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창세기 24장 10 - 20절(개역개정)
10 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11 그 낙타를 성 밖 우물 곁에 꿇렸으니 저녁 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때였더라 12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13 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서 있다가 14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15 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 16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그가 우물로 내려가서 물을 그 물동이에 채워가지고 올라오는지라 17 종이 마주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네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18 그가 이르되 내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동이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19 마시게 하기를 다하고 이르되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서도 물을 길어 그것들도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20 급히 물동이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낙타를 위하여 긷는지라
오늘은 리브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딸입니다. 그의 오빠는 라반입니다. 리브가는 이삭과 결혼을 하여 아브라함의 가문 언약의 패밀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럼 리브가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나누겠습니다.
1. 하나님의 섭리 리브가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가문에 들어오게 된 것은 아브라함이 원해서도 아니고 리브가가 원해서도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창 24장은 아브라함의 충성된 종 엘리에셀을 통해서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가문에 들어오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이건 하나님의 섭리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죽었고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아 늙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소원이 하나 있다면 좋은 며느리를 보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자신의 충성된 종 엘리에셀을 부릅니다. 그리고 그에게 자기 고향에 가서 자기의 족속 중에서 며느리를 데리고 오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에게 낙타 10필을 주어 떠나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며느리 감을 고르는데 자기가 가지도 않고 또 아들 이삭도 보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많은 목사님들이 엘리에셀의 충성됨에 대해서 말씀을 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며느리를 고르는 일까지 맡길 정도로 충성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면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를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가지 않고 충성된 종 엘리에셀을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명대로 메소보다미아의 나홀의 성까지 갔습니다. 엘리에셀은 그곳 우물가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엘리에셀의 기도의 내용은 순조로운 만남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자기가 우물가에 있다가 한 소녀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할 것인데 만약 자기에게 물을 주고 또 낙타에게도 물을 준다면 그 여자가 이삭의 신부감인 줄 알겠다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에셀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리브가가 나타납니다. 리브가가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올라옵니다. 엘리에셀이 리브가에게 “네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고 말하자 리브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주여 마시소서 내가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서도 물을 길어 그것들도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그리고는 급히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낙타를 위하여 물을 길렀습니다. 기도응답이 확실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리브가의 이런 행동은 그 당시 그 지역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이었다면 엘리에셀이 이런 표적을 구할 리가 있겠습니까. 사실 인간적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에셀이 낙타를 10필을 끌고 갔다고 했습니다. 낙타 1마리가 마시는 물의 양이 약 100L입니다. 10필이면 1,000L의 물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요즘은 보기 어렵지만 군고구마 장수들이 큰 드럼통으로 고구마를 굽는 통을 만들어서 사용합니다. 그 통 하나에 200L의 물이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1,000L의 물이면 큰 드럼통 5개의 양입니다. 그런데 나홀의 성에 있는 우물은 우리나라 우물처럼 낮은 깊이가 아닙니다. 허리만 굽히면 물을 길을 수 있는 우물이 아닙니다. 깊이가 30m나 되는 깊은 우물입니다. 이 우물은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리는 그런 우물이 아닙니다.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우물입니다. 이집트 카이로에 가면 요셉의 우물이 있습니다. 그 우물은 깊이가 48m이고 계단은 폭이 1.8m입니다. 밧단아람에 있는 우물도 그런 우물입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낙타 10필에게 물을 마시게 하기 위해서 30m 깊이의 우물을 오르내렸습니다. 리브가가 물을 길어낸 물통이 어느 정도 크기인지 알 수 없지만 약 30L라고 가정을 해봅시다. 30L면 우리가 사용하는 1.5L 생수병으로 20개 정도이니 여인이 이기에는 좀 부담스러운 크기이지만 그 정도 크기라고 가정을 합시다. 그러면 리브가는 그 물통을 이고 30m 깊이의 우물을 몇 번이나 오르내렸을까요? 최소한 33번입니다. 30m 깊이의 우물을 33번이나 오르내렸으니 보통일이 아니지요. 이제 이해가 좀 되십니까? 아무리 친절한 사람이라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서 리브가처럼 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를 보여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섭리로 믿음의 가문에 가입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로 인도함을 받아서 된 것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깨끗하거나 열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정할만한 무엇인가가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롬 8:30을 보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 가기까지의 과정을 4단계로 설명합니다. ①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를 미리 정하셨습니다. ②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③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④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 말씀에 보면 우리 편에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십니다. 미리 정하심도 부르심도 의롭다 하심도 영화롭게 하심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리브가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믿음의 가문에 들어간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의해서 믿음의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2. 십자가정신 요 12:24에 보면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을 희생하시므로 많은 영혼들이 살게 될 것을 한 알의 밀알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밀알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이지만 죽고 썩게 되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성경에서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를 희생하시므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신 것처럼 믿음의 사람들 역시 자기희생을 통해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내용이 많습니다. 본문에서 리브가 역시 십자가정신을 발휘한 것입니다. 리브가의 희생을 통해서 엘리에셀과 10필의 낙타에게 생명의 물이 공급되었습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남을 살리고 자기를 희생해서 남을 이롭게 하는 십자가정신이 기독교인들의 정신을 지배해야 합니다. 십자가정신으로 사는 것은 바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계산적인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산상수훈에 보면 일반적인 정신으로는 받아드릴 수 없는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십자가정신이 아니면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는 말씀들입니다. 세상적으로 바보가 되어야 실천할 수 있는 말씀들입니다. 마 5:38-42을 봅시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여러분! 오른편 뺨을 치는데 왼편도 돌려대는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고, 오리를 가지고 하는 사람이게 십리를 가주는 이런 정신 나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바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들에게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정신입니다. 해오름 교회 최낙중 목사님은 이 정신으로 큰 복을 받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입니다. 1975년 9월입니다. 교인 중에 우울증에 걸린 성도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성도를 치료해주려고 금식기도원에 다녀오다가 버스 안에서 오스트리아 빈에서 휴가차 귀국한 간호사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1주일간의 금식을 마치고 대방동에서 양장점을 운영하는 사촌언니를 전도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녀는 목사님에게 길 안내를 부탁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5리를 가자면 10리를 동행해 주라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그녀를 대방동까지 안내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대방동에 가보니 가게는 이사한 지 오래였습니다. 그녀는 미안해하며 목사님의 목회현장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당시 최목사님의 교회는 봉천동 무허가 판자촌의 10평 남짓한 술집 사이에 있었습니다. 성도 7명은 밤마다 모여 예배처소를 위해 기도 중이었습니다. 그날 기도회에 그녀도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결혼 비용으로 저축한 돈 150만원을 선뜻 내놓았습니다. 집 한 채 값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산상수훈 말씀을 실천했다가 생각지 않게 기도 응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십자가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를 희생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나를 희생하여 타인을 이롭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바보처럼 살아야 합니다.
3. 결단력 엘리에셀은 기도의 응답으로 리브가를 만납니다. 그리고 리브가를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후에 리브가의 집에 가서 리브가의 가족들에게 자기가 그곳에 방문한 이유와 하나님의 인도로 리브가를 만난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리고 리브가를 아브라함의 며느리로 달라고 합니다. 엘리에셀의 말을 들은 가족들은 그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을 알고 승낙합니다. 그런데 엘리에셀은 가족들에게 다음 날 바로 리브가를 데리고 떠나겠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가족들은 리브가가 약 10일 정도 머물다가 가게 하자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엘리에셀은 기다리는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바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리브가에게 묻기로 합니다. 가족들이 리브가를 불러서 내일 떠날 것인지를 묻자 리브가는 주저함 없이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음 날 리브가는 엘리에셀과 함께 먼 길을 떠납니다. 저는 리브가가 고향을 떠나는 이 모습을 보며서 아브라함이 생각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바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고향은 떠났지만 아버지를 모시고 떠났고 친척 롯도 데리고 떠났습니다. 그에 비하면 리브가는 아브라함보다 더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리브가는 한꺼번에 고향도 떠났고 아비집도 떠났습니다. 거기다가 리브가는 여자입니다. 여자로서 친정집을 떠난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리브가의 고향에서 아브라함이 있는 브엘세바까지의 거리는 800km가 넘는 거리입니다. 제 아들 모세가 지금 국토 대장정중입니다. 지난 화요일에 출발했으니 오늘이 6일째입니다. 하루에 20km씩 걸어서 제주도까지 가는데 3주 정도 잡고 떠났습니다. 오늘은 수안보 온천 근처에서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리브가의 고향에서 브엘세바까지는 제 아들 모세가 걷는 식으로 걷는다면 최소한 40일 거리입니다. 생면부지의 늙은 종을 따라서 그것도 여인의 몸으로 일가친척과 친구들이 있는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땅으로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신부 될 여인이 신랑 될 사람의 얼굴이나 구체적인 정보도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리브가가 길을 떠나는 것은 보통 결단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단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출발했던 것입니다. 대단한 결단입니다. 보통 사람으로 하기 힘든 결단입니다. 하나님께서 리브가를 부르신 이유 중에 하나가 이런 결단력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결단력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만나고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은 이런 결단력 있는 사람들을 쓰시는 것입니다. 결단력이 없는 사람들은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어느 부장 청년이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주님에게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지 물었습니다. 그 청년의 질문이 잘 못 되었습니다. 영생은 무엇을 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청년의 잘못된 질문을 바로 잡아주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어느 계명을 지켜야 합니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청년은 이때 “내가 할 수 없습니다. 나를 도와주세요”라고 말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이 세상에 누가 율법을 다 지킬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자기가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그의 의를 깨야 하셨기에 그에게 가장 약한 부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청년은 돈에 약한 청년이라 주님은 돈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이 때 청년은 주님의 요구대로 모든 것을 팔고 주님을 따랐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마 9:22에 보니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청년은 결단력 있게 재물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에게는 그만한 결단력이 없었습니다. 결단력이 없는 사람은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마틴 루터의 설교 중에 재미있는 예화가 있습니다. 사탄이 어느 날 자기 부하들을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서 세상에 파송하며 말했답니다. “너희가 어떻게 해야 많은 사람을 유혹해서 지옥으로 끌고 오겠느냐?” 한 귀신이 대답했습니다. “난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이 없다고 얘기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그건 오래 전부터 해먹은 건데 그거 가지고는 안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귀신이 “믿는 자들에게 고난을 주겠습니다. 고통을 많이 주면 신앙을 버릴 것입니다.”고 말했습니다. 사탄이 말했습니다. “고통을 주면은 그 사람들 순교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당한다고 더 기뻐한다.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 졸개 귀신들이 물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사탄이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해봐라. 가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라. ‘서둘 것 없어 천천히 해’ 예수 믿는 것도 천천히, 선한 일도 천천히, 기도도 천천히, 이렇게 모든 일을 내일로 미루도록 하면 많은 사람들을 유혹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해야 할 일들이 떠오를 때 마귀가 그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가장 흔한 방법이 바로 내일로 미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단력 있게 행하기를 원하시는데 마귀는 천천히를 외치며 미루고 또 미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많은 학생들과 청년들이 기도를 결단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간에는 학생들과 청년들이 새벽기도를 나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새벽기도를 결심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마귀의 ‘천천히’라는 이 계략에 속아서 시기를 놓치고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결단력이 있어야 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감동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당장 시작하십시오. 결단력 있는 생활을 해야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4. 신앙적 우선순위 리브가의 가족들은 무엇 때문에 리브가를 아브라함에게 보냈을까요? 리브가를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50,51절을 보겠습니다.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51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분명히 리브가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뜻에 우선순위를 두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리브가는 무엇 때문에 엘리에셀을 따라나섰을까요? 역시 그 일이 하나님에게로부터 났다고 믿고 거기에 우선순위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리브가에게는 가족과 함께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리브가는 신앙적인 우선순위가 분명했던 것입니다. 리브가의 신앙적인 우선순위가 분명하게 나타난 또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려고 할 때 야곱을 변장시켜서 이삭의 축복을 받게 한 사건이 있습니다. 잘 아시죠? 이 사건은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그 당시 이삭과 리브가가 무엇을 붙들고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삭은 자기 감정에 우선순위를 두었고 리브가는 하나님의 약속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결혼 후 20년 만에 기도응답으로 쌍둥이를 임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태중에 아이들이 심하게 다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하나님께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 장자는 에서이지만 영적인 장자권이 야곱에게 있다는 응답입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정확하게 몇 십 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으나 상당한 기간이 지났습니다. 이삭은 나이가 들어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이삭은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삭이 에서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별미를 만들어 와서 축복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리브가가 듣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을 준비시킵니다. 에서가 털이 많은 사람이니 야곱에게 염소가죽을 붙여서 털이 많은 것처럼 만듭니다. 그리고 에서의 옷을 입힙니다. 그리고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 축복을 받게 합니다. 이 사건을 풀 때 주로 이삭과 리브가의 자식 편애에 대해서 다룹니다. 맞습니다. 분명히 그런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때 이삭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에서를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삭에게 영적 장자권이 야곱에게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세월이 많이 흘렀다고 이삭은 그 말씀을 잊은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바뀌었다고 믿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야곱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에서를 축복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일까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몇 십 년이 지났다고 이렇게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삭이 이런 선택을 한 것입니까? 그의 욕심이 낳은 결과 아니겠습니까? 리브가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남편을 주인으로 섬겨왔습니다. 리브가의 성품상 야곱이 좋아서 야곱에게 아버지의 축복을 받게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리브가는 몇 십 년이 지났지만 에서와 야곱이 자기 뱃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하신 응답을 기억하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우선순위가 물질이 돼서도 안 되고, 혈육이 돼서도 안 됩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순위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 시대의 불행은 우선순위를 놓치는데 있습니다. 어느 큰 저택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 집 여주인은 겁에 질려 홀로 뛰쳐나왔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갑자기 다시 불 속으로 용감하게 뛰어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귀중품이 들어있는 보석 상자를 안고 나오면서 “아, 이제 살았다. 내 귀고리, 내목걸이, 내 팔찌, 모든 보석을 다 찾았다. 참으로 다행이다”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사람들이 “저기 보세요. 아이들이 불이 난 집의 창가에 있어요.”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그녀는 그제 서야 정신을 차리고 “내 아이들! 내 아이들!”하고 소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아이들이 아직도 불 속에 있음을 알고는 발을 동동 구르며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었지만, 이미 불은 아이들의 생명을 삼켜버렸습니다. 그 여인은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런 실수를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저는 이삭을 보면서 이 부분이 안타깝습니다. 그는 젊을 때부터 평생을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삭은 모리아산에서 자신을 제물로 들렸습니다. 기근 중에도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100배의 복을 받았습니다. 20년 동안 생기지 않았던 자식도 기도 응답으로 받았습니다. 믿음의 역사를 이루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노년에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의 인간적인 선택이 형제를 원수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야곱을 20년 동안 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순하고 순정적이던 리브가가 남편을 속이는 여자가 되게 해버렸습니다. 인간적인 선택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삭과 리브가를 보면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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