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운 사람 요셉(마1;18~25)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구원을 하시려는 계획을 세우시고 역사하신 사건이 성탄입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입니다. 지금 우리가 새벽마다 성탄에 관한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탄에 관한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얼핏 보아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참으로 놀라운 '야 그 일이 하나님이 아니시면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겠느냐?'는 탄성이 나올만한 것이었다면,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1장에서 그렇게 증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 하십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자기 백성조차도 알아볼 수 없는 그런 역사였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놀라운 일이었다면 자기 백성들뿐만 아니라, 이방 백성들도 예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경배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 구원의 역사를 자기 백성들조차도 알 수 없게 하셨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그렇게 초라한 성탄을 만드셨을까요? 만백성이 그 분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경배할 수 있도록 그렇게 위엄이 있는 그런 성탄을 만들지 않으시고 짐승의 먹이통인 구유에 나시게 하였을까요? 이것 또한 성탄의 신비가 아닐까요? 분명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을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그렇게 위엄 있는 성탄이 아니라, 구세주를 말구유에 누우시게 하시는 그런 초라한 성탄이 되게 하신 뜻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구원이란 모든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입니다. 이 구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진주를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보화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진주를 개에게 줄 수 없습니다. 보화를 돼지에게 던져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원은 어떤 진주나 보화보다 값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원의 보화는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받을 수 있지만, 그러나 아무나 받지는 못합니다. 그 가치를 아는 자 만이 받는 것입니다. 그 가치를 모르는 자는 주어도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그 구원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만이 참으로 행복한 성탄이었습니다. 그들만이 주님의 오심을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오늘 우리도 첫 번째 성탄에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렸던 목자들처럼 동방의 박사들처럼, 시므온과 안나처럼 그렇게 행복한 성탄을 맞이하는 주인공들이 다 되기를 축복합니다.
본문 18,19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 1: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천사장 가브리엘은 요셉의 정혼한 여인 마리아에게 먼저 성탄의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참으로 놀라운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을 하였지만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였습니다. 처녀가 수태하다니 이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천사의 설명에 주의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는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되고, 이 놀라운 일을 받아들입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소식을 듣고 바로 산중에 있는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엘리사벳 역시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었지만 천사의 소식대로 복중에 이미 아기를 잉태한지 여섯 달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함께 석 달을 함께 지내다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리아가 엘리사벳과 함께 산중에서 석 달을 지낸 후 돌아온 직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혼한 처자가 석 달이나 아무 연락도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돌아온 것입니다. 행방불명이었다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얘기가 들립니다. 마리아가 입덧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삼 개월 동안 아무 연락도 없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들리는 소리가 참으로 해괴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요셉도 그저 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혼한 처자가 아무 소식도 없이 석 달이나 보이지 않다가 나타나니까 그런 소문이 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문이 잠잠해지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더욱 심상치 않은 것입니다. 요셉이 마리아를 만나서 사실을 확인해 보니 분명히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틀림없이 아이를 벤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은 부인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정혼한 처자가 남의 아이를 가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이 부정한 짓을 저지른 것입니다. 참으로 요셉에게 이 일은 천지가 진동할 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강화도에서 총기 강탈사건이 일어났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젊은 병사 한명이 죽었고 한 병사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 범행을 저지를 청년이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동기가 무엇이었냐면 헤어진 여자 친구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그런 끔직한 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이별의 고통을 맛보게 한 그 여자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솔직히 말한다면 억울한 일도 아닙니다. 그 고통이 마땅히 자기가 당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도 그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나를 힘들게 한 만큼 당신도 고생 좀 해봐라. 그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당신이 나에게 사정하기 전에는 내가 당신에게 절대로 먼저 가까이 가지 않겠노라. 한 번 맛 좀 봐라. 그런 마음이 부부 사이에도 들지 않습니까? 자식이 부모에 대해서도 그런 복수의 마음을 갖고 삽니다. 자신이 잘 못하여 혼을 나고서도 부모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병주야! 목사님 말이 틀리냐? 은택아 너는 어떠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요셉이라면 이런 일을 당했을 때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정혼한 처자가 아무 기별도 없이 사라졌다가 석 달 만에 나타났는데 남의 아이를 밴 것입니다. 아마 분노하지 않을 남자가 없을 것입니다. 요셉도 처음에는 분노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분노에 대해서 성경은 일체 언급이 없습니다. 아무튼지 이 일로 인하여 요셉은 굉장히 고민을 하였습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가만히 혼인 약속을 파기하고 끝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마리아는 이제 고향을 떠나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런 경우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보통 남자라면 사람들이 돌로 치기 전에 자기가 먼저 돌로 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정혼한 여인 마리아의 수태 사실을 알고 나서 요셉의 고민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리아에게 어떻게 복수를 할 것인가를 생각했을까요? 어떻게 자기의 복수를 정당화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을까요? 저 여인은 부정한 여인이고 자기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나타내고 싶었을까요? 아마 우리들은 그런 고민을 하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상대방의 부정과 잘못을 드러내고 싶고 자기는 의롭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가만히 끊기로 하였습니다. 요셉이 가만히 끊기로 한 것은 부정한 여인 마리아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대로 있다가는 죽을 수밖에 없기에 부정한 여인을 살리기 위해서 가만히 끊기로 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가만히 끊기로 한 이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요셉의 의는 어떤 의입니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는 어떤 의입니까?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려고 하는 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상대방의 불의와 부정을 말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고,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1,2)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불의 먼저 드러내지 않습니까? 이런 바리새인의 마음이 오늘 우리들에게는 없습니까? 우리들도 다른 사람의 불의를 드러냄으로써 나의 의를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까?
왜 오늘 성경은 가만히 끊고자 하는 요셉을 향하여, '저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의를 자기의 옳음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불의와 잘못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는 자기의 옳음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사는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살리시는 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의를 주장하고 나타내려는데 힘을 씁니다. 하지만 성도의 의로움은 자기의 의를 나타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죄로 죽는 자를 살리는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옆 사람과 함께 축복의 인사를 합시다. 당신의 의가 죽어야 하는 자를 살리는 의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의는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의가 되어야 합니다. 나 혼자만의 의로 독야청청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로 죽어가는 자가 살아나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진정한 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바로 죽어가는 자를 살리시는 의였습니다.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의의 삶을 사는 우리 모주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죽어가는 자가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요셉의 의는 바로 십자가를 닮은 것입니다. 세상의 의는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요셉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의하여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마리아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부정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때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주의 천사가 요셉에게 현몽한 것은 바로 요셉에게 행복한 성탄을 준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행복한 성탄은 누구에게 임하는 것입니까? 자기의 의를 내세우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한 성탄은 죄인을 살리는 의에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죄인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죄인을 위하여 내가 십자가를 질 때에 행복한 성탄이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행복한 성탄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행복한 성탄을 준비합니까? 주님께 드릴 선물을 마련하십니까? 우리가 준비하는 어떤 선물보다 십자가를 지는 자가 성탄을 가장 아름답게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자가 죽은 것입니다.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자가 죽은 것이 십자가 아닙니까? 세상은 죄인을 죽이는 것을 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죽이는 의가 아니라, 용서하는 자가 죄인을 위하여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인이 사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아름다운 성탄준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옆 사람과 축복의 인사를 하십시다. 가장 아름다운 성탄준비는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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