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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교회로 말미암아 / 엡 3:10-11 (신 313쪽)

3:10-11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하나님은 복음을 비밀로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는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라고 하는 비밀스러운 복음을 맡아 전하는 공동체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럼 교회 공동체가 정말로 해야만 하는 일은 뭡니까? 

오늘 본문에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10절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교회가 이제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통치자와 권세는 누구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천사들을 말씀하는 겁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이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배울 정도가 되는 겁니다. 

교회의 권위와 능력이 천사들조차도 배워야만 할 만큼이 되는 겁니다. 


천사들이 사실 어떤 존재들입니까? 

그들은 세상을 만들기 이전부터 하나님과 이미 함께 살고 있었던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과연 모르는 것이 있었을까요? 

천사도 사실 영물입니다. 

영의 존재라고 하는 겁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대하여, 

또는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에 대하여 모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통해서 저들이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아야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한 각종 지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지혜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천사들조차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구원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비밀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계획을 바로 교회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통해서 천사들에게 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하나님께서 교회에 대해서 가지신 사랑과 은혜가 아주 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뭡니까? 

정작 교회인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전혀 충만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감격스럽지 않습니다. 

기쁘지 않습니다. 

교회만 생각하면 오히려 머리가 아프고 답답해질 때가 더 많습니다. 


집에 있거나 세상 친구들 만나서 놀 때는 편안하고 좋은데 

교회를 생각하고 바라보면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아프고 힘이 듭니다.

뭔가 시원하게 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천사들도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배운다고 하는데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점점 더 완악해져 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뭔가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교회의 관심이 하나님의 지혜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지혜에 관심이 있어야만 

그 지혜를 드러내고 나타내고 자랑할 텐데 전혀 그렇지 못한 겁니다. 


교회가 세상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물론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관심의 내용과 방향이 문제입니다. 


교회가 관심하고 있는 내용이 세상의 것 자체에 있습니다. 

물질에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가 자랑하는 것이 세상의 것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것으로 무장하고 있으니까 세상에 대해서 뭔가 자랑할 것이 없는 겁니다. 


교회가 뭡니까? 

세상과 구별된,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세상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과 같습니다.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자랑하는 것이 그렇고 

내 놓는 것이 그렇고, 

주장하고 목표하는 것이 언제나 그렇습니다.



교회가 기준을 삼고, 자랑을 삼아야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이 철저하게 무시한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조롱을 당하고 멸시 천대를 다 뒤집어 쓴 것입니다. 


이 말은 교회가 정당하게 주장하는 것과 성경적인 목표로 하는 것은 

세상에서는 언제나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서나 오늘에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달라도 보통 다른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멸시 천대를 당하는 이유가 

예수님의 경우와 너무 다르다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을 

세상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았다고 욕을 먹고 조롱을 당했습니다. 


그 아주 극단적인 모습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마 27:25-37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저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조롱한 이유는 딱 한 가지였습니다. 

저들이 필요로 하는 세상의 것을 예수님께서 채워주지 않았다고 하는 겁니다. 

저들의 목표는 오로지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의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남은 옷이라도 벗겨 가는 겁니다. 

끝까지 예수님의 것을 빼앗아 가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머리에 붙였습니다. 

자기들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전혀 채워주지 못한 무능력한 왕이라고 조롱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원하는 것은 과연 유대인들과 뭐가 다르냐고 하는 겁니다. 

저들과 다른 것이 뭐가 있느냐는 겁니다. 

유대인들을 미처 알지 못한, 

또 지금 세상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느냐는 겁니다. 


천사도 모르는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원하는 것도 모두 세상이 가지길 원하는 그것 밖에 없지 않느냐는 겁니다. 

때문에 세상이 지금 우리를 욕하는 겁니다. 

예수님께는 세상의 것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욕을 한 반면에 

지금 우리더러는 너희들은 우리와 다를 바가 전혀 없지 않느냐고 욕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욕을 먹는 그것이 과연 성경적으로 당연한 겁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살려고 해서 먹게 되는 욕은 예수님의 경우와 같느냐는 겁니다. 

결코 같지 않다는 것에 우리의 한심함이 있는 겁니다. 

아니 정반대의 경우로 인해서 욕을 먹고 있느니까 이게 답답하다는 겁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그 정도가 매우 심한 사람은 

자기가 지금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세상의 것으로 

자기 믿음의 크기와 수준을 당당하게 자랑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것을 내놓지 않아서 조롱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셨는데 

우리는 지금 세상의 것을 드러내놓고 자랑하면서 그것으로 우리 믿음의 크기와 실력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이 없는 겁니다. 

교회로 말미암아, 

우리로 말미암아, 

나로 말미암아 천사까지도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되는 수준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럴 가능성조차도 보이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지금 교회가 세상에서 힘을 가지는 것이 자랑이 되어 버렸습니다. 

세속의 권력을 가지는 것이 성도의 목표가 되어 버렸습니다. 

왕이 되려고 하고, 

총리가 되려고 하고, 

가진 자가 되려고 합니다. 

몽땅 다 그 쪽으로 가버렸습니다. 


나는 아직 안 갔다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오늘 들고 나온 기도의 제목이 다 어떤 것들이십니까? 

그 중에 내가 지금 손해보고 살겠다고 하는 내용은 뭐가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잃어버린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바로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평안입니다.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때문에 성도의 눈빛이 사나워져버렸습니다. 

성도에게 온화하고 따뜻하고 포근한 맛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평안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월요일에 큰아들하고 서울역 봉사를 갔다가 시장을 들렸습니다. 

그런데 구경하던 큰아들이 갑자기 그러는 겁니다. 

“저기 저 아줌마는 얼굴에 사기꾼이라고 써 있어요.” 

시장 골목 한 가운데에 좌판을 열어놓고 사설로 환전을 해주는 아주머니를 보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얼굴을 보니까 그냥 돈독이라고만 써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얼굴에 화장을 진하게 했는데 평안은 없고 오히려 차가운 기색만 가득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예수 믿는 성도가 누려야만 하는 평안이 뭡니까? 

다른 것 없습니다. 

그냥 내가 다 지는 겁니다. 

남의 것을 강제로라도 차지하고 누렸던 기쁨을 포기한 것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내 것을 주고도 마음이 조마조마한 것입니다.


저녁에도 굳이 저한테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온 친구가 있습니다. 

그냥 저는 편하게 냉면 먹자고 했습니다. 

저는 물론 아주 편합니다. 

그런데 대접을 하는 친구가 불편합니다. 

아니 자기 돈 내고 밥을 사주면서도 불편한 겁니다. 

그런데 그 불편의 마음이 평안입니다. 

목사님한테 밥 한 그릇 사드렸다고 하는 정성의 마음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좀 더 맛있는 것을, 

좀 더 좋은 것을 대접하려고 하니까 불편한 겁니다. 


이 불편의 마음을 세상 속에서 기꺼이 가져야만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잘 하려고 하니까 세상에서는 좀 더 불편해지는 겁니다. 

힘든 겁니다. 

주머니가 비는 겁니다. 

남들보다 뒤 떨어지고 처집니다. 


그래도 느끼게 되고 깨닫게 되는 나만의 평안함이 있습니다. 

그 지혜를 붙잡아야 하는 겁니다. 

그 지혜를 누려야만 하는 겁니다. 

그것은 천사도 누리지 못하는 지혜입니다. 


성도가 누려야 하고, 교회가 누려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겁니다.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가치를 내던져서 누리는 

이 놀라운 지혜와 평안을 다 누리실 수 있는 천사도 부러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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