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증인(3) (행1:12-15상)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15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을 예수님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이어서 복음을 전하면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아가야 할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거룩한 사명은 인간적인 힘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눅24:49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제자들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곧 성령님이 오시기까지는 예루살렘 성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이 행1:4-5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기에 앞서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덧입기 위해서입니다. 행1:8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권능을 받아야 했습니다. 바로 이 권능을 받기 위해서 제자들은 성령님이 오시기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에 순종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명에 순종했기에,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님이 임했습니다.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시자, 그들은 성령님이 주시는 권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에 순종했던 제자들의 모습이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the return, 12절).
둘째, 제자들은 성령님을 기다렸습니다(the wait, 13-14절).
셋째, 성령님을 기다린 제자들의 수는 일백이십 명이었습니다(the number, 15절상).
말씀을 차례대로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시는 한량없는 은혜를 우리 모두가 받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첫째로,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return, 12절).
12절입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제자들의 출발지는 “감람원이라 하는 산”이었고, 그들의 도착지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감람원이라 하는 산”(the mount called Olivet)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보통은 줄여서 감람산(the Mount of Olives)이라고 불립니다. 예컨대 마26:30입니다.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이와 똑같은 말씀이 막14:26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눅22:39입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또 요8:1입니다.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이곳에는 감람나무 곧 올리브나무가 많이 있어서 감람산이라고 불렸을 것입니다. 감람산 한 쪽 기슭에는 겟세마네(“olive press, 기름 짜는 틀”)라는 동산이 있어서, 예수님이 자주 그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남쪽으로 길게 뻗은 산입니다. 이 산의 남쪽 기슭에는 베다니라는 마을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다니 마을 입구에서 승천하셨습니다. 눅24:50-51입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승천하셨을까요? 예컨대 갈릴리에도 얼마든지 많은 산이 있었습니다. 변화산도 있고, 팔복산도 있습니다. 오병이어로 기적을 베푸셔서 오 천명을 먹이시고 그 남은 것을 열 두 광주리에 채울 정도로 남게 거두었던 산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갈릴리에 있는 그런 산에서 승천하시지 않고 하필이면 감람산에서 승천하셨을까요? 오늘 본문 12절 하반부에 있는 말씀이 우리에게 그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감람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과 어떤 관련이 있는 곳이었습니까?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곳이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님을 받도록 되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예루살렘은 복음의 전파가 시작이 되어야 할 곳이었습니다. 눅24:47입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또 행1:8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처럼 복음의 전파는 예루살렘에서 시작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가깝고도 한적한 곳인 감람산에서 승천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감람산은 예루살렘에서 얼마나 가까운 곳입니까? 행1:1에 기록된 대로 사도행전은 누가가 데오빌로 각하에게 써보낸 글입니다. 우리처럼 그도 팔레스타인 지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누가는 감람산이 예루살렘에서 어느 정도 떨어졌는가를 12절 끝 부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율법은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안식일에는 먼길을 걸어가지 않습니다. 그것도 일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들은 수3:4에 근거하여 안식일에는 이천 규빗 이내의 거리만 걸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수3:4 말씀을 읽어봅니다.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요단을 건너 가나안땅으로 들어갈 때였습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자기들보다 이천 규빗을 앞세우고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 뒤에 유대인들은 이것을 안식일에 적용을 시켜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이천 규빗까지만 걸어가는 것을 허용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는 표현은 이천 규빗이라는 거리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한 규빗은 팔꿈치에서 가운뎃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를 가리킵니다. 대략 45-6cm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이천 규빗이면 1 km 남짓 되는 거리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감람산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의 강조점은 예수님의 승천이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감람산에서 있었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에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에 따라서 성령님을 받기 전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울러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시고 그들에게 권능이 주어지면, 그들은 예수님의 명대로 예루살렘에서부터 복음을 전파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무슨 일이든지 예수님의 명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이 기다리라 하실 때는 인내하면서 기다리고, 예수님이 가라하실 때는 기쁨으로 달려가고, 예수님이 전하라 하실 때는 힘써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제자들이 성령님을 기다린 것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wait, 13-14절).
본문 13절과 14절은 우리에게 세 가지 사실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 제자들이 성령님을 기다린 장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the place, 13절상).
(2) 성령님을 기다린 제자들이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the people, 13절하-14절상).
(3) 제자들이 성령님을 기다리면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the action, 14절하).
(1) 먼저 제자들이 성령님을 기다리던 장소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3절 상반부에 있는 말씀입니다.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그들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유하는 다락에 올라갔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집에는 맨 윗층에 다락방이 있었습니다. 다락방은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컨대 행9:36-37입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이처럼 다락방은 죽은 사람의 시체를 한 동안 안치해두는 곳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그 당시 다락방은 맨 윗층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뜨일 염려가 없습니다. 그래서 조용하게 모임을 가지기에는 가장 적합한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다락”이라는 단어 앞에는 정관사가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평소에 잘 알고 있던 “그 다락방”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다락방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들었던 그 다락방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막14:13-15입니다.
“예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신대.”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그때 그 다락방에 모인 사람의 수가 120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 다락방은 큰 다락방이라야 했습니다. 아울러 이 다락방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들을 닫고 있던 그 장소라고 생각됩니다. 요20:19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전통적으로 이곳은 행12:12 말씀에 근거하여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아무튼 제자들은 그들이 유하는 그 다락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 그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들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그들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눅24:52-53 말씀입니다.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그들은 더 이상 다락방에 숨어 지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늘 성전에 가서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들은 주로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찬송하다가, 이따금씩 다락방으로 돌아와서 기도하는 모임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서 다락방은 하나의 은둔처가 아니라,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기 위해서 사용되었던 하나의 모임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발이 가는 곳마다, 우리의 발이 닫는 곳마다 이처럼 희망과 기대감이 넘치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몸이 거하는 곳마다, 하나님의 축복이 넘쳐흐르는 곳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 성령님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3절 하반부와 14절 상반부에 있는 말씀입니다. 먼저 13절 하반부 말씀을 읽어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난 뒤에 이미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열 한 명의 이름만 등장합니다. 맨 마지막에 나오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가룟 유다와는 다른 인물입니다. 마10:3과 막3:18은 야고보의 아들 유다를 가룟 유다와 혼동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그의 애칭인 다대오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명의 제자들은 모두가 그 다락방에 있었습니다. 또한 그곳에는 열한 명의 제자들과 함께 모였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14절 상반부입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그곳에는 분명 많은 여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선 그들 가운데는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을 섬겨오던 여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눅8:1-3입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낼 때까지 계속 따라다녔습니다. 눅23:49입니다.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따라서 오늘 본문에 기록된 다락방에는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해서, 살로메, 요안나, 수산나 등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그곳에는 죽었다가 나흘만에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들이었던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4절에서는 여자들 가운데서 특별하게 한 인물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그때 그 자리에 있었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받기 위해서였습니까?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일에 힘쓰기 위해서 그 자리에 모인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다고 해서 마리아를 인간의 위치 그 이상으로 결코 높이지를 않습니다.
예컨대 눅2:22-24 말씀입니다.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마리아는 구약성경 레위기 12장에 기록된 규례에 따라서 속죄제를 하나님에게 바쳤습니다. 이는 그도 우리와 똑같이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막3:31-35 말씀입니다.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이처럼 성경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모친이라고 해서 그에게 특별한 위치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리아에게 기도를 하면, 마리아가 우리의 기도를 받아 하나님이나 예수님에게 전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비성경적이요, 잘못된 사상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이름이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되고 그 이상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만일 마리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된다면, 기독교의 교리를 다루고 있는 서신서에 그의 이름이 분명 언급되어야 할 것입니다. 서신서는 말할 것도 없고 사도행전에서조차도 그의 이름은 더 이상 언급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이 오히려 우리에게 의도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게서도, 예수님의 아우들에게서도 경배를 받으셔야 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아우들이 네 명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이들도 두 명 이상이 있었습니다. 마13:55-56입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본시 예수님의 아우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요7:5입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그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의 아우들 가운데 맏이인 야고보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고전15:7입니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야고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 후에 야고보는 자기 동생들을 잘 설득해서 모두들 함께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뒤에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기록하게 되었고, 유다는 유다서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가족들도 모두 예수님의 제자요, 예수님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시며,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게 기도하려고 드는 것은 인간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는 것이요,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제1계명을 어기는 죄를 짓는 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도 없는 잘못된 사상에 미혹을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3) 제자들은 성령님을 기다리면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14절 하반부에 있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그들은 마음을 같이 해서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승천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과 땅에 있는 그들을 연결하는 것은 오직 기도를 통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요14:13-14에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이제 비로소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약속하신 성령님이 오시면, 권능을 받게 될 터인데, 그때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능력 있고 충성스럽게 쓰임을 받게 해달라고 그들은 기도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그 어떤 핍박과 환난이 있더라도 그러한 것들에 구애받지 않고, 계속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복음을 위해서 기꺼이 순교하는 자리에까지도 이를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성도들은 모이면 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 예컨대 행2:42입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이처럼 그들은 모이면 한 마음으로 합심해서 뜨겁게 기도하고, 흩어지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힘써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우리도 모이면 합심해서 뜨겁게 기도하고, 흩어지면 열심히 전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셋째로, 성령님을 기다린 제자들의 수는 일백이십 명이었다는 사실을 살펴봅니다(the number, 15절상).
오늘 본문 15절 상반부에 있는 말씀입니다.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고전15:6입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은 일시에 오백여 형제에게 그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갈릴리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감람산에서 예수님의 승천을 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예수님의 명에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상령님을 기다린 제자들의 수는 일백이십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많지 않은 수였습니다. 게다가 행1:11에서 천사들이 한 말과 같이 그들의 대다수가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대로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사회적 권세나 지위도 제대로 누리지를 못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무엇 하나 제대로 내어놓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주간 정도 기다렸을 때,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들은 성령님이 주시는 권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때부터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120명이라는 적은 수에서 복음전파는 시작되었지만,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행2:41입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4:4입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행6:7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전파는 드디어 예루살렘을 벗어났습니다. 행9:31입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그러더니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전파되기 시작한 때로부터 불과 30년도 채 되지 않아서, 그 당시의 땅 끝이라고 여겨지던 로마에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이는 결코 인간적인 힘으로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행1:8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시게 되니까, 그들에게는 위로부터 오는 권능이 주어졌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예컨대 고전12:3 하반부 말씀입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는 그 순간 우리는 성령 세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순종입니다. 헌신입니다. 예컨대 살전1:8에 있는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각처로 가서 복음을 전파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들을 칭찬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초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명에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힘써 복음을 전할 때, 성령님은 그들에게 권능을 주시며 또한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을 통해서 친히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0월 29일은 총동원 전도주일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목표는 한 사람이 다섯 명 이상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그 지체들인 우리 각자에게 내리신 명입니다. 순종합시다. 성령님이 우리를 통해서 놀랍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그날 우리를 통해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큰 영광을 돌리게 하실 것입니다. 10월 29일 총동원 전도주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무한하신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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