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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적 진보를 이루기 전에(행1;15~26)

영적 진보를 이루기 전에(행1;15~26)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뒤따랐습니다. 그 무리의 수가 얼마나 많았든지 당시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자들은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자 다 흩어졌습니다. 저들은 이제 예수님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옛 삶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정권교체가 일어나니까 참여정부에서 장관을 했던 사람들도 돌아서고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자신이 죽은 후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조차도, 그리고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삼일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의심하던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15;6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동시에 본 형제들이 오백여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오백여명은 주님의 승천을 목격한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지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이 120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함께 했던 그 사람들은 그만두고라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오백여명은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백여명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도 지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120명입니다. 지금 이 숫자가 많은 숫자입니까? 적은 숫자입니까? 여러분이 오백여명 속에 있었다면 지금 어디에 있을 것 같습니까? 120명 속에 있습니까? 아니면 사백여명 속에 있을 것 같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120명 속에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표가 영적 진보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오백여명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마가의 다락방에 남는 사람은 20% 정도입니다. 주님의 승천을 보았다고 영적인 진보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은 세례 요한 때로부터 예수님의 승천 때까지 함께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백여명도 주님의 승천만 목격한 자들이기 보다는 상당 기간 주님과 함께 했던 자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전부가 주님의 말씀을 믿고 끝까지 주님과 함께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20% 정도만이 영적 진보를 이루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령한 체험을 한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에 많은 유익을 주기도 하지만 영적 진보는 결코 체험에 의해서 되는 것만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체험으로 말한다면 주님과 함께 했던 자들보다 더 진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이적들을 행하였습니까? 그 이적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행할 수 없는 이적들이었습니다. 저들은 그 이적들을 보면서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저들이 다 영적 진보를 이루는 자들이 되지는 못했다는 점을 우리는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한국 교회는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체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분명한 확신과 믿음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체험이 곧 우리의 영적 진보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체험으로 우리의 신앙의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영적인 진보가 일어나는 체험이 되어야 합니다. 체험만 쌓는 자가 아니라, 체험이 영적인 진보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지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숫자가 많은 것인지, 아니면 적은 숫자인지 물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 숫자는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적어도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자들이 오백여명이라면 한 반절은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반에 반도 안 됩니다. 반에 반도 안 되는 수를 많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동의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15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그런데 성령의 감동으로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120명을 작은 수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120명의 수가 반에 반도 안 되는 수이기 때문에 적은 수인 것 같은데, 어찌하여 누가는 이 수를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고 하는 것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사도행전을 기록한다면 지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자들을 보고 어떻게 기록을 하겠습니까?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이렇게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우리들은 "겨우 일백 이십 명이더라." 이렇게 기록하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분명 120명은 반에 반도 안 되는 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이 수가 결코 적은 수가 아니라고 기록하는 것은, 바로 이 120명이 영적 진보를 이루는 자들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 진보를 이루는 수는 결코 작은 수가 아닙니다. 영적 진보는 수를 뛰어 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차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올림픽에서 금메달 하나가 큽니까? 아니면 은메달 열 개가 큽니까? 금메달 하나가 큽니까? 동메달 백 개가 큽니까? 금메달 한 개가 큽니다. 금메달 한 개가 은메달 열 개보다 동메달 백 개보다 더 큽니다. 왜 그렇습니까?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금메달과 은메달은 비교할 수가 없는 차원인 것입니다.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낮은 차원으로는 높은 차원을 따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하기를 아무리 잘 한다고 하더라도 곱하기를 따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 문도는 분명 반에 반도 안 되는 수였지만, 그들은 영적 진보를 이루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12명이 모였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주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크게 여기시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4절 하반 절에 보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하였습니다. 반에 반도 안 되는 수였지만 전혀 기도에 힘쓰는 이 사람들을 어찌 적은 무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의 기록이 옳습니다. 겨우 120명이 아니라, 일백 이십이나 되더라. 할렐루야!

저도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얼마나 모입니까? 아마 여러분들도 그런 질문을 가끔씩 받았을 것입니다. 당신이 나가는 교회는 몇 명이나 모여? 그럴 때마다 대답하기가 곤혹스러운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쓴다면 이제 당당히 말하십시오. 아니 이제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진보를 이룸으로써 우리가 당당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진보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당당함은 허풍일 뿐입니다. 진정한 당당함은 영적인 진보입니다. 숫자가 나를 당당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진정한 당당함은 나의 영적인 진보라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새기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한 번 옆 사람과 축복의 인사를 합시다. "당신의 당당함은 당신의 영적인 진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당당함은 우리의 영적인 진보이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함께 보겠습니다. "영적인 진보를 이루기 전에". 이 제목이 주는 느낌이 다가옵니까? 우리는 금년 표어를 "영적 진보를 이루는 삶을 살자."로 하였습니다. 이 표어대로 영적인 진보를 이루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영적인 진보를 추구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배가 출항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닻을 올려야 하는 것처럼, 우리들에게 이렇게 먼저 해야 할 일들, 먼저 생각해야 할 일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적인 진보를 이루기 전에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들을 소홀히 한다면 사실 그 결과를 낙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운동선수가 출발하기 전에 먼저 선수답게 자기의 모습을 만들지 않습니까? 달리기 선수가 고무신을 신으면 되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영적인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도, 먼저 우리가 그 목적에 합당한 모습을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생각은 영적 진보는 성령 충만함으로 시작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 충만함 이전의 모습을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영적인 진보를 이루길 원한다면,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첫째로 지금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힘쓰는 자들이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영적인 진보는 기도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기도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집에서 기도한다고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를 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기도가 잘 됩니까? 새벽기도를 한 10년 정도 꾸준히 하신 분들은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집에서 기도한다는 것, 말짱 이름뿐입니다. 새벽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영적인 진보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저는 새벽기도의 힘으로 목회를 하는 것 같습니다. 진정으로 영적인 진보를 원한다면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기도원 몇 번 갔다 온 것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기도는 호흡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의 기초는 끈기 있는 반복입니다. 우리 옆 사람과 함께 인사합니다. 기도의 기초는 끈기 있는 반복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기도는 운동과 비슷합니다. 운동도 어떤 사람이 효과를 봅니까? 끈기 있게 하는 사람이 효과를 봅니다. 며칠 열심히 하고 마는 사람은 절대로 운동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기초는 끈기 있는 반복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올라오시면서 게시판을 보셨습니까? 작심삼일이라도 120번 하면 된다. 맘에 드는 말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삼일입니다. 삼일은 굶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삼일을 넘으면 월담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능력 안에서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입니다. 작심삼일이라도 120번 하면 된다.

그런데 지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무엇을 기도하였을까요? 저들의 기도의 내용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저들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남아 있는 것일까요? 저들의 기도는 기다림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기도였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는 기도였습니다. 다시 말한다면 성령의 통치를 기다리는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기도는 이제 자기의 주인이 바꿔지기를 원하는 기도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나의 주인이 바꿔지기를 원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주장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생각이 항상 옳습니다. 바꿔야 할 것은 나의 생각이 아니라, 너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기도하는 가운데 베드로가 일어나서 말합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냐면 지금까지 우리 가운데 일어난 일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주인이 되어서 일어난 일이라는 말입니다. 역사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말씀이 주인 되어서 일으킨 것이 역사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깨달음입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역사의 주인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내가 역사를 만든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습니다. 자기 생각, 자기 경험, 자기 지식에 갇혀 있습니다. 그것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왜 부활한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오백여명이 넘는데 지금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반에 반도 안 되는 것입니까? 지금 여기에 없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기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진보는 자기라는 울타리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내 경험이라는 울타리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내 지식이라는 울타리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적인 진보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분명히 예수님으로부터 십자가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부활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에 각기 제 길로 간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진보를 원한다면 끊임없이 나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좇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라는 울타리를 뛰어넘게 될 때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베드로의 말을 듣고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자기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으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나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나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저들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에 대해 설파하신 후에 하시는 말씀이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분명히 말씀하였기에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기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으면 주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듣기를 원한다면 먼저 나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내 생각의 울타리 내 지식의 울타리, 내 체험의 울타리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한다면 이런 모든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를 내려놓는 것이 주의 음성을 듣는 시작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올 한해는 이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내게 들려지는 말씀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120문도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갸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저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진다는 증거입니다. 내게 주신 음성으로 들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증인이 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지금까지는 그렇게 하다가 잡혀갈 것을 염려하여 문을 꼭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주님이 이미 감람산에서 저들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 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주님은 승천하기 직전에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저희에게 지금 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해에 반드시 우리의 영적 진보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기다림의 기도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가장낮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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