가지를 다룹니다. 먼저는 믿음이 있으면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가입니다. 또 하나는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입니다.
1. 믿음으로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가? 많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경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역사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믿음의 역사를 세 가지로 정리를 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구원의 역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구원입니다. 비전도 중요하고 능력도 중요하고 축복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구원은 그런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천하를 소유했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불행한 것입니다. 세계적인 인기를 얻어도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불행한 것입니다.
구원 받지 못했는데 행복하게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분들이 가진 행복은 참된 행복이 아닙니다. 아주 맛있는 빵 속에 독이 들어있습니다. 독을 먹기까지는 너무 맛이 있겠지요. 그러나 곧 독을 먹게 되고 그 사람은 고통 속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구원 받지 못하고 행복한 것이 이런 것입니다.
그럼 구원은 어떻게 받습니까? 믿음의 역사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구원은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사면 핸들이 붙어오고, 자동차를 사면 타이어가 붙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 벧전 1:9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십자가 공로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2) 행함의 역사 말씀대로 사는 것은 결심으로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믿음을 가지면 자동으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투명한 컵이 자신을 빨갛게 보이려고 노력한다고 빨개지는 것이 아닙니다. 빨간 음료가 컵 속에 들어가면 빨갛게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빨갛게 보이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해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면 살아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경적인 믿음이 있고 비성경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적인 믿음이든 비성경적인 믿음이든 믿음을 가지면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아주 쉽게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 중에 한 사람이 예배를 드리는데 갑자기 예배당건물이 부실해서 금방 무너진다는 이상한 믿음이 생겼다고 가정을 합시다. 그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당장 일어나서 예배당을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이상한 믿음이 그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 주차장 밑에 엄청난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믿어진다고 가정합시다. 제가 어떻게 할까요? 제가 가만히 있을까요? 행동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주차장 바닥을 파기 시작할 겁니다. 믿음은 행동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대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타오르는 불꽃에서 열과 빛을 분리할 수 없듯 신앙생활에서 믿음과 행실은 분리할 수 없다” 맞습니다. 동전의 양면을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믿음과 행실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약 2:20),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2) 믿음은 행하도록 만듭니다. 믿음은 행함의 역사가 있습니다.
3) 응답의 역사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우리의 믿음에 반응을 해주십니다. 이걸 응답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기도하는 소리에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믿음에 응답 하십니다. 성경 약 1:5-7을 봅시다. 기도 응답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기도자의 믿음에 반응하시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하면 응답하시고 믿음 없이 기도하면 응답하시지 않으십니다. 믿음은 응답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의 순서에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의 믿음에 응답하십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면에 아벨의 제사에는 응답해 주셨습니다. 아마도 아벨의 제물에는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응답을 하신 것 같습니다.
성경 히 11:4에서는 그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믿음에 응답해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한번은 맹인들을 치료해주신 일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눈을 만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 9:29) 주님은 믿음을 보시고 믿음대로 역사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응답의 역사가 있습니다.
제가 전에 머리카락 없이 태어난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엄마가 아기를 낳았는데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솜털하나도 없었습니다. 아기 엄마는 목사님에게 안수기도를 받으면 하나님이 치료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새벽마다 아기를 업고 교회에 나아가서 목사님께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돌이 지나도 록 기도를 받았지만 솜털하나 생기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계속 새벽마다 목사님께 안수를 받았습니다. 2년이 지나도 아기의 머리는 그대로였습니다. 3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도 엄마는 새벽에 안수 받는 것을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아이가 16살 되던 해,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에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하더니 머리카락이 일반인들처럼 정상적으로 수북하게 생겼습니다. 결국 믿음이 승리한 것입니다. 그 엄마의 믿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 엄마와 아이의 기도에 바로 응답하지 않으시고 15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리셨을까요? 저는 혼자 생각해봤습니다. 아마도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며 조금만 응답이 더뎌도 기도를 포기해버리는 우리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는 어디가 좀 아프면 몇 번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응답이 없으면 곧 포기해버립니다. 응답이 없다는 것은 주님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제가 금년에 목 디스크가 왔습니다. 기도하다가 졸았는데 목을 들 수 없어서 겨우 목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목과 등과 어깨가 결리기 시작하는데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기침을 하면 팔에 마비 증상이 나타나는데 겁도 났습니다.
기도로 고쳐보겠다고 기도하다가 응답이 없으니 병원에 갔습니다.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아도 별 차도가 없었습니다. 갈수록 더욱 심해졌습니다. 신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치료해달라는 기도가 안 될 때도 있었습니다. 신유기도를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제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는데 저도 모르게 목 디스크의 증상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그 사건으로 사람들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를 시작했다가 중간에 기도를 포기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의 불신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에 응답하십니다.
2.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되는가? 4가지로 정리했습니다.
1) 하나님의 은혜 특히 구원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야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 엡 2:8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구원의 확신이 생기는 것이고 은혜를 입지 못하면 구원을 확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말씀을 들음 우리가 불신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엄밀히 따지면 믿음입니다. 세속적인 믿음, 비성경적인 믿음, 반성경적인 믿음이라 그렇지 엄밀히 따지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불신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믿음이든 세속적인 믿음이든 믿음은 들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성경 롬 10:17에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적인 믿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믿음은 세속적인 것들을 접하므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은 세속적인 것들을 접하는 시간은 많은데 그에 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 시간은 너무나 적다는 것입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주로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공급받습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거나 묵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예배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주일에 1시간 예배를 드리는데 큰 믿음이 생긴다는 것은 기적이죠. 매일 예배를 드려도 세속적인 것들을 접하는 시간에 미칠 수 없는데, 1주일에 한 번의 예배로 구원을 지킨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데 방해요인이 많습니다. 졸음이라든지 잡생각 등 다양한 방해거리들이 있습니다. 잘 이겨내고 말씀에 집중해야 은혜를 받습니다. 음악은 참 좋은 것입니다. 젖소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면 우유의 질이 좋아지고 양도 많아진답니다. 동물원에서 사자를 구경하던 한 바이올린 연주자가 동물원 관리 책임자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자 우리 안에 들어가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 사자가 좋아서 춤을 출 것이오. 나를 우리 안으로 넣어 주시오. 혹 사자가 달려들어 나를 찢어도 당신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그렇게 해 주시오.” 관리사가 사자 우리의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바이올린 연주자가 들어가 연주를 하니 사자가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연주자가 계속 연주를 하며 “다른 사자도 들여보내 주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자 한 마리를 더 들여보냈습니다. 그 사자도 들어오자마자 음악에 취한 듯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또 다른 사자를 들여보내 주시오.” 또 사자 한 마리를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사자는 음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연주자를 잽싸게 덮쳐서 잡아먹었습니다. 귀먹은 사자였기 때문이랍니다. 아무리 좋은 음악도 듣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도 듣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들으려고 하십시오. 할 수만 있으면 많은 예배에 참석하셔서 많은 말씀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3) 하나님을 경험 믿음이 없던 사람이 하나님을 경험하면 믿음을 갖게 됩니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날 때까지 핍박자였습니다. 믿음이 없다보니 성도들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죽이던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노중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나니 믿음이 생겼습니다. 믿음이 생기니 핍박자였던 사람이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 2장에 보면 주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이 나옵니다. 그곳에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때가지만 해도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면서도 주님을 메시야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은 주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요 2:11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하나님 편에서 강권적인 은혜를 주시는 것 말고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두 가지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가 안 되고 손해가 되어도 순종해야 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며 사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가정은 언제나 화기애애하고 화목하다는 소문이 동네에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이웃에 살고 있는 친구 가정은 늘 불화가 잦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그 비결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려고 친구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비결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앞마당에 있는 감나무에서 감을 따오거라.” 아들은 딱 한 마디 했습니다. “네” 그리고 앞마당 감나무로 가더니 먹지도 팔지도 못 할 시퍼런 감을 한 광주리 따왔습니다. 왜냐고 아버지에 묻지도 않고 못 먹을 감을 따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다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소를 지붕위로 끌고 가거라.” 친구는 그런 아버지의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설마 그런 말에도 순종할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 보니 아들이 정말 소를 지붕위로 끌고 올리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깨달았습니다. ‘아버지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것이 화목의 비결이로구나!’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순종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고 우리의 믿음은 자랄 것입니다.
둘째, 기도하면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태백에 가면 ‘예수원’이라고 있습니다. R.A. 토레이가 창설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는 ‘한국 상이군인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습니다. 폭탄을 맞아 죽을 뻔 했습니다. 다행스럽게 구사일생으로 생명은 건졌지만 오른 팔 하나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는 비관했습니다. ‘팔도 없는 내게 누가 시집올까? 팔 하나 잃어버린 나를 어느 직장에서 부를까? 팔 하나 잃어버린 내가 사람 구실이나 할까?’ 그래서 삶을 포기하고 자살하려고 시도하였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모님들은 믿음이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팔 없는 아들을 기도로 잘 길렀습니다. 기도하며 열심히 격려해 주었습니다. 기도하면서 소망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딤전 4:4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그는 이 말씀에 큰 은혜의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모든 것을 감사합니다. 팔 하나 없는 것도 감사합니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팔 잃어버린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픔을 사명으로 받아드렸습니다. 그는 자기처럼 팔 하나 없는 사람을 찾아 위로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으로 팔이 잘라져 나가는 병사들이 많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그는 한국으로 왔습니다. 미국에서 선교단체를 만들어 돈을 모금하여 보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팔이 잘린 병사들에게 의수를 만들어주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저는 팔이 하나 없는 분이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부모님들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면 폐인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팔이 하나 없지만 위대한 인생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와 그의 부모는 기도로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4) 종의 자세 눅 17:5에 보면 사도들이 주님에게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6절에서 먼저 믿음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그리고 7-10절을 통해서 믿음이 더해지는 비결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믿음이 더해지려면 하루 종일 밭에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주인의 밥상을 차리는 종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일하면서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뜻밖의 가르침입니다. 저희 집에 어떻게 하다가 강아지가 한 마리 들어왔습니다. 정말 저는 어쩔 수 없이 키우고 있습니다. 누가 달라고 하면 당장이라도 주고 싶습니다. 푸들이 원래 활동적이기는 한데 우리 집 강아지는 활동적이어도 너무 활동적입니다. 저는 감당이 안 됩니다. 개가 주인에게 적응을 해야 하는데 이제 우리 식구들이 개한테 적응을 해가는 것 같습니다. 물론 강아지가 주인인 저희들에게 주는 즐거움도 있기는 합니다. 핸드폰 충전기와 아이들 이어폰은 몇 개를 물어뜯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금요일 밤에만 집에서 자는데 잠 좀 들려고 하면 지나가는 사람 발자국 소리를 듣고 짖어대는 통에 제가 웬만하면 금요일에도 교회에서 자려고 합니다. 그래도 꼬박꼬박 사료 줘야 합니다. 좀 피곤해서 쉬려고 하면 놀아달라고 합니다. 제가 안 놀아주면 제 소매를 물고 잡아당깁니다. 제가 어느 날은 하도 놀아달라고 하길래 “야 주인 노릇하기 힘들다”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럴 수는 없겠으나 제가 만약 하나님 입장이라면 저는 “하나님 노릇하기 힘들다”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시대가 그래서 그런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런 종의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수고한 후에 “저는 무익한 종이라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더 찾아보기 힘듭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주의 일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요즘 교회 일을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자원함으로, 감사함으로 하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할 수 없이 억지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교회 일은 주님의 일입니다. 종의 자세로 일 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구역장님들도 “구역장 노릇하기 힘들다”는 말이 나올 것 같습니다. 구역에서 하는 일이야 구역예배 드리고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씩 청소하고 식사 봉사하는 일인데 그 일에 나 몰라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제도 식사 당번 구역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데 두 분이서 준비하더군요. 제가 점심식사를 하면서 그분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구역장님들도 낙심 될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이 세우신 리더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합니다. 리더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열심히 해야 합니다. 피치 못해서 참석을 못하게 되면 전화라도 해서 진심으로 미안함을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협조를 못하면서 당연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종의 자세로 하면 이 땅에서는 믿음이 더 자라서 믿음의 역사가 풍성해집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소련에서 크레믈린 궁전 앞에는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교회가 지어졌다고 합니다. 건축가가 이 교회를 짓고 나서 말했습니다. “경험이 쌓여서 더 좋은 교회를 지을 수 있다.” 소련 정부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교회를 지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그 사람의 눈을 빼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더 좋은 교회를 지을 수 있다.” 소련 정부에서 화가 나서 그 사람을 죽여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죽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 후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주의 일을 열심히 하면 하늘에서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힘든 것은 주님의 사랑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믿음이 견고해지고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면 주님의 일이 나의 기쁨이 됩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주님의 일이 부담스럽고 무거운 짐이 되었다면 나도 모르게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동물의 왕국에 이런 내용이 나왔습니다. 모든 달팽이가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달팽이가 자기 속에 알을 깝니다. 그 곳에서 달팽이 새끼가 태어납니다. 달팽이 새끼는 어미 살점을 파먹으면서 자랍니다. 어미 달팽이를 다 먹으며 나오면 성장한 달팽이가 됩니다. 어미 달팽이는 자식에게 자기 몸을 줍니다. 이게 부모의 심정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이 정도로 희생하면서 자식이 잘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외아들이 아닙니다. 독생자입니다. 외아들은 딸이 열 명이고 아들이 하나여도 외아들입니다. 독생자는 딸 아들 통틀어서 아들 하나일 때 독생자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알면 이 사랑이 깨달아지면 주님을 위한 수고는 희생이 아니라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일은 졸업이 없다.” 세상에서는 회장을 하고나면 뒤로 물러나서 일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구역장을 하다가 그만 뒀으면 구역장 할 때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회장을 하다고 회장을 그만 두었으면 회장 때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천국 갈 때가지 졸업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하세요. “하나님의 일은 졸업이 없다. 교회 일은 졸업이 없다” 미국의 전 대통령 카터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대통령을 지내고 나면 비서나 부리면서 연금이나 타면서 책이나 쓴다는 핑계로 모두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보편적인 관례입니다. 그러나 카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평할 때에는 ‘재임 때보다 퇴임 후가 더 낫다“고 말합니다. 그는 세계에 분쟁이 있는 곳이면 어떤 곳이든지 찾아가서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분이 왜 그렇게 살았는지 아십니까?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방학은 없습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충만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1. 믿음으로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가? 1) 구원의 역사 2) 행함의 역사 3) 응답의 역사 2.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되는가? 1) 하나님의 은혜 2) 말씀을 들음 3) 하나님을 경험 4) 종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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