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디모데전서 3:14-15(개역개정)
14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따라합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비전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바른 교리를 가진 교회가 5만개가 넘습니다. 그 교회들이 올바른 고백을 가지고 있다면 모두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우리교회는 몇 년 전에 가까운 곳에 있던 한 교회의 월세를 몇 년 내주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 교회 목사님을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전화를 걸지도 않았습니다. 사모님이 풍으로 쓰러지셨고 아들이 교회의 어려운 형편 때문에 믿음을 버리고 방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월세를 부담하기로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때 우리교회의 빚이 몇 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교회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짐을 짊어진 것입니다. 부천에 가면 처음교회를 담임하는 윤대영목사님이 계십니다. 8년 전 어느 날, 진솔교회를 담임하고는 유명근 목사님이 찾아왔습니다. 두 교회는 교단이 다르고 초면이었습니다. 유명근 목사는 윤대영목사에게 예배당을 짓느라고 생긴 부채 때문에 목회가 불가능하다며 자신의 교회를 사달라고 했습니다. 달포 후 다시 그가 찾아왔습니다. 이젠 영성까지 탈진돼 목회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윤대영목사는 유명근 목사를 6년간 뉴욕으로 유학 보내주고 생활비 일체를 지원해주었습니다. 이후 모든 짐을 떠맡은 처음교회는 진솔교회를 자립시켰습니다. 성도 수를 30여명에서 2,000여 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리고 유학 간 젊은 목사에게 항공료와 함께 “이젠 당신 교회가 자립을 했으니 돌아와 목회를 하라”는 전갈을 보냈습니다. 처음교회가 진솔교회 건물을 수리하고, 목회가 가능하도록 설치한 첨단장비 값만 40억 원입니다. 대신 갚아준 빚과 이자는 30억 원에 달했습니다. 성장에 투자한 예산은 계수할 수 없는 천문학적 숫자입니다. 처음교회는 이 모든 것을 하얗게 지우고 교회를 되돌려 주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은 ‘미쳤다. 정상이 아니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처음교회 윤대영 목사는 이 일을 실행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오늘은 교회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입니다. 이 말은 ‘불러낸 사람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불러낸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건물은 예배당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참된 신앙의 고백을 가진 사람들의 모입니다. 성경에서는 교회에 대한 진리를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만 오늘 설교는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진리 3가지만 나누겠습니다.
1.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골 1:18에서는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사셨기 때문에 교회는 주님의 뜻대로 움직여져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십니다. 몸은 머리가 명령하는 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처럼 교회는 머리이신 주님의 뜻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몸은 머리가 명령하는 대로 착착 움직여집니다. 머리가 손에게 앞으로 내밀라는 명령을 했는데 전혀 말을 듣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든지 움직이기는 하는데 자기 뺨을 때린다든지 머리를 긁고 있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머리이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부담스럽다고 복지부동의 자세를 가져서도 안 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공산주의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무슨 일을 제직회나 당회로 결정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제직회나 당회는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이 있을 때 서로 협조하자고 모이는 회의가 되어야 합니다. 거기서 뭘 결정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말하면서 광야 교회라고 표현했습니다. 모세가 이끌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는 20세 이상 장정 60만 명이 넘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 까지 합하면 200만 명도 넘는 엄청난 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교인들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을 받아 그대로 전했고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서 전달된 하나님의 메시지에 순종할 뿐이었습니다.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따르는 곳입니다. 세상에서는 자기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을 똑똑하다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세상에서처럼 자기 의견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전혀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지혜로워도 하나님의 생각보다 지혜로울 수 있겠습니까.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피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리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자기 의견을 말하는 곳이 아닙니다.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내 의견은 이것입니다.”라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제 마음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것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목사님, 말도 못 합니까? 목사님이 독재자입니까?”라고 말하지 말고 목사가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는지 살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이 맞는다면 “하나님의 뜻이 그렇다면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담임목사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목회를 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교회의 일을 할 때는 당연히 하나님 중심이어야 하지만 담임목사 중심이 되어 움직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담임목사는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자동차 부속이 2만 개, 3만 개가 되지만 모든 부속이 운전자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줘야 하는 것처럼 모두가 담임목사 중심으로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오래 전 성탄절에 넥타이 세 개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선물을 주신 분들은 그 다음 주일에 목사님 넥타이만 보지 않겠습니까? 목사님이 고민하다가 새 가족에게 받은 넥타이를 매고 갔습니다. 새 가족을 먼저 생각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날 그 새 가족의 얼굴이 환했습니다. 그러나 헌 가족들의 얼굴은 쓸쓸해 보였습니다. 목사가 어떻게 모든 교인들에게 다 맞출 수 있습니까? 교인들이 목사에게 맞추어야 교회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무슨 일이 있으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탕자가 돌아왔습니다. 둘째아들이 그 귀한 재산을 창기에게 팔아먹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너는 죽었다가 산 아들이요, 잃었다가 얻은 아들이다.”하며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소를 잡아라. 잔치를 벌여라. 새 옷을 갖고 오너라. 새 신발을 신겨라. 가락지를 끼워라. 내 아들을 찾았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에는 자식이 살아 왔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살아서 돌아온 것만 해도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들에서 돌아온 큰아들은 섭섭해서 “아버지가 나를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 주지 않더니 재산을 창기와 함께 다 팔아먹은 동생 놈이 오니 잔치까지 벌여 주네.” 하며 집으로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 집이 하나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큰아들이 아버지 입장으로 돌아가야 됩니까? 아버지가 큰아들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작은아들을 쫓아내야 되겠습니까? 큰아들이 아버지 입장으로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집이 하나가 됩니다. 교회와 관련된 말을 할 때는 항상 성령으로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을 잘못하면 교회가 시험들 수 있습니다. 예컨대 장로님 선거를 하는데 당회에서 몇 분을 추천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주 훌륭한 집사님이 추천되지 않은 것을 보고 그 집사님께 전화를 했다고 합시다. “아이고, 집사님, 우리 당회에서 실수했네요. 그치요. 오늘 추천된 분들은 별 인물 아니고 집사님이 우리 교회의 기둥이신데, 집사님 같은 귀한 분을 장로로 추천하지 않고, 당회에서 실수했네요. 그치요?” 그것은 그분을 위로하는 말이 아니라 그분에게 섭섭 마귀가 들게 하는 말입니다. 그분이 ‘아, 내가 혹 장로로 추천되나 했는데 추천되지 않은 것을 보니, 나는 아직 부족한 모양이구나.’하고 있는데, “집사님, 이럴 수 있어요? 이건 불공평해요.”하는 말을 들으면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맞아….’하게 됩니다. 그런데 또 “집사님, 서운하시겠어요.”하는 전화가 옵니다. 그런 전화를 한 다섯 번만 받으면 시험 들게 됩니다. ‘맞아, 당회에서 잘못한 거야.’ 말조심하십시오. 정말 말조심하십시오. 어떤 사람이 “성공 비결을 얻을 사람은 다 오시오.”라고 외쳐서 많은 사람을 시장에 모아 놓고 돈부터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공하려면 말조심해! 말조심해!”하고는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말할 때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2.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본문에 보니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교회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하는 일은 귀하고 복된 것입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하찮은 일을 해도 그 일은 하나님의 일이며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어느 분이 청와대에서 청소 일을 합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직장이 어디에요?”라고 물었습니다. 그가 “청와대에서 일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대단하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친구 목사 교회에 갔습니다. 목양실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데 제 친구 목사의 친구였습니다. 친구 목사가 저에게 그 친구를 소개하면서 “국정원 다니는 친구야”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제가 국가 정보기관인 국정원 다닌다는 말을 듣고 그를 보니 눈빛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눈빛이 살아 있었습니다. 제가 괜히 긴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국정원에 보일러 관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국정원에서 보일러가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다니는 회사에 사람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귀찮게 생각을 하고 가지 않겠다고 해서 그 친구가 자원을 해서 국정원 보일러를 봐주었습니다. 그러다가 국정원에서 보일러를 관리할 정식 직원을 뽑게 되어서 그 친구가 정식 직원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국정원에서 정식 직원으로 뽑아놓고 보니 보일러 자격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정원에서 학원비를 대주면서 자격증을 따게 해주었습니다. 제 친구는 가끔 사람들에게 농담으로 “나는 국정원 다니는 친구가 있어”라고 자랑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청와대나 국정원에서 일하는 사람을 대단하게 바라봅니다. 그가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대단하게 봅니다. 그런데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는 일은 무슨 일이 되었든지 그 일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청와대나 국정원에서 하는 일보다 귀한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서 대단한 프라이드를 느껴도 괜찮습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분들이나 초신자들 가운데는 교회가 목사 개인의 재산인 줄로 잘못 아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재산은 어느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비전교회의 땅은 일부는 교회 이름으로 되어 있고 일부는 제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땅의 특수성 때문에 250평을 교회 명의로 옮기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담당 공무원이 제게 “목사님, 이런 조건에서 교회 명의로 변경된 예는 전국에서 처음일 것입니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자세하게 말씀을 드릴 수 없지만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나머지 317평의 땅은 형편상 제 이름으로 구입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단 한 번도 제 명의로 되어 있는 땅을 제 땅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개인적으로 재산권을 행사 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비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예배에 필요한 강대상이나 의자, 악기나 엠프 시설만이 아니라 교회 자동차와 주방에서 쓰는 그릇, 헌금위원들이 입은 가운, 천장의 전구 하나도 심지어 사무실에서 쓰는 종이 한 장까지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개인이 사놓았더라도 개인이 가져왔더라도 하나님께 드린 것이라면 그것은 개인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값싼 비품 하나까지도 귀하게 아껴 써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도 교회에서는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건축 헌금을 많이 했어도, 교회 봉사 많이 하는 사람도,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그 어느 누구라도 교회의 주인 노릇하면 안 됩니다. 교회의 주인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비전교회라는 배의 주인이 아닙니다. 선주는 하나님이십니다. 비전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 주고 산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저는 선주이신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선장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세속적인 용어를 써보겠습니다. 흔히 ‘월급사장, 바지사장’이라는 말을 하는데 목사를 좀 세속적으로 말하면 월급사장, 바지사장이라고 보면 됩니다. 비전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월급사장인 저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대로 움직이면 됩니다. 여러분도 그분의 뜻대로 움직이면 됩니다. 본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집인데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의 기둥은 진리이고 교회의 터 역시 진리입니다. 기둥 없이 건물이 설 수 없고 터가 없이 건물이 설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를 떠나서는 교회 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입니까? 요 14:6절에 보면 주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는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요 17:17에서는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어린이가 숙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길이 10cm 짜리 색종이를 20개 만들어 가는 숙제였습니다. 그 어린이는 먼저 자로 정확하게 재어 10cm 길이의 색종이를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는 첫 번째 색종이를 올려놓고 그대로 잘라서 만들었습니다. 세 번째 색종이는 두 번째 색종이를 갖다 대어 오리고, 이렇게 해서 자로 재는 수고를 줄이면서 숙제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20개 색종이 길이를 맞추어보니 다 다른 게 아닙니까? 결국은 다시 일일이 자로 10센티를 재어 숙제를 마쳤답니다. 여러분! 이 어린이의 문제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기준을 바꾼 것이 문제였습니다. 기준은 언제나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각각 앞에서 자른 것을 기준으로 잡았으니 길이가 다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준은 세상의 도덕이나 윤리가 아닙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옳게 보여도 성경이 아니라고 하면 아니고 예수님의 절대성을 부인 하는 것이라면 잘못된 것입니다. 2년 전에 한국교회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사건이 WCC 총회였습니다. WCC는 겉으로는 교회일치를 외치지만 실은 종교다원주의를 지지하는 단체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 잘못된 교리를 신봉합니다. 또한 WCC는 기독교 외에도 천주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유대교, 시크교의 지도자들을 총회에 초청할 뿐 아니라, 심령술사, 점술사, 무당들도 초청해서 굿판을 벌리고 귀신들에게 제사 의식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WCC 산하에 있는 단체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인데, 그 홈페이지에 ‘생명의 강 살리기 종교여성 공동기도문’을 올려놓은 적이 있는데, 다음은 그 기도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아멘 하면 안 됩니다. “오, 하느님, 부처님!... 종교는 달라도 진리의 뿌리는 하나, 만물이 한 배(胚)에서 나와 한 사랑을 먹고 사는 식구(食口)요 생구(生口)인 것을 믿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 부처님, 성모 마리아님과 소태산 대종사님의 마음을 연하여 오늘 4대 종단의 종교여성이 일심으로 간구하오니, 부디 이 땅에서 죽음의 굿판 대신에 신명나는 살림의 굿판이 벌어지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받들어 비옵나니,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나무아미타불, 아멘” 주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감히 이 같은 짓을 하다니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교회라는 간판을 걸었어도 성경적인 교회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진리를 떠나면 아주 위험해 집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위기는 진리를 붙들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이 필재 목사님은 지난 2011년에 그 당시 교황인 베네딕트 16세가 세계 종교 지도자 대회에 참석해서 무릎을 꿇고 사과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교황이 사과한 내용은 기독교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폭력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기독교는 개신교가 아니라 천주교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의 사과 내용을 통해서 교회가 진리를 떠나면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섯 가지 가톨릭교회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첫째는 갈릴레오 재판입니다. 확실한 과학의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종교 재판에 회부해서 강제적으로 지동설을 부인하게 한 진리를 왜곡시킨 가톨릭교회의 죄입니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난이 있었습니까? 둘째는 십자군 전쟁입니다. 1095년에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명령으로 결성이 되어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는 이슬람교도들과 200년이나 무고한 전쟁을 함으로 수없이 많은 젊은이들을 죽게 했습니다. 셋째는 마녀 사냥입니다.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나니까 사람들이 원망하고 신앙에서 떠났습니다. 그런데 12세기 말에서 18세기 초까지 약 500년 동안 마녀사냥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공연히 마귀가 씌었다고 트집을 잡아서 죽였는데 수없이 죽였습니다. 가톨릭교회가 한 것입니다. 여자들을 더 많이 죽였기 때문에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을 쓴 것인데 남자도 수없이 많이 죽었습니다. 넷째는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입니다. ‘미션’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남미 숲속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을 놓고 “이들은 영혼이 있는 인간이냐, 아니면 짐승이냐?” 교황청에서 그것을 토론하지 않습니까? 결국은 다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래서 한 마을에 모든 인구가 처참하게 다 죽고 살아남은 벌거벗은 소년 하나가 나룻배를 지어서 자기 살 길을 찾아 길을 외로이 떠나는 것으로 그 영화가 끝납니다. 중남미는 지금 30여 개국의 언어가 하나입니다. 스페인이 기독교 이름을 가지고 들어와서 모두 다 학살하고 여자들은 강간하고 종족 혼합을 시켰고 스페인어만 하게 해서 지금 그렇게 언어를 하나로 쓰는 것입니다. 그런 죄를 가톨릭교회가 지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니까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진리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개신교회라고 하는 것이 탄생되니까 1500년대에 개신교회를 또 마귀라고 죽이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교회 교황청에 의해서 많이 죽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약 7천 만 명을 죽였습니다. 잔인하게 무참하게 죽었습니다. 그 내용들을 교황청이 이제 와서 인정한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에서 떠날 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한 사건들입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진리를 붙잡는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다. 진리를 버린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성경만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3.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말씀하신 후에 엡 5:32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주님은 신랑이시고 교회는 신부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교회라는 말을 사용할 때 교회 앞에 ‘헤’라는 여성관사를 붙였습니다. 교회는 여성적입니다. 왜냐하면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엡 5장에서 신랑과 신부의 관계에서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복종과 사랑입니다. 오늘 저는 사랑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만들어 주시자 아담이 너무 마음에 들어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물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제 아내를 저렇게 아름답게 만드셨어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래야 네가 사랑할 거 아니냐?” 하시더랍니다. 계속 대화가 진행됩니다. “어떻게 저렇게 착하게 만드셨어요?”, “그래야 네가 아껴줄 거 아니냐?”, “그런데 하나님, 가만히 보면 좀‘맹한’ 데가 있어요. 그건 왜죠?”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래야 너 같은 사람을 사랑할 거 아니냐?” 하셨답니다. 부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사랑과 존경입니다. 한참 열애중인 남자가 자기 애인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자기야, 자기를 위해서라면 나는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 그랬더니 아가씨가 대답했습니다. “자기, 나를 위해 죽을 각오까지 할 필요는 없어. 죽지 말고 그 각오로 나와 결혼한 후에 평생 저녁 설거지만 해줘” 이 말을 들은 남자는 한참 생각을 해보더니 “그건 좀 곤란한데”하고 대답했다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된 [세상 끝날까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부인에 대한 남편의 헌신적인 사랑에 관한 내용입니다. 아내가 파킨슨 병으로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자 남편은 아내가 건강하고 아름답던 시절의 사진을 온 벽에 가득 붙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바라봄의 법칙을 가지고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 못 하는 아내에게 “저 사진을 보아라. 당신은 저런 사람이지, 파킨슨병에 걸린 이런 비참한 인간은 아니다”라며 늘 격려하고 그 아내의 손을 잡고 그 사진을 보게 하고 걷게 하고 늘 아내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13년 만에 아내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13년간 사랑의 힘으로 아내를 죽음에서 건져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부는 파킨슨병을 앓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고 이것을 사회 운동으로 확장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은 신부인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어느 정도로 사랑하시냐면 하늘 보좌를 버릴 만큼 사랑하셨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실 만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영광 받을 때만 우리와 같이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고난 받을 때에도 언제나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주님과 교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에 나오는 결혼 풍습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당시 결혼은 크게 약혼과 결혼의 두 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약혼식을 합니다. 이 약혼식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하는 약혼식보다 더 구속력이 있습니다. 여러 증인들의 입회하에 두 사람의 결합을 선포합니다. 이 날부터 신랑과 신부는 법적으로 남편과 아내가 됩니다. 약혼식과 결혼식 사이에 일정한 기간이 있습니다. 신랑이 신부의 아버지에게 결혼 지참금을 지불하지 못했다면 이 기간에 지불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을 배워야 합니다. 신부인 교회는 그리스도와 약혼을 한 사이라는 것입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신부인 교회를 맞이하기 위하여 엄청난 지참금을 지불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주신 것입니다. 다음에 결혼식을 위한 준비행렬이 이어집니다. 신부는 예쁘게 단장하고 꾸민 후에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신랑은 정장을 하고 자기 들러리 친구들과 함께 약혼녀의 집까지 노래를 부르며 횃불을 들고 행렬을 지어 나아갑니다. 친구들이 신부의 집에 당도하면 “신랑이로다! 나와서 맞으라.”라고 외치면 신부는 신랑을 맞이합니다. 신부인 교회는 결혼식을 기다리는 처녀와 같이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신부인 교회는 들림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공중에서 놀라운 혼인예식이 거행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신부인 교회는 몸치장을 잘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신부가 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치고 예식장에 나타나면 되겠습니까? 성경 살전 5:23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약혼한 처녀가 신랑이 자기를 데리고 가려고 오는 결혼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처럼 우리는 신랑이신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언제나 깨어서 그분이 오실 날만을 기다려야 합니다. 한 여행자가 스위스에 가서 아름다운 호숫가에 좋은 별장이 있는 것을 보고 출입문에 있는 벨을 눌렀더니 나이가 많은 관리인이 나왔습니다. 별장을 좀 구경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갔습니다. 정원과 별장 안 전체가 아주 깨끗하고 아름답게 잘 손질이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몇 년 동안 계셨느냐고 물었더니 24년간 있었다고 했습니다. 별장 주인은 자주 오시느냐고 물었더니 그동안 4번 오셨다고 했습니다. 4번째 다녀가신 것은 언제냐고 물었더니 12년 전이라고 했습니다. 주인께서 그렇게 오랫동안 오시지 않은데 별장을 이렇게도 깨끗하게 잘 정리해놓았느냐고 물었더니 주인이 오늘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날마다 깨끗하게 손질해 놓고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도 이러해야 합니다. 날마다 준비하고 항상 깨어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앙의 기초에서 교회론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지상교회에 속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교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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