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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무릎 꿇고 비노니 / 엡 3:14-15 (신 313쪽)

3:14-15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사람이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은 정말 귀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관심이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림이 전혀 없이 

꾸준하게 계속된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감사할 일입니다. 


필리핀을 갈 때마다 직간접적으로 듣게 되는 말이 꼭 있습니다. 

꼭 그렇게 직접 가야만 하느냐는 겁니다. 

차라리 필리핀과 한국을 왔다 갔다 하는 비행기 값하고, 

또 가서 사용하게 되는 이런저런 비용을 선교사님께 드리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필리핀 단기선교를 거의 매 해마다 가면서 갈 때마다 깨닫는 것은 

역시 계속해서 이런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나게 귀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역시 사람은 그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들 그냥 한 번 가서 그곳의 현실과 선교사님의 사역을 보고 엄청난 감동을 받아서 

자기 마음에 선교를 굳게 다짐하고 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다음번에도 가려고 하는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이미 자기는 그 어려운 선교현장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직접 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가는 단기 선교에 그 어떤 보탬이나 도움도 주지 않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삶을 통해서 드러나고 나타나고 표현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사람에게 그 어떤 기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참 부질없는 일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 위안을 받는 것은 이런저런 형편과 처지에 연연해하지 않고 

꾸준하게 자기의 은혜를 드러내고 나타내는 성도들도 있다는 겁니다.



저는 항상 궁금합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기도를 합니다. 

나무목교회에 한 달에 한두 번을 개척하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달걀 5판씩을 보내주는 하남 덕풍교회의 정동은 집사님 가정입니다. 

지금은 처음 달걀을 보낼 때와는 달리 달걀 값이 상당히 많이 올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똑같은 크기의 달걀을 똑같은 양으로 매달 계속해서 보내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주일 식탁에 가끔씩 달걀말이가 통째로 오르는 것은 모두 정집사님의 덕분입니다. 

저는 우리 나무목교회의 성도들이 이렇듯 누군가에게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되고 격려가 되고 힘이 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게 되기를 기도하고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 순간의 마음이 아니라 계속해서 꾸준하게 이어지는 넉넉한 마음이기를 기도합니다.


왜 이렇게 오늘 사설이 긴가 하면 

오늘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결코 오늘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의 힘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실 어디에서 이어져야만 바른 의미로 다가오느냐면 

2장 21-22절 다음에 와야 더 이해가 쉽습니다.


엡 2: 21-22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사실 에베소서 1장부터 2장 마지막까지의 내용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은 그 어떤 경우에도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에 관한한 절대로 흔들리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뭐냐면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 사실을 우리 것으로 누려가지는 못한다고 하는 겁니다. 

입술로는 구원받았다고 떠들지만 실제로 그 확신을 누리고 살지는 못합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의 위치가 언제나 내 안에만 있는 제한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자라지 못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신앙생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어려움에 대처하는 것, 

고난과 아픔을 이겨내는 것, 

원수까지도 사랑을 하는 것 등등 모든 것을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누가 제대로 안 가르쳐줘도 다들 눈치껏 잘 알고 있습니다. 


한 번 잘 생각해보세요. 

누가 뭘 안 가르쳐줘도 다들 잘 따라 합니다. 

말씀을 배워야 하네, 알아야 하네, 확실하게 깨달아야 하네 등등 말이 많지만 

사실은 전혀 배우지 않고도 다들 눈치껏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혹시 아직도 잘 모른다고 생각이 되시면 저한테 오세요. 

그러나 제가 봐서는 오실 분이 없습니다. 

몰라서 못하지는 않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 나무목교회 예배 순서도 어떻습니까? 

누가 사실 뭐라고 안 가르쳐줘도 다들 한 번만 참석하면 다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다 알면서도 정작 자꾸 모른 척 하려고 하는 겁니다. 

열심히 하지 않을 핑계를 자꾸 찾는 겁니다.



아주 짧막한 퀴즈 하나 내보겠습니다. 

물론 맞힌다고 해도 상품은 없습니다. 

승용차의 바퀴가 모두 몇 개입니까? 

네, 다섯 개가 있습니다. 

왜 다섯 개인지 모르시는 분은 아마 운전을 전혀 못하시는 분이시거나 

말씀처럼 스스로 바퀴를 체크해 본 일이 없는 분이실 겁니다. 

운행 중에 사용하는 네 개의 바퀴와 

그 바퀴 중에 하나가 펑크가 나거나 이상이 생기면 갈아 끼울 수 있도록 

보조 바퀴 하나가 더 있어서 모두 다섯 개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운행 중인 바퀴가 펑크가 나거나 이상이 생겼을 때 

보조 바퀴를 갈아 끼울 실력은 되십니까? 

보조 바퀴가 있는 것은 상식적으로 알지만 

실제로 바퀴에 문제가 생겼을 때 갈아 끼울 실력이 되느냐는 겁니다. 


아는 것이 곧 실력이 되지 않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부터 그 말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안다면 

이제는 삶을 통해서 그 구원의 은총을 확실하게 누려야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보조 바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펑크 났다고 길가에 서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겁니다. 

그건 자동차 운전을 할 줄 안다고 말을 할 만한 진정한 실력이 아니라는 겁니다. 

전문적으로 잘 고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 이미 갖춰진 보조 바퀴 정도는 교체할 줄 아는 실력이 되라는 겁니다. 

좀 더 나아가서 이제 미리미리 바퀴의 상태는 체크할 줄 아는 자세까지 갖추라는 겁니다. 

운행을 시작하기 전에 최소한 바퀴의 상태를 한 번 확인해보고 

운전대를 잡을 줄 아는 운전자가 되라는 겁니다.



미리미리 바퀴를 체크해 보는 것이 바로 오늘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고 하는 겁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뭘 더 알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아는 만큼 함께 움직이자고 하는 겁니다. 

신앙적으로 점점 더 철이 들어가자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게으름을 부릴 핑계거리를 찾지 말고 

오히려 더 열심을 낼 동기를 찾자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이 끝이 아닙니다. 

오늘이 전부가 아닙니다. 

더 가야만 하는 겁니다. 

더 올라야만 하는 겁니다. 


그런데 다들 자기의 수준에서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남들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자랑삼고 있습니다. 

때문에 신앙이 늘 그 자리입니다. 

자기 한계 안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주관적으로 고생한 것을 자랑하는 군대생활이 아닙니다. 

단순히 춥고 배고팠던 시절의 눈물 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들이 출애굽을 해서 광야 40년 생활을 할 때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그런데 그 고생의 근본적인 원인과 이유가 뭡니까? 

다른 것 아닙니다.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수준이 너무 천박했다는 겁니다.


민 12:26-38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이 모세를 원망하게 한 사람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서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


그들의 최종적인 목적지인 가나안 땅을 들어가기 전에 보냈던 

열 두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원망한 것입니다. 

사실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그들이 환호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때는 염려와 걱정과 근심이 가장 컸던 때입니다.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고하는 열 명의 정탐꾼들의 이야기에 동요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잘못한 것은 

그들이 정당하게 하나님께 따져 물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마저 포기해버린 것입니다.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떻게 따져 물을 수 있었습니까? 

아니 어떤 것을 근거로 해서 열 정탐꾼들의 보고에 대해서 하나님께 따져 물을 수 있었습니까?


레 20:24 “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내가 그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다른 것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해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바로 그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붙드는 겁니다. 

과거의 행적을 붙드는 것이 아니고, 

옛날 행했던 신앙생활의 흔적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겁니다. 


때문에 기도는 늘 현재 진행형입니다. 

일정 기간 해보다가 그만 두는 요식 행위가 아니라 

그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믿음입니다.


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여기서 핵심은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미개한 종족들이 장작불을 피워놓고 

밤새 노래 부르고 떠들고 노는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의 은총을 붙들고 견디고 이기는 믿음의 삶입니다. 

비록 오늘 당장 내 눈앞에 직접 보이는 것이 없고, 

나타나는 것이 없고, 

이루어지는 것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인도하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기뻐할 수밖에 없는 일을 허락하실 것이고, 

무슨 이야기이든지 다 들으실 것이고,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 안에서 누리는 것이 있게 해주신다는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라는 단어가 더 특별한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의 연약함과 어리석음과 부족함이 

바로 그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를 놓치고 살 때가 많은 겁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무릎 꿇고 기도를 합니다. 

이론을 통한 지식만의 믿음이 아니라 

삶의 현실을 통해서 나타나고 드러나는 실제의 믿음이 되도록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신 관심을 24시간 365일 변함이 없으십니다. 

때문에 언제나 우리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과거의 어떤 날 생각하면서 

오늘은 한숨만 짓고 사는 삶이 아닌지 돌아보고, 

오늘도 나를 굳세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관심을 기억하면서 

더 뜨겁게 하나님 앞에 다가서고 사는 

언제든지 변함이 없는 신실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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