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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의 사람을 보는 눈/삼상16:6~13/2001년 7월 15일

하나님의 사람을 보는 눈

사무엘상16:6~13

2001년 7월 15일 최일환 목사 주일 낮예배

16: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16:8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의 앞을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6:9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6:10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16:11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16:12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16:13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설교:

언젠가 독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함부르크의 어느 호텔에서 새로 채용된 한 직원이 "접객주임"직분을 받아 한창 열을 올려 열심히 청소를 시키며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원 한가운데서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깨끗한 고급 벤치에 인상도 그리 안 좋고, 옷차림도 지저분한, 한 늙은 남자가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 그 접객주임은 이런 훌륭한 고급 호텔의 분위기가 행여나 저런 누추한 사람의  모습 때문에 깨어질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슬며시 그 사람 뒤로 돌아가서 “여보세요. 미안하지만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즉시 이곳을 떠나 주십시오”라고 쓰여진 쪽지를 넘겨주고는 그를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이번에는 그 접객주임에게 다음과 같은 쪽지가 전달되었습니다.“여보시오. 미안하지만 남의 귀에 소문나지 않게 오늘 즉시 이 호텔에서 나가 주십시오. 남루한 옷차림의 주인공 백”

 

깜짝 놀란 이 접객주임이 그 남루한 옷차림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하고 알아 보았읍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이 호텔의 경영주 "스티너스" 선생이었습니다. 그는 큰 회사를 12개나 가지고 있으면서 호텔은 그냥 부업 삼아 경영하고 있던 굴지의 대재벌이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만 보고 판단했던 이 접객주임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 호텔에서 해고되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가 인생 성공의 중요한 비결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사십니까? 혹시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며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좀더 고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외모로만 보면 일생에 여러 번 큰 실수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큰 실수인지 아닌지도 모르기에 그럭저럭 살아왔지, 만약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알게 되면 아마도 미칠 지경일 것입니다.

 

재미있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터지기 몇 해 전, 오하이오 주의 큰 농장에 한 초라한 소년이 찾아와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마침 주인은 일손이 모자랄 때라 그 소년을 채용했습니다. 그런데 3년 뒤 이 머슴이 자기 사랑하는 딸과 사귀는 것을 알고는 노발대발하며 머슴이 주인을 넘본다며 그날로 당장 내쫓아 버렸습니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뒤 주인은 낡은 창고를 수리하다 옛날 그 소년의 짐을 발견하고 내용물을 살피던 중 소년의 이름이 제임스 A 가필드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현직 20대 미합중국 대통령과 동일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주인은 얼마나 후회를 많이 했겠습니까? 그 소년을 겉모습만 볼 것이 아니라 사람의 됨됨이를 보았다면 자기 딸은 대통령의 영부인이 되었을 것이고 자신은 대통령 사위를 두었을 것이 아닙니까?  또 만약 그가 그 짐을 열어보지 않았다면 평생 그 일을 알지도 못했고 후회하지도 않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외모로 사람을 판단할 일이 결코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사울을 버렸다"고 하시고는 이새의 아들 중에 하나를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라" 하십니다. 그 명령을 받은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들어가 이새의 아들들을 선을 봅니다. 제일 먼저 맡아들 엘리압을 보고 맘에 쏙 들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사람을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않다"고 하시며 "외모를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본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도 사람을 보는 첫 기준은 외모였던 것입니다. 사무엘 뿐만 아닙니다. 다윗의 아비 이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녀 가운데 왕으로 선택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막내 다윗만 들판에서 양을 지키게 하고 7명의 아들을 다 불러모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새도 다윗이 왕이 될 만하다고 생각조차 못한 것 같습니다. 결국 7명을 다 보았는데 없으니 사무엘이 "네 아들이 다 여기 있느냐" 묻습니다. 말째, 여덟 번째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데려 오라 하여 보니 그가 하나님의 택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사람을 보는 눈이 왜 사람이 보는 눈과 다를까요?

1)인간의 능력의 한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을 볼 수 있는데 사람은 속을 들여다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겉모습만 보려고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을 함부로 외모 가지고 평가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2)또 하나 인간은 현재만 보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내다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앞으로 어떤 사람이 어찌 될 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미래도 아십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보는 외모, 즉 생김새 미모, 재력, 사회적 지위, 그리고 학벌 이런 것만 보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인데 그것을 외모라고 한다면 중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는데 그 "중심"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인데 그 마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1.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보시는 사람의 중심, 마음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얼마나 믿고 의지하느냐? 하나님의 능력을 얼마나 의지하고 사느냐?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요, 그 사실을 생활 속에서 믿고 의지하느냐? 이것을 제일 중요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믿고 섬기면 하나님은 그를 얼마든지 존귀하고 위대하게 높이시고 쓰시는 것입니다.

 

오늘 선택된 다윗을 보세요. 그가 17장에서 골리앗과 전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소년 다윗이 하는 말을 보면 세상말로 기가 찹니다.

"삼상17:34절부터 보세요.

"34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17: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17: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 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17:37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참으로 대답합니다. 감히 누가 이런 간증을 할 수 있습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또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하면서 달려듭니다.

삼상17:45부터 보세요.  

"45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17: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이것이 다윗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전쟁터에서 갑자기 생긴 "똥뱃짱"이 아닙니다. 평상시 생활 속에서 체험하며 믿고 의지했던 것입니다.

34절 중반을 보면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를 택하셨고 그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에게 그런 믿음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실생활 속에서 의지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는 우리 속의 믿음의 성장을 위해 늘 힘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구원의 믿음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나 우리의 믿음의 성장은 우리의 힘씀과 노력에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믿음의 성숙을 위해 날마다 말씀을 듣고 그 들은 말씀을 생활 속에서 믿고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믿음은 놀랍게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은

2. 겸손과 순종을 말합니다.  

나님이 우리에게서 찾으시는 중심의 것은 겸손과 순종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매우 귀하게 여기시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겸손치 못하면 쓰시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겸손치 못하면 하나님이 그를 연단시켜 쓰십니다. 그 연단과 훈련이 때로는 40년이 걸릴 수도 있고 80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어떻튼 하나님은 겸손의 그릇이 갖추어진 사람을 쓰십니다. 사울을 버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처음 왕이 될 때는 그렇게 겸손하던 그가 왕이 되면서 변하여 교만하기 그지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의 주인공 다윗 왕은 시종일관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약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문제는 성도들이 누구나 자신은 어느 정도는 겸손한 사람이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교만치 않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겸손과 교만을 측정 할 수 있을까요? 그 척도는 순종과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 종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는가? 얼마나 불순종하는가? 그것이 기준입니다. 겸손하면 어떤 말씀이 주어져도 순종하는데 교만하면 말씀이 주어졌을 때 이익이 되면 순종하고 이익이 안되면 불순종하게 됩니다. 이익이 될 때 순종하는 것을 겸손이라 생각하면 잘못 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손해가 되는 명령을 받았을 때, 도저히 순종이 어려운 명령을 받았을 때 그럴지라도 순종하는 그것이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뿐 아니라 아브라함도, 모세도, 요셉도, 사무엘도, 엘리야도, 엘리사도, 모두 겸손의 종들입니다. 무엇을 봐서 알 수 있나요? 순종을 보면 앎니다. 그들의 그 순종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쳐 낮추는 겸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높이시는 것입니다. 벧전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은   

3. 사명을 감당할 마음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소명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을 맡기실 때 그 일을 얼마나 성실하게 얼마나 확신있게 감당 할 것인가를 보십니다. 그것이 바로 소명감입니다.

다윗이 양떼를 지킵니다. 형들이 다 왕이 되겠다고 양들을 버리고 갔습니다. 그 양들을 누가 돌봅니까? 다윗입니다. 그가 막내이기 때문에 양을 어쩔 수 없이 본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의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적당히 대충 감당하려는 사람은 큰일을 하려고 생각도 마시기 바랍니다. 적은일에 충성된 자는 큰일에도 충성되다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적은 일에 불성실한데 어떻게 크게 쓰시겠습니까?  절대로 크게 쓰시지 않습니다.

 

전설에 내려오는 이야깁니다. 지혜의 임금으로 알려진 솔로몬이 하루는 성전 건축현장을 방문하고 일꾼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왜 당신은 여기서 일을 합니까?" 한 일꾼이 대답을 했습니다. "아 그야 뭐 배운 것도 없고 이럭저럭 살아가려니 죽지 못해서 하고있지요." 얼마쯤 가다가 다른 일꾼에게 똑같이 물었다. 그 일꾼은 "배운 도둑질이 일하는 것뿐이니 놀고먹을 수가 있나요, 그럭저럭 한 세월 보내는 것이죠" 왕은 얼마쯤 가다가 해진 옷을 입고 일하는 청년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왜 여기서 일을 하느냐구요? 정말 난 신이 납니다. 자,보세요 나는 지금 하늘나라의 영광을 이 땅위에 드러내는 성전을 바로 이 손으로 돌을 쌓고 있지 않나요? 이 손으로 쌓는 벽돌 한 장이 이 위대한 성전의 작디작은 부분일지언정 큰 일을 이룬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결국 솔로몬 왕은 그 사람에게 더 큰일을 맡겼답니다.

소명을 가지고 일하는 자 와 그렇지 못한 자의 엄청난 차이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교회에서 맡은 일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이라 믿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거기에 성실이 필요하고 분명한 사명감이 필요합니다.

 

그 사명감은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을까요?

주님을 사랑하는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면 그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치 못하는 사람은 적당히 일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사명감이 있느냐? 네가 내 양을 칠 자격이 있느냐? 물어보지 않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보신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왜 물으실까요? 바로 사명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 베드로에게 더 이상 다른 것은 때지지도 않고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어떻습니까?

믿음과 겸손, 그리고 사명감을 보고 사람을 바라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변 사람이 무엇으로 여러분을 평가해 주기를 바랍니까? 겉모습입니까? 중심입니까? 하나님은 오직 "중심"을 보십니다.   

기도합시다.

출처 :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글쓴이 : 최일환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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