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죽 한 그릇에
창세기25:27~34
2001년 7월 8일 주일 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25: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고로 들 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25:28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5: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25: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25:31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25:32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25:33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25: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설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사모합니다. 또 실상 복을 사모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운 정도로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어떤 복을 받았나요?
예수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福도 주셨고 그 복을 통해 영생을 얻는 복도 주셨습니다. 그런 것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기도의 응답의 복도 주셨고 건강의 복도 주셨습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맥추 감사절로 하나님 앞에 모여 예배 드리는 것도 놀라운 하나님의 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많은 복을 복으로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미 복을 주셨는데 그것은 복으로 여기지 않고 겉보기에 복인 것처럼 보이는 가짜 복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우리를 보실 때 얼마나 한심 하실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오늘 성도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중한 복을 온전히 깨닫고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려면 정말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진짜 가치 있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그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두 사람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오늘 이 시대를 사는 두 종류의 사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복을 참복으로 여기지 못한 사람 "에서"와
겉으로 보기에 복이 아닌 것 같은 것을 참복으로 여겨 그 복을 소유하는 사람 "야곱"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들 사이에 長子의 名分이 매매됩니다. 그 장자의 명분이 팥죽 한 그릇에 세상에서 가장 어처구니가 없는 매매가 이루어집니다.
고대의 족장시대에 있어서의 장자의 명분(특권)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어떤 特權이 있었을까요?
1. 가정의 우두머리의 특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할 수 있는 통솔권이 주어졌습니다. 가정사의 최종 결정권자가 장자에게 주어졌습니다. 대하21:3
과거 우리 나라도 장자를 소중히 여기고 장손의 특권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지금도 내노라하는 가문의 장손은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합니다. 문중의 재산만 관리하려 해도 엄청나답니다.
장자는
2. 유산의 두 몫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신21:15~17)
여러 형제들 중에 最高의 어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을 때 다른 형제의 두 몫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장자의 명분은 경제적 특혜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3. 한 가정의 제사장의 직분 수행하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관계에서 영적 축복의 상속자로 장자에게 제사장의 특권을 부여했습니다. 그러기에 장자는 영적인 戶主입니다.
그런 엄청난 특권을 왜 에서는 경흘히 여겼는가?
1. 당장의 육체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에서는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며 사냥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아무 것도 잡지 못하고 허탕을 치고 돌아올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루종일 사냥을 한 에서는 집으로 돌아올 때 너무도 배가 고팠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도 경험 해 보셨을 것입니다. 일을 할 때 배가 고프면 그처럼 참기 힘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있는데 안 먹는 것은 그래도 참을 수 있는데 먹고는 싶은데 먹을 것이 없으면 얼마나 견디기 힘이 듭니까? 눈이 휑하게 들어가고 배는 꼬르륵 소리를 내고 손발은 후들후들 떨립니다. 에서가 그런 피곤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마침 야곱이 팥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야곱이 그 시간을 맞추고 기다렸을지도 모릅니다.
에서가 팥죽을 보니 미칠 지경입니다. 형이기에 동생에게 팥죽을 좀 달라고 합니다. 그때 동생인 야곱은 얼른 팥죽 한 그릇을 주는 것이 도리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냥 주지 않습니다.
벼르고 별렀던 장자의 명분을 팔라는 것입니다. 이때 <에서>가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면 "야 이놈아! 이 팥죽 한 그릇 주면서 그 장자의 명분을 달라구? 예이 이놈!"하고 물러섰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육체적 욕구의 지배를 받고 사는 육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선 당장 육체적 욕구를 채우는 것이 제일 시급한 일로 여겼습니다. 결국 그토록 소중한 장자의 명분을 헌신짝처럼 내 버립니다.
에서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肉體 本能 우선주의 가치관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우선 육체적 욕구를 채우는 일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즘도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먹고 죽은 귀신은 땟깔도 좋다"는 말을 써가면서 인생사 중에 먹는 일을 최우선시 하며 삽니다.
우리 주변에 보세요. 돈벌이가 되는 일은 전부 육체적 본능을 채우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제가 수련회 답사 차 강원도를 가다가 기가 막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길거리 빽빽하게 들어찬 것들이 "러브호텔, 갖가지 음식점, 오락시설" 전부 육체적 욕구를 채우는 일에 쓰이는 시설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요즘 백화점이 쎄일을 한다며 보여주는 외국브랜드 상품들의 가격대를 보니 구두 한 컬레에 70만원 120만원도 있고 수영복 팬티 하나에 50만원에서 200만원까지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체 욕구를 채우는 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고 쓰면서 하나님을 위해, 불우한 이웃을 위해, 교회를 위해 쓰는 것은 전혀 가치 없는 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혹시 우리가 현대판 "에서"가 아닌가를 깊이 살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왜 에서가 그 짓을 했을까요?
2.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말합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합니다. 사실 그럴듯합니다. 그때 당시야 눈에 보이지 않는 장자의 명분, 그런 것을 판다고 넘어가는 것이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보지 못한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망령된 자라고 평합니다.
히브리서12:16 에서는 "음행하는 자와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하면서 에서의 짓을 망령된 짓이라고 평가했던 것입니다.
왜요? 에서의 결정적 문제는 눈에 보이는 것 제일주의입니다. 눈에 안보이면 무가치 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장의 가치가 최고의 가치인 것입니다. 그러니 정신나간 사람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은 전도서2:11처럼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하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價値觀을 갖고 살면 늘 세상에 속고 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가치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한 것임을 알려면 육에 속한 사람에서 벗어나야만 가능합니다.
올림픽에 사용되는 金메달은 은에 6g의 금을 도금한 것으로 실제 가치는 30만원 가량이며 은메달은 92.5%이상의 순은으로 가격은 15만원 정도, 동메달은 94%이상의 동으로 값은 3만원 선이 된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선수들이 이러한 가치를 위해 피눈물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예로움이 우승자의 앞에는 놓여 있는 것입니다. 선수들은 그것을 위해 피나는 대가를 지불합니다.
永生이라는 것, 天國이라는 것도 눈에 안보입니다.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당장에는 유익이 없어 보여도 그래도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믿음이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려면 영의 世界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거듭나야 합니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길이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우리는 거듭날 수 없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우리는 영적 능력을 얻을 수도, 볼 수도, 맛볼 수도 없습니다.
예수를 모르는데 어떻게 하늘나라를 알 것입니까?
겉만 보고 가치를 판단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어찌 알 것이며 그 가치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야곱은 왜 그토록 간사하다 할 정도로 장자의 명분을 탐냈을까요?
1. 장자의 명분에 하나님의 복이 연결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명분은 단순히 장자의 특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이삭의 복을 이어 받는 특권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결국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야곱이 이 복을 사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치사하다 할 정도로 형의 장자의 명분을 얻으려 했던 것입니다.
2. 축복을 사모하는 마음이 넘쳤기 때문입니다.
장자명분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수단입니다. 야곱은 어느 때나 복을 받으려는 일에는 남에게 뒤지지 않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심지어 그는 동생으로 태어나는 것이 억울해서인지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그가 장자의 명분을 산 것은 그만큼 복을 사모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복을 받기 위해 아버지를 속이고 저주받을 각오까지 합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에게도 그처럼 복을 사모하는 마음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복을 받는 일에는 뒤지지 않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누가 장자의 명분을 갖고 사는 자인가? 장남으로 태어난 사람인가? 오늘날도 야곱처럼 형의 장자의 명분을 사야만 하는 것인가?
누가 장자의 명분을 갖고 있는 것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가 장자의 명분이 있는 자입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저와 여러분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이 장자의 명분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판 에서 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1.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를 소중히 여기고 가까이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요, 거기서 모든 복이 흘러 넘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몸된 교회에 붙어 있어야만 비로서 존재가치가 있고 생존이 가능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를 멀리하는 것은 엄청난 복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리는 것입니다. 또 교회가 세워지는 일에 앞장서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집 옆에 교회가 들어온다고 진정을 넣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생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나의 영적 교제입니다. 예배를 통해 모든 것이 이루어 집니다. 예배를 통해 모든 행동을 결정해야 하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예배를 통해 영양분을 공급받고 자신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배는 장자 된 자의 의무요, 특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서울의 어느 교회 목사님에게 회사를 경영하는 성도가 찾아와 말하기를 "목사님은 우리 회사의 회장님이십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회사 운영 방침이 정해지고 설교를 듣는 중에 중요한 업무를 결정하고 설교를 듣는 중에 아이디어가 떠올라 새로운 일을 하게 됩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3.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장자의 명분은 성령을 통해 유지되고 성령을 통해 열매 맺고 성령을 통해 사용되어집니다. 그러기에 내 속에서 役事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소중히 여겨야하며 그 성령이 주시는 갖가지 은사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 성령의 은총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이것을 잃으면 모든 복을 잃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를 우리는 어리석은 자라 합니다. 그러나 그 에서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땅을 치고 통곡할 후회를 하고 살면서도 알지 못하다가 먼 훗날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시간 이후로 여러분은 야곱으로 살렵니까? 에서로 살렵니까?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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