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마경훈목사

[스크랩] 제자들은 문을 닫았는데 주님은 나타나셨다.

제자들은 문을 닫았는데 주님은 나타나셨다.
설교자 : 마경훈목사

본문 - 요한복음 20장 19 - 23절(개역개정)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성경에서 주님이 부활의 첫 열매라고 말씀하시고 있으며 믿는 우리는 그 다음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공중강림 하실 때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에는 2종류의 부활이 있습니다. 영생의 부활과 영벌의 부활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영생의 부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영생의 부활을 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행복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사람들은 영벌의 부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영벌의 부활을 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고통의 나라인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복된 사람은 이 땅에서 부하고 건강하고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영생의 부활을 준비를 한 사람입니다.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신 내용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모인 마가의 다락방의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몇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주님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가르쳐줍니다.
오늘 설교는 부활하신 주님이 주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나누겠습니다.

1.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평강하길 원하신다(19,20절).
19절과 21절에 보니 주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손과 옆구리에 있는 십자가의 흔적을 보여주시고서 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두려움 가운데 있던 제자들이 평안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평강은 헬라어로 ‘에이레네’입니다. 이 평강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 소장된 모든 복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안녕, 평화, 평안, 행복, 안전, 만족을 담고 있는 최상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평강은 몇 가지 방면으로 주어집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평강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1) 내면의 평강
모든 것을 가졌어도 내면에 평강이 없다면 불행합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내면에 평강이 있으면 행복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으로 인하여 내면에 평강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내면의 평강은 외적인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외적인 면 때문에 불안하거나 두렵거나 초조하거나 긴장된다면 그에게는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내면의 평강은 외적인 모든 것을 초월하고 주님을 바라볼 때 누릴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이 심했습니다. 원형 경기장 안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몰아넣어 굶주린 사자에게 뜯기고 먹히는 장면을 수많은 사람들이 보면서 쾌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핍박자들이 놀랐던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살려달라고 발악을 해야 즐길 수 있는데 죽음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메시지에 압도당했습니다. 스데반 같은 경우는 돌에 맞아서 죽어가는 순간에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면의 평강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호레이쇼 스파포드(H.G.Spafford, 1828~1888)는 미국 뉴욕 주에서 출생했으며 장성해서는 변호사, 교수, 시카고 장로교회 주일학교 교사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1871년에 그의 전 재산을 투자하여 시카고에 호화 별장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시카고를 초토화한 대화재로 인해 그의 모든 재산도 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크게 상심한 아내와 네 딸을 위로할 겸 유럽 여행을 계획했으나 공교롭게도 자신이 해야만 할 일이 있어서 가족만 떠나게 되었습니다.
1873년 11월 15일, 예정대로 가족들은 프랑스 여객선을 타고 뉴욕 항을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후인 22일 새벽, 영국의 철선 로션(Lochearn)호와 정면충돌하여 30분 만에 대서양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이 사고로 226명이 희생되었는데, 스파포드의 가족은 부인만 구조되고 네 자녀는 죽고 말았습니다.
연속적인 재난으로 망연자실해 있던 그는 서둘러 아내가 구조되어 있는 영국으로 갔습니다. 배를 타고 사고 해역을 지나면서 아이들을 생각하며 밤새 울부짖었습니다. 그 후 선실에 돌아와 기도로 간구하며, 성경에서 위로를 구하다가 시편 23편을 읽고 크게 은혜 받아 마음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때 쓴 것이 바로 찬송가 413장입니다. 제목은 “내 평생에 가는 길”입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그는 주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회복 되었습니다.

2) 대인관계의 평강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를 평안하게 잘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됩니다.
어느 목사님이 한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없고 그 집 아이만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부모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이가 바둑판을 들고 와서 목사님께 바둑을 두자고 했습니다. 어린아이와 바둑을 두는데 이길까요? 질까요? 당연히 이겼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한 번 더 두자고 합니다. 목사님이 또 이겼습니다. 아이의 안색이 조금 변했습니다. 아마도 승부욕이 강한 아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두었는데 목사님이 또 이겼습니다. 아이의 얼굴이 확 변하더니 한 번 더 두자고 합니다. 또 이겼다가는 이 아이가 상처받을 것 같아 이번에는 져 주었습니다. 그 아이가 일부러 져주는 것을 알겠습니까? 모르겠습니까? 알았어요. 아이가 목사님께 “일부러 져주었지요? 다시 두어요.”라고 하더랍니다. 그리고 또 두는데 또 져주었습니다. 그러길 수차례 결국 아이가 바둑판을 뒤집으며 울고 말았답니다. 대인관계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인관계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어린 시절과 사무엘의 어린 시절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눅 2:52입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삼상 2:26입니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3) 환경적인 평강입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이 환경적인 복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복은 저만이 아니고 하나님도 원하십니다. 이 부분은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단지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에게 환경의 복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4) 하나님과의 평강입니다.
하나님과 평강을 유지하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요일 4:10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하기 위하여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불화하던 우리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 주님을 받아드리고 주님을 따라 살면 평강을 위해서 내미신 하나님의 손을 잡는 것이 됩니다.

2.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신다(21절).
21절에 보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주님의 사랑에 미칠 수 없습니다.
북한 출신의 부부가 유럽 쪽에서 일을 했습니다. 이 부부가 삼엄한 감시를 뚫고 미국 대사관으로 도망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북한 감시원이 이 부부를 쫓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부부가 막 도망을 치는데 부인이 남편보다 달리기가 느려서 미처 못 따라 가니까 남편이 부인을 내버려놓고 미국 대사관으로 뛰어 들어가더랍니다. 부인이 뒤늦게 헐레벌떡 뛰어 들어가서 간신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아내에게 그렇게 남편이 야속한 마음이 들더랍니다. 잘못 뛰는 아내를 버려놓고 남편 혼자 뛰어가던 모습을 두고두고 생각나며 섭섭하더랍니다.
몇 년 전에 태국에 단기선교를 갔을 때 제가 아내에게 실수를 하나 했습니다. 산지족 마을을 다녀오다가 팀원들과 레프팅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그 자리에 있던 분들도 상당수입니다. 큰 구명보트로 급류를 타는데 저와 아내가 탄 보트가 뒤집어질 뻔했습니다. 그때 저는 줄을 단단히 잡아서 괜찮았는데 아내는 그만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저는 순간적으로 판단이 되더라고요. 물이 깊지 않고, 아내는 구명조끼를 입었고, 조금만 떠내려가면 걸릴만한 장소가 있으니 잡아주지 않아도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예상대로 아내는 아무이상 없이 다시 보트에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그게 섭섭했었나봅니다. 제가 다이빙을 해서 아내를 딱 잡아서 구해주었어야 하는데 구경만 했다는 것이지요. 그게 아닌데 제 마음을 아내에게 보여줄 수도 없고 다시 물에 빠져보라고 할 수도 없고 답답합니다.
주님은 전도를 하지 않는 우리들을 보시며 제 아내가 속상했던 것보다 더 속상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이제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데 사람들이 믿지 않아서 지옥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혜를 받아서 구원을 받았고 또 구원의 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지옥을 향해서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지 못하고 있으니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전도는 주님의 소원입니다. 주님은 주님이 아버지의 말씀대로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이제 우리가 주님을 대신해서 세상에 복음을 전해주기를 원하십니다.
허브 밀러(Herb Miller) 박사의 책 [아스팔트 위의 낚시질(Fishing on the Asphalt)]을 보면 미국의 경우 보통의 기독교인들이 6천 번 설교를 듣고, 8천 번 기도하고, 2만 번 찬송하지만 자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저는 한국 사람들은 미국 사람들보다 더 많이 설교를 듣고,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찬송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지 않는 것은 미국인들과 비슷하리라 생각을 합니다.
어떤 분이 세상의 교회는 두 종류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주차장 같은 교회와 주유소 같은 교회입니다. 주차장 같은 교회는 교인들이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교회입니다. 주유소 같은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동차가 주유소에 와서 기름을 공급 받고 나가서 돌아다니는 것처럼 교인들은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연료가 떨어질 만하면 찾아와서 충분하게 연료를 공급받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전도에 힘을 써야 합니다.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1주일에 1번 전도를 나갑니다. 이번 주 부터는 1주일에 2번 전도해야겠습니다. 하루는 어린이 전도를 하고 하루는 지역 전도를 해야겠습니다. 어린이 전도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유는 어린이가 어른들보다 더 전도를 잘 받아드리기 때문입니다.
존 채프먼(John Wilbur Chapman, 1859~1918) 목사님이 한 집회에 모인 4,500명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모인 사람들 중에는 36세 이전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거의 전부였고 36세 이후에 신앙을 가진 사람은 고작 24명에 불과했답니다. 어린 시절에는 복음을 받아드리기가 쉽습니다.
전도만큼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넘치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1년에 100명이상 전도하는 전도 대장들을 조사를 해봤더니 공통점이 하나 있더랍니다. 모두가 물질의 축복과 건강의 축복을 받았더랍니다. 전도를 하기 전에는 가난했고 몸이 아팠던 사람들도 전도에 헌신하면서 하나님께서 건강도 주시고 물질도 주시더랍니다. 전도는 부활하신 주님의 소원입니다. 전도합시다.

3.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성령으로 살기를 원하신다(22절).
22절에 보니 주님께서 숨을 내시며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이 그 상황을 극복하려면 반드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대신해서 세상에 복음을 편만하게 만들어야 할 책임을 다하려면 반드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동차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기름 없이 달릴 수 없는 것처럼 성령님이 없이 신앙생활은 불가능합니다.
14세기 철학자 쟌 부리당 (Jean Buridan)의 어리석은 당나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마리의 몹시 배가 고픈 당나귀가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당나귀는 건초가 있는 산을 발견하였습니다. 어쩌다가 동시에 오른쪽과 왼쪽에 두 개의 건초가 있는 산을 발견하였습니다. 오른쪽과 왼쪽의 건초는 똑 같았습니다. 그래서 당나귀는 어느 쪽의 건초를 먹을까 하고 망설였습니다. 그러다가 오른쪽 산에 있는 건초를 먹으려고 오른 쪽으로 2, 3보 걸어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왼쪽 산의 건초가 맛이 더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왼 쪽으로 가자 이번에는 오른쪽 산의 건초가 맛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이튿날 아침에 당나귀는 두 개의 건초가 있는 산 중간에서 굶어 죽어버렸습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성령충만하지 못하면 주님과 세상 사이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확실하게 주님을 따르기는 따라야겠는데 세상이 좋아 보이고 세상이 귀해 보입니다. 안 믿자니 불안해서 교회에 가기는 가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헌신하자니 문제가 많아집니다.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놓기가 무척이나 아깝습니다. 그래서 마치 당나귀가 두 산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있다가 굶어 죽은 것처럼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고 어중간한 신앙의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실종되고 하나님에 대한 열정도 사라집니다.
성령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했습니까?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흐름에 떠내려가게 됩니다.

4.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기를 원하신다(23절).
23절에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대의 죄가 내 마음에 남아 있으면 내가 괴롭습니다. 내 마음에 남아 있는 상대의 죄를 없애려면 내가 그를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해야 함을 알지만 용서가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주님의 사랑이 가슴에 충만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충만하면 그 사랑 때문에 다 용서 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스데반은 핍박자들에게 돌을 맞아서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스데반이 주님으로 충만하니 그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두 소녀가 해변가에서 사이좋게 조개를 줍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눈앞에 큰 조개가 보였습니다. 두 소녀의 손이 동시에 그 조개를 덮쳤습니다. 서로 아옹다옹하면서 자기가 먼저 발견했으니 이 조개는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이좋던 소녀는 일순간 냉랭해졌고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결국 고집이 더 세고 목소리가 더 큰 소녀가 큰 조개를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부터 두 소녀는 말도 안하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헤어져 조개 줍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큰 조개를 빼앗겼다고 생각한 소녀에게 일순간 큰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전혀 뜻밖에 엄청난 진주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큰 조개를 빼앗긴 것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전에 기분 상했던 마음이 눈 녹듯 풀어졌습니다. 진주를 얻은 소녀는 다른 조개를 주운 소녀 곁으로 가서 다시 즐거운 마음으로 사이좋게 조개 줍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들 앞에 또 다시 큰 조개가 나타났는데, 이전에 비길 데 없이 크고 예쁜 조개였습니다. 이번에도 두 사람의 손이 동시에 조개를 덮쳤지만 더 이상 다투지 않았습니다. 진주를 가슴에 품은 소녀가 기쁜 마음으로 양보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훨씬 더 귀하고도 아름다운 보배, 진주를 얻었으니 그깟 조개 정도야 얼마든지 친구에게 양보할 수 있었습니다. 더 크고 더 아름다운 것을 찾은 사람은 더 이상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는 보배 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보배로운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 가슴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작은 일에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은 상처를 가슴에 품고 상대를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으로 충만하면 다 이해됩니다. 다 용서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이디 아민이라는 독재자가 아프리카의 우간다를 통치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한 사람의 잘못된 통치 때문에 많은 국민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곳에 있는 어떤 교회 목사님이 이디 아민의 불의를 공공연하게 비판했습니다.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그날은 부활 주일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예배를 마치고 난 뒤에 자기 사무실로 들어섰습니다. 뜻밖에도 사무실 안에는 다섯 명의 비밀경찰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목사님이 들어서자마자 사무실 문을 안에서 걸어 잠갔습니다. 그러더니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목사님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국가의 명에 따라서 반국가사범을 처단하기 위해서 여기에 왔소.”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목사님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침착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아시다시피 부활 주일입니다. 나는 부활을 믿는 사람이기에 죽음은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단지 나에게 2분간의 시간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내 삶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목사님에게 2분간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목사님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 나라의 통치자 이디 아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원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그의 명에 따라야 하는 이 불행한 다섯 명의 형제들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에 참된 자유를 허락해 주시고 사랑과 공의가 이 땅에 정착되게 하옵소서. 저의 죽음으로 이제는 더 이상 이 땅에 이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이 나라, 이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옵소서.” 목사님이 대단한 기도를 했습니다. 독재자 이디 아민과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이 사람들을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목사님이 기도를 마쳤습니다.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곁에서 목사님의 기도를 듣고 있던 다섯 명의 경찰들도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경찰의 통솔자가 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우리가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습니다. 어서 이 자리를 피하십시오. 목사님은 교회에 안 계시더라고 상부에 보고하겠습니다.” 그러더니 그들은 목사님의 답변을 듣기도 전에 쏜살같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소원 4가지를 나눴습니다.
1.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평강하길 원하십니다.
2.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3.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성령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4.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비전교회] 경기도 하남시 감이동 361-4
(02) 443-9197
비전교회 : http://www.visionchurch.co.kr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