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13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사람들은 학교에서 수년 간 배운 것이 실제 사회에 나와서는 거의 쓸모없는 것으로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언제나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실제의 내용은 잘 모르면서도 목소리만 크면 이기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자동차 운전을 할 때가 그렇습니다.
분명하게 어떤 차가 우선적으로 진입을 할 권리가 있는지 법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무조건 밀고 들어오는 차가 언제나 우선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법이 어떻든지, 이론이 어떻든지는 관계가 없는 삶이 우리 가까이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앙생활도 목소리로만 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이론서인 성경은 덮어놓고
우선 내 의지, 내 노력, 내 열심을 무장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까지도 세상의 질서와 세상의 가치를 따라서 하는 겁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이론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이론이 실제와 다른 이론이 아니라
우리 삶을 드려서 적용하고 실천하고 사는 구체적인 이론이 되어야만 합니다.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이 되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삶이 너희의 영광이 된다고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혀 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영광이 됩니까?
12절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우리의 삶은 분명한 진리를 근거로 해서 달려갈 방향을 정하고 가기 때문입니다.
어떤 진리입니까?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 진리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진리의 믿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실제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이론적인 내용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받기로, 화목하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것만으로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용서받고 화목 하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오는 일에 담대한 것입니다.
주저주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의 형편과 처지를 살펴주는 자녀의 마음이 아름답지만
그렇더라도 부모 앞에는 좀 더 당당하게 손을 내밀 필요가 있습니다.
때문에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갖는 거룩한 특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에 있어서 가릴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인간적인 판단과 생각을 가지고 주눅 들 이유가 없습니다.
이론과 실제가 하나입니다.
기도하면 주시는 겁니다.
기도해서 받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건은 우리의 인간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원하는 대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원하는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실제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아직도 세상적인 이론으로 여기고 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서지 못한 채 인간적인 해결책을 찾고 삽니다.
그냥 인간적인 환경과 형편 속에 빠져서 허우적대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이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를
제대로 모르는 불신앙의 산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는 그 구체적인 대상이 있고,
또 그 대상을 제대로 알아가는 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그 대상이 누구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기로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전혀 변함이 없으시고, 흔들림이 없으신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론과 실제가 조금도 다르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전부를 다 받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꾸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에서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성과 노력과 애씀으로 하나님 앞에 가려고 합니다.
히10:1-4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우리의 노력은 그저 늘 죄만 드러나게 하고
죄만 기억나게 해서 결국 우리를 좌절하게 하고 넘어지게 만들 뿐입니다.
일시적으로는 죄를 덮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깨끗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늘 바쁘고 분주하고 허덕이는 불안한 삶을 살뿐입니다.
그때그때 기분을 따라서 다른 삶을 살뿐입니다.
진리의 삶은 기분과 감정을 따라서 사는 삶이 아닙니다.
전혀 흔들릴 수 없는 확고부동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삶입니다.
아무리 지금의 형편과 처지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더욱 영광이 되는 삶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사도 바울을 보면 느껴지는 것이 뭡니까?
한심한 겁니다.
답답한 겁니다.
왜 저렇게 살아야만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겁니다.
마음만 한 번 잘 먹으면 복음도 전하고 형편과 처지도 넉넉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왜 그렇게 답답하게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삶이 바로 사도 바울의 지금 삶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보세요.
오히려 더 당당합니다.
13절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오히려 사도 바울의 어려운 형편과 처지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영광이 된다는 표현이 어떤 의미이냐면
그것은 곧 에베소 교회 성도들도 사도 바울과 같은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살이에 대한 구질구질한 욕심으로 살지 말라는 겁니다.
삶의 기준을 분명하게 정하라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즐겁고,
무엇 때문에 행복하고,
무엇 때문에 감격스러운 삶인지 제대로 알고 붙들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고난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는 겁니다.
세상의 것을 내려놓고 살아감으로 인해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더 가까이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롬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삶의 기준입니다.
때문에 처하는 모든 형편과 환경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 내가 살면서 받은 불공평을 이해해야만 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 이웃들과의 마찰로 인해 상해 버린
내 자존심을 기꺼이 내던질 수 있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생각하면 내 모든 형편과 처지는 다 이해 가능하고 납득 가능한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꽃가마를 타는 새신부가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기꺼이 고난을 자처하고 나서는 희생의 사람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산다고 하는 것이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아는 겁니다.
때문에 오늘의 눈에 드러나고 나타나는 현실에 대해서 그다지 연연해하질 않습니다.
연연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사람처럼 사는 겁니다.
한마디로 보장과 대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을 가장 큰 영광과 기쁨으로 아는 사람이 곧 성도입니다.
대표적으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을 어긴 다니엘의 세 친구가 있습니다.
바벨론 왕의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해서 붙잡혀 온 그들이 큰소리를 치는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딱 한 마디로 끝내 버립니다.
단 3:14-18절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25절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일곱 배나 더 달구어진 풀무 불 속에 던져진 그들과 함께 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바울만 옥중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옥에 갇힌 것 자체가 그에게는 이미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찌 에베소 교회 성도들만 알아야만 합니까?
우리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만 고생하고,
우리만 수고하고,
우리만 희생하고,
우리만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억울하십니까?
답답하십니까?
자존심이 상하십니까?
별의별 소리를 다 들으십니까?
이미 그것으로 우리는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 잘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사람을 향해서 쏟지 마세요.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묵묵히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 영광스러운 차원의 신앙생활을 하셔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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