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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행복한 하나님의 선물(마25;14~30)

행복한 하나님의 선물(마25;14~30)

 

그리스도인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행복한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일진대, 이렇게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다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자연히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주인의 마음을 오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깥 어두운 대로 쫓겨나게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을 잘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함께 보겠습니다. “행복한 하나님의 선물”. 처음에는 제목을 “달란트, 행복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하였다가 너무 길어서 달란트라는 말을 빼어버리고 “행복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선물을 주고받은 경험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주 교역자 회의 때에 이번 성탄절에 선물교환 행사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지금이야 옛날보다는 선물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무슨 기념일이 있으면 당연히 선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집에서도 아이들이 자기 생일이 다가오면 벌써 한 달 전부터 무슨 선물을 해줄 것이냐고, 아예 자기가 선물을 정해주기도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연애 백일을 기념하여 선물을 하고, 또 요즘은 무슨 날들이 그렇게 많은지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 무슨 데이 도무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 선물을 받았을 때를 지금도 기억합니다. 제가 아마 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그해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어머님이 맏딸이시기 때문에 이모에게 제가 첫 조카였습니다. 큰 이모님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주신 “그림 동화책”을 받았을 때에 얼마나 행복했던지? 저는 그 때에 선물이라는 것을 처음 받았고, 또 동화책이라는 것도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읽었던지 저녁에 잘 때마다 동화책에서 읽었던 것들을 꿈을 꾸었습니다.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림자 없는 도둑이 나오는 장면을 날마다 꾸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얼마 전에 어느 목사님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하였습니다.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전화하기가 좀 그랬습니다. 책 한권 선물하고 무슨 인사를 받는가 싶어서 전화를 하지 못했는데, 책만 보낸 것이 아니어서 확인 차 전화를 하였더니, 책 잘 받았다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요즘은 하도 선물이 남발되어서 그런지 선물을 받아도 그렇게 큰 감동을 받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또 아예 선물이 부담이 되어서 선물을 거절하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떤 선물이든지 받으면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게 받으려고 합니다. 선물도 선물이지만 저를 생각하는 그 분의 마음을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게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주신 분의 마음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선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냐 보다는 그것을 준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달란트 비유라고 말하는 말씀입니다. 어떤 주인이 먼 나라로 가면서 세 명의 종을 불러서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었고, 또 한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바로 가서 장사를 하여 배로 남겼습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곧 바로 땅을 파고 주인으로부터 받은 한 달란트를 묻어 두었습니다. 오랜 후에 다시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과 회계를 하였습니다. 곧 바로 가서 장사를 한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과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주인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 둔 종은 주인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듣고 바깥 어두운 대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드신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상황은 25장 1절의 상황과 같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25장에는 열 처녀 비유를 시작으로 달란트 비유,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가 연이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세 비유는 같은 상황에서 나오는 비유라는 점을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25장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때에 천국은” 이 말씀이 25장에 나오는 세 비유를 말씀하시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 비유는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어떤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들이고, 그리고 장차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먼저 해 보았습니다. 당시의 여러 종류의 화폐가 사용되었습니다. 주로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던 화폐 단위는 데나리온입니다. 데나리온도 그렇게 작은 단위의 돈은 아닙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런데 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이나 됩니다. 그러니까 노동자가 육천일을 벌어야 하는 돈입니다. 16년 5개월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만들 수 있는 돈이 한 달란트입니다. 그러니 달란트라는 돈은 서민들이 생각할 수 없는 돈입니다. 달란트는 로마의 귀족들이나 거상들이나 사용하는 돈이지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 달란트라는 돈을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일용할 양식을 얻는다는 것은 생존권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마20장에 보면 포도원 품꾼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포도원 주인이 품꾼을 불러 자기 포도원에서 일하게 하였습니다. 어떤 품꾼은 아침부터 와서 일하였고, 어떤 품꾼은 저녁이 다 되어서 포도원에 들어와 일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다 되어서 일한 품꾼에게도 주인이 한 데나리온, 하루 품삯을 쳐서 주었습니다. 주인이 늦게 들어 온 품꾼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바로 하루 품삯이 그 사람의 생존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바로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저들에게 있어서 달란트라는 돈은 꿈에나 만질 수 있는 돈이지, 현실적인 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달란트라는 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처럼 지질히도 가난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들에게 있어서 행복은 꿈만 같은 일이지, 그것이 현실일 수 없다고 생각하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들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자인 줄 아느냐?”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일은 또 어느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할 수 있을까? 내일 오는 포도원 주인은 나를 또 데리고 갈까? 정말로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저들에게 주님은 “사랑하는 자들아! 한 데나리온이 없어서 힘들지.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험산준령을 넘는 것 같지.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준 선물이 있단다. 그 선물이 얼마나 큰지 아니?” 저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한 데나리온의 문제로 힘든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한 데나리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달란트의 선물을 하나님께서 주셨단다. 그 달란트를 생각하렴.” 그렇습니다. 성도에게는 한 데나리온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옆 사람과 함께 축복의 인사를 하십시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행복한 하나님의 선물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 주신 행복한 선물이 있습니다. 그 선물을 주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달란트의 선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선물에 주목하지 못하고, 한 데나리온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내게 준 달란트가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그 달란트가 어디 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알든 모르든 하나님은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달란트를 받지 않은 종은 한명도 없습니다.

내가 받은 달란트를 아직 발견하지 못하신 분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각자 맞게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사람은 두 달란트,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받은 달란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받은 달란트를 땅을 파고 묻어 두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것이 얼마나 귀한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알지 못하여서 땅을 파고 묻어두었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한 달란트도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달란트를 비교하여 크기를 말합니다. 다섯 달란트가 제일 크고, 그 다음에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가 제일 작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주었을 때에 크기로 주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주셨습니까? 맞게 주셨습니다. 크기로 준 것이 아니라, 맞게 주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크기로만 생각합니다. 크기는 비교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비교하지 않으면 크기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무엇이든지 크기로 비교합니다.

우리가 행복한 하나님의 선물을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우리 안에 비교하는 마음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과 저것은 결코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렇게 있어야 할 이유가 있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주인이 한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셨을까요? 어떤 사람은 그 종이 한 달란트를 받을 능력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한 달란트를 주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 달란트 받을 능력밖에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종으로 행복하라고 한 달란트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주실 때에는 그것으로 우리를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행복하라고 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무엇을 줄 때에 그것으로 자식을 평가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으로 행복하라고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받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주신 행복한 선물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행복한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본래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첫 수업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축복의 산에 올라가서 하신 첫 수업에서 예수님은 “행복하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수업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 한 데나리온의 문제로 고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저들을 향한 주님의 첫 수업이 무엇이냐면 “행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으로 고민하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행복자임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너무나 수업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 오신지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행복”이라는 첫 수업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내가 행복자인 것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업의 진도가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놀라운 선물을 주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비교함으로써 잃어버렸습니다.

행복은 문제없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하면서 맛보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리고 문제를 통하여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남으로 우린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과 사도들은 항상 문제와 직면한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니는 바울 사도의 이 고백 속에서 그가 날마다 문제 속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전도여행을 보면 그가 얼마나 많은 문제와 직면하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문제들을 직면할 때마다 자기에게 힘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다섯 달란트를 주었으면 어떠했을까요? 행복하였을까요? 그는 얼마의 달란트를 받았든지 행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에게 회계할 때에 어떻게 말합니까?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을 합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것과 악하고 게으른 것이 달란트와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관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 일입니다. 많이 가진 자는 착하고 충성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적게 가진 자는 악하고 게으른 것이라고 판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가 무엇을 얼마만큼 가졌냐는 그가 어떤 사람이냐 와는 전혀 별개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별개로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물론 어떤 경우는 연관이 있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무엇이라는 것은 오늘 본문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그것은 그 사람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디 종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종들이 요청한 것도 아니요, 주인이 준 것입니다. 물론 이 부분도 주인이 맞게 주었다고 하니까 무슨 관계가 있기는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가 무엇을 가졌느냐는 그가 어떤 사람이냐 와는 전혀 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다섯 달란트를 주었으면 어떠했을까? 저는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달라져야 달라지는 것이지, 사람이 달라지지 않고서는 본질적인 변화는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소유할 것이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행복은 소유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행복한 사람은 무엇을 가지고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나를 행복하게 할 무엇을 구하지 말고, 무엇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가장낮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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