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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도의 목표 / 엡 3:14-19 (신 313쪽)

3:14-15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우리는 조금 전에 몇 가지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같이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서 공동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참 소중한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은 정말 귀한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는 기도도 참 훌륭하고 값지고 아름답지만 

우리 모두가 같이 모여서 기도하는 것은 이미 이 자체로서 바른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혹시 기도를 혼자서 하는 것보다 둘이 하는 것이 

더 능력이 있다는 식의 오해를 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더 많이 모이면 그만큼 영적인 파워와 힘이 넘쳐서 

하나님께 더 많은, 그리고 더 빠른 응답을 받는다고 생각하시지는 않는지 궁금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함께 기도하는 사람의 숫자가 많아졌다고 해서 

그 기도가 더 뜨겁고, 

더 능력 있고, 

더 파워풀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물론 함께 기도하는 우리는 사실 더 신이 나기는 합니다. 

같이 기도를 해주고 있는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이 

목사인 저를 더 들뜨게 하고, 행복하게 해주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기도의 응답이 빠르게 되고, 

능력 있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선 이해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만약에 사람이 많이 모여서 기도를 해야만 

더 뜨겁고, 더 풍성하고, 더 응답이 빠르다면 

우리 중 거의 대부분은 함께 기도하지 않는 죄를 짓고 사는 겁니다. 


그렇죠?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시는 음성을 들으실 겁니다.



사실 오늘부터 몇 주 동안 본문은 계속해서 3장 14절부터 19절까지입니다. 

불과 여섯 절 밖에 되지 않는 이 내용 속에서 우리는 

앞으로 기도에 관한 많은 보석들을 건져 낼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기도의 개념과 이해와는 조금 다른 내용도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성경의 말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원론적인 말씀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사실 본문의 내용에 관한 전반적인, 

그러면서도 개론적인 이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때문에 오늘 제목이 뜬금없이 “기도의 목표” 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목표가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도 목표가 다 있습니다. 

교회도 목표가 있습니다. 

“세상을 품고 하늘을 향하여” 가 우리 나무목교회의 목표입니다. 

추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이것은 엄청나게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세상을 품되 어떤 마음으로 품어야 하느냐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서 가야만 합니다. 

하늘을 향해서 갈 때 내 마음대로 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가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또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 목표를 제대로 찾을 수 있어야만 일정 수준 이상의 성도가 되는 겁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막 믿기 시작한 성도나 또는 아예 믿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의 목표가 제대로 서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언제나 자기의 것과 자기 주변의 것을 

자기 맘대로 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 외에 다른 기도가 없습니다. 

기도를 하는 기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목표 또한 자기 밖에 없습니다. 


사실 또 다들 그렇게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정말 심각한 것은 

그런 태도와 목표가 거의 모든 성도들의 평생을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십년을 믿었건 이십년을 믿었건, 

아니 대를 이어서 믿었더라도 기도의 제목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기도가 육적인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드리는 기도의 제목을 한 번 보세요. 

그리고 우리들의 기도제목과 비교해보세요. 

멀리 갈 것 없이 우리가 오늘 드린 공동의 기도제목과 볼 때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이 드리는 기도의 목표가 더 수준이 높지 않습니까? 

기도제목 전부가 다 영적인 것입니다. 

사실 옥에 갇힌 선교사의 기도제목이 어떤 것일까요? 

자기 자신이 옥에 갇혔다고 한다면 기도제목이 어떨지 한 번 생각해보세요.


너희가 돈을 많이 벌어서 선교 사업에 풍성하기를 원한다.

자녀들이 잘 되어서 나 같은 선교사가 많이 나오길 원한다.

이 옥 안에서도 평안하게 지낼 수 있는 여건이 되길 원한다.

먹을 것, 입을 것에 염려와 걱정이 없기를 바란다.

더위와 추위를 이길 수 있도록 해주기를 원한다.

너희가 힘을 합해서 옥에 갇힌 나를 끌어내 주길 원한다.

재판장과 황제의 마음을 흔들어서 내 사형선고가 취소되길 원한다.


다 이런 것일 겁니다. 

물론 좀 더 수준이 높아서 아니신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 성도들이 우리 나무목교회에 많기를 바랍니다. 

최소한 수요일 저녁 기도회에 나오는 수준 정도라면 그 정도는 될 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 목표는 그것이 영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겁니다. 

전부다 영적인 겁니다.


16-19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 것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 조금의 관심도 없습니다. 

오로지 영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만 깊은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이런 점에 대해서 한사코 거부하고 무시하고 외면한다고 하는 겁니다. 

심지어는 물질적인 것을 가지고 영적인 것을 덮어버리고 가려 버리려고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이라는 의미는 도대체 뭘 말씀하는 것입니까? 

사실 우리는 영적인 것에 대한 오해가 아주 심각하다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이라고 하면 

뭔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을 뛰어넘는 엄청난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물론 영적인 것도 분명한 실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내 마음껏 살아갈 수 있도록 

내 마음대로 조절하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또한 세상의 것을 갖지 못하는 대신 

그것으로 대체해서 살아가도록 주신 능력도 아닙니다.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성경에는 영적인 것에 대한 언급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 몇 가지를 살펴보면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고후 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원하시는 뜻대로 서는 삶을 말씀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든지 

좀 더 물질적으로 잘 사는 어떤 노하우나 비법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물질적으로 어떠하든지 여부에 관계없이 

오로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 가치관, 생각이 바로 영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 눈에 보이는 오늘 세상에서 잘 사는 길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잘 사는 길을 택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겁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오늘 자기가 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 인해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 당당하게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라고 권면하는 겁니다. 

자기의 인간적인 형편과 조건에 절대 굴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강조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도 바울은 자기를 옥에서 건져 내 달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자기가 처한 현실에 대해서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갑니다.



영적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그런 겁니다. 

내 오늘 처한 현실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줄 아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영적으로 사는 삶의 가장 큰 특징은 

비록 오늘이라고 하는 현실의 한계 안에서 살지만 

그보다는 눈에 아직 보이지 않는 먼 미래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미래에 이루어질, 

그러나 아직 오늘의 현실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영적인 삶을 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바로 오늘 우리가 걸어가야만 하는 삶입니다. 

물론 현실의 삶을 100% 무시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 눈에도 오늘의 현실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즐거움과 기쁨보다는 어려움과 슬픔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현실의 삶이 어려움뿐인 것을 인정하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살아가도록 기도하는 겁니다. 

이것은 현실의 고통과 아픔을 잊기 위한 마취제나 안정제를 먹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실체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 감당하고 가자는 겁니다. 


성경의 말씀은 온통 다 그렇습니다.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여 하심이라”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기도의 목표가 달라져야 합니다.

‘이런저런 것을 이렇게 해주셔야만 살겠습니다.’가 아니라 

‘이런저런 것이 없더라도 주 뜻대로 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우리 나무목교회의 성도들이 

이 정도의 실력을 갖춘 그리스도인들이 되셔서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변함없는 태도로 

예수 믿는 사람다운 삶을 살아 누린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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