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3장 1 - 10절(개역개정)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성경을 관통하는 다양한 주제들이 있습니다. 제게 성경에서 다루는 가장 중요한 주제 세 가지를 말하라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성경을 보는 견해로는 하나님 나라라는 이 주제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내용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시기까지 40일 동안 말씀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야기였습니다. 행 28장에 보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기독교 교리의 뼈대를 제공했던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2년 동안 셋방살이를 하면서 무엇을 가르쳤는지를 말씀합니다. 바울은 정확하게 2가지를 가르쳤습니다. 첫째가 하나님의 나라였고 그 다음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보다 하나님 나라가 앞섰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직접 찾아봅시다. 행 28:23입니다.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행 28:30,31입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만큼 하나님의 나라가 중요합니다. 신자 안에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개념이 없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부실한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설계도 없이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설계도 없이 집을 지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엉망이 되는 것이지요. 신앙생활도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이 없이 하면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신약성경 복음서는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는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 17:3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영생은 없습니다. 그분 안에 참 생명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풀어야 진리인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을 만난 아담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을 만난 요셉의 이야기로 끝납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을 만난 모세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하나님을 만난 바로의 이야기, 하나님을 만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중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복이 된 사람들이 있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저주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갈멜산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엘리야가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장작더미 위에 제물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 도랑을 만들고 제물 위에 12통이나 되는 물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셔서 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시고 도랑의 물을 핥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로서 응답하셔서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과의 만남이 엘리야에게는 복이 되었지만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에게는 심판이 되었습니다. 긍정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의 증거는 변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 확실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변화입니다. 우리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첫 번째 보여주신 표적이 무엇입니까?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왜 주님이 첫 번째 표적을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일까요? 주님은 변화를 강조하고 싶으셨던 것 아닐까요? 기독교 신앙은 주님과의 계속된 만남이고 그 만남으로 인한 계속적인 변화입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첫 번째 만남을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고 그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칭함을 받습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죄인이 의인 되는 엄청난 변화가 주님과의 첫 번째 만남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계속적인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변화 되어갑니다. 그것을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나팔에 우리의 영,혼,몸이 완전한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영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거듭나서 성화되다가 영화되는 단계로들어가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체에 문제가 있어서 태어날 때부터 단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장애인이 베드로를 통해서 주님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그는 구걸하기 위해서 늘 성전 미문에 앉아있었습니다. 어느 날 제 구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를 향해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그의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습니다. 그는 뛰어 서서 걸으며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놀랍게 여기고 놀랐습니다. 오늘 설교는 이 사람의 놀라운 변화를 통해서 “주님을 체험한 사람에게 기대해야 할 변화”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 나온 사람들과 사건은 이 시대에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샘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전 10장에서 광야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관하여 말씀 하신 후에 이렇게 정리를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본문에 나오는 걸인의 변화 역시 말세를 사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을 통해서 변화에 대해서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1. 한계극복입니다(2절). 그는 출생할 때부터 장애자였습니다. 그는 4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한계는 일어설 수 없는 것이고 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는 발과 발목에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걷고 뛰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전능자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것을 부인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한계가 분명히 있지만 하나님이 역사 하시면 나는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 아이가 책상위로 올라가고 싶습니다. 그 아이는 책상 위에 올라갈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표정과 몸짓으로 아빠에게 책상위로 올려달라는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눈치 빠른 아빠가 아이의 표정과 몸짓을 보고 아이가 원하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자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아빠의 손이 움직일 것입니다. 아빠는 아이를 잡아서 번쩍 들어 책상위에 올려놓을 것입니다. 아이는 자신의 육체적인 한계로 인하여 책상에 올라갈 수 없었지만 아빠의 능력으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이런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수많은 한계상황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신들의 한계를 극복한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극복한 한계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심판을 극복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누구도 죄 문제를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영원한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형벌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고 심판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한계 극복입니다. 성경은 수많은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적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일어난 것을 기적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에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는 말은 성경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간이 극복할 수 없었던 한계를 극복한 일들이 잔뜩 기록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종 모세의 인도를 받고 애굽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곳이 홍해바다였습니다. 그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내보내준 애굽의 왕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낸 것을 후회하고 군사를 데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섰을 때 애굽의 군대는 최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는 한계 상황을 만났습니다. 그들에게는 홍해도 한계였고 애굽의 군대로 한계였습니다. 그때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홍해로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홍해를 향해서 지팡이를 내밀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강력한 바람이 불더니 홍해가 갈라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마른 땅이 드러났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홍해라는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른 땅처럼 홍해바다를 건너니 애굽 군대가 그들을 뒤좇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군대 쪽은 칠흑과 같은 어둠으로 역사를 하셨고 이스라엘 진영에는 빛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서 나오자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다시 원상복구 해버리셨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던 애굽 군대는 홍해 바다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군대라는 한계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복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무엇 때문에 성경에 믿음의 사람들이 극복할 수 없었던 많은 사건들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복한 기적들을 기록하게 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한계를 만났을 때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충분히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우리가 경험한 실패들이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믿습니다. 그때 우리가 실패한 것은 우리의 한계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거나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해서 한계에 부딪힌 것뿐입니다. 한계를 뛰어넘는 기적을 경험하려면 3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어떤 한계에 부딪혔을 때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를 분별해야 합니다. 아무런 일에나 도전한다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산에서 기도를 하고 내려오던 자매들이 계곡에 물이 불어나서 계곡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었던 것처럼 계곡의 물 위를 걸어서 건너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물에 빠져서 죽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계곡물을 걸어서 건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분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그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둘째는 견고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성도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실패와 과거의 패배로 인하여 실패의식, 패배의식이 가득합니다.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읽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므로 실패의식을 성공의식으로 패배의식을 승리의식으로 궁핍의식을 부요의식으로 바꿔야 합니다. 지그지글러의 책에 보면 벼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벼룩은 제자리에서 1~2m씩 점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프력을 가진 벼룩을 투명한 컵 속에 넣고 실험을 했습니다. 컵 윗부분을 눈에 보이지 않는 유리로 덮었습니다. 벼룩은 그 컵에서 벗어나려고 점프를 합니다. 그런데 투명 유리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놀란 벼룩이 다시 점프를 하지만 역시 유리에 몸을 부딪치게 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면 벼룩에게는 실패의식이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벼룩은 자기 몸이 부딪쳤던 투명유리 아래 부분까지만 뛰게 됩니다. 그 이상 뛰면 큰 일 난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 이후 실험자는 투명한 유리를 제거합니다. 이제 유리가 없으니 벼룩은 평소처럼 1~2m 높이로 점프를 해도 됩니다. 그렇게 점프를 하면 벼룩은 충분히 그 컵에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벼룩은 자신이 정해놓은 한계 이상 점프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실패가 그 벼룩을 그 한계 안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이 벼룩 이야기와 동일한 일이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에게도 흔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의 실패의식을 ‘하나님이 하시면 성공할 수 있다’로 바꿔야 합니다. 우리의 패배의식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승리할 수 있다’로 바꿔야 합니다. 우리의 가난의식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우리는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다’로 바꿔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령의 감동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은 순종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중국에는 짝퉁이 많다고 합니다. 정말 놀라운 기술력입니다. 계란도 가짜가 있다고 합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계란을 가짜로 만들 생각을 했을까요? 짝퉁도 A급, B급, C급이 있다고 합니다. C급 짝퉁시계는 모양이 조잡하고 살 때는 잘 가는데 차타고 숙소로 돌아가다 보면 고장이 나서 못쓰게 된답니다. B급 짝퉁시계는 모양은 진품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잘 가는데 한국 오면 멈춘답니다. A급 짝퉁시계는 진품과 모양이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비슷하고 성능 또한 진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중국을 짝퉁천국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짝퉁천국이라는 말은 그만큼 짝퉁이 많다는 말이지요. 저는 기독교 안에도 짝퉁이 많다고 봅니다.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주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짝퉁신앙입니다. 진짜 믿음은 순종까지 가야 합니다. 그래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미국에서 신유의 바람을 일으키는 ‘래리 리’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39살에 귀에 이상이 있어서 소리가 들리지 않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 2시가 되었을 때 소리를 듣지 못하는 목사님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리야, 나가서 전해라. 고쳐 줄께.”하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때 리 목사님은 “하나님, 저는 지금 듣지 못합니다. 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전합니까? 고쳐주시면 나가서 전하겠습니다.”라고 대꾸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계속되었습니다. “먼저 가서 전하라. 고쳐 줄께.”, “먼저 고쳐주시면 나가서 전하겠습니다.” 밤새도록 이 문제로 병원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의사들의 출근이 시작되었습니다. 의사가 리 목사님이 있는 병실에 들어오는 순간 리 목사님의 귀에는 이사야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리 목사님은 확신을 가지고 의사에게 말합니다. “저를 퇴원시켜 주십시오.”, “만약에 당신이 수술을 받지 않고 그대로 병원으로부터 퇴원하면 당신은 귀가 먹을 것입니다.”하고 의사가 종이에 써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래도 리 목사님은 “나는 당신의 말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하고는 병원을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공원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마침 산책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리 목사님은 큰 소리를 지르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순간 귀가 뻥! 뚫렸습니다. 리 목사님이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의 능력을 보지 마십시오. 그 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지를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가능하다고 믿고 입으로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가진 인간적인 한계들을 극복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2. 목적 전환입니다(2,8절). 2절을 읽읍시다. 그가 성전을 찾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구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8절을 읽읍시다. 그가 주님의 능력을 경험한 후에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성전 안으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 사람이 성전에 왔던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구걸하여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성전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나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분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입니까? 물론 처음에는 대부분 그런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교회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끝가지 그런 동기와 목적으로 교회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처음에는 나를 위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나면 목적이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에게 다가가는 징검다리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문제 때문에 주님을 찾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하여 주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나를 위해 주님이 필요했던 사람이 주님을 위해서 내가 필요함을 알게 됩니다. 나를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려 했던 사람이 주님을 위하여 자신이 이용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 43:21 말씀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만 경배하고 하나님만 예배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고전 10:31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심지어 먹고 마시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생각하며 해야 합니다. 고전 10:31은 ‘그런즉’ 이라는 접속어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접속어로 시작 되었다는 말은 그 앞에 나오는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고전 10:31 앞에는 어떤 내용이 나옵니까?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다 유익하지 않고 할 수 있다고 다 덕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도 유익이 되는가, 덕이 되는가를 살피며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때 그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가를 살피며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사람들에게 칭송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살피라는 말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신다고 다 사람에게 칭송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일도 있습니다. 저는 선교를 하되 지나치게 위험한 곳은 가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존중해주시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렇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아주 위험한 지역에 가라하시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우리는 가야 합니다. 위험한 선교지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선교사님들을 비난합니다. 저는 세상이야 상식선에서 생각하니 그렇다고 하지만 교회가 그분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위험해도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의 자세 아닙니까. 요나는 선교사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 당시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앗수르 나라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니느웨에서 말씀을 전하는 일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자기 민족 전체와 등을 돌리는 일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가 니느웨에 선교하러 간다고 했으면 모든 사람들이 반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요나처럼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위험해도, 손해가 되어도, 반대에 부딪혀도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그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공부도 직장생활도 목회도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시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헨리 아이언 사이드 박사가 존경스럽습니다. 달라스 신학교는 미국 텍스에 있습니다. 지금 텍사스는 석유가 많이 나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오래 전에는 카우보이로 유명한 곳입니다. 헨리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달라스 신학교가 파산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 저는 저 들판의 소들이 하나님의 것임을 믿습니다. 저 들판에 있는 하나님의 소들을 팔아서 학교에 필요한 돈을 보내주세요”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카우보이 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트럭 2대 분량의 소를 팔게 하시고 그 돈을 학교에 기부하게 하셔서 학교가 파산 위기를 넘겼습니다. 참 은혜로운 간증입니다. 헨리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그분이 어렸을 때에 너무 가난해서 구두방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했답니다. 그 구둣방 주인은 아주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 주인은 구두 하나를 만들 때마다 아주 정성껏 만들었습니다. 어린 아이언사이드가 볼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대충해도 될 텐데 왜 저렇게 정성을 다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주인아저씨, 대충대충 만들지 왜 그렇게 정성을 들여 만드세요?” 구둣방 주인이 대답했습니다. “얘야,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구두를 만드는 것이 아니란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구두를 만든단다.” 신실한 믿음으로 사는 구둣방 주인은 구두 하나를 만들 때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기 위해서 만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만든 구두는 확실히 달라”라고 사람들이 인정해 준다면 바로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언사이드는 그 구둣방 주인의 신앙과 신실함에 감동을 받고서 자신도 그 주인을 본받아서 모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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