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야할 길(막10:32~45)
인생을 길이라고 한다면 내가 가는 길이 나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이 돈을 버는 길이라면 내 인생이 그렇게 되는 것이고, 내가 가는 길이 출세를 위한 길이라면 내 인생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저마다 가는 길이 자기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우리가 가는 길은 어떤 길이며, 우리는 왜 그 길을 가는 것입니까? 이 물음에 대해서 확실한 대답을 해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모범 대답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그 길을 가는 것은 천국을 가기 위함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국을 가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간다. 그러면 그 십자가의 길이란 어떤 길일까요? 천국을 향해 가고 있는 지금 나의 이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지요?
누구나 처음에 시작하는 길이 한 길입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보면 또 다른 길들을 만나게 됩니다. 길이 하나라면 그 길로만 가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보면 항상 그 길이 한 길로 계속 되는 것이 아니고, 삼거리도 만나고, 사거리도 만나고, 또 어떤 곳은 오거리도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어떤 길을 갈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가기 쉬운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가는 그 길로 함께 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길을 선택을 할 때에는 그 길을 선택하는 이유와 기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선택하고 그 길로 가는 것이죠. 물론 선택해야 할 기준도 이유도 없다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가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길을 선택할 때에 분명한 이유와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성도가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가는 그런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가야할 길을 가기 위해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선택의 이유가 십자가입니다. 내가 가야할 길이 십자가의 길이기에 십자가가 선택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길을 간다고 하지만 그 길이 십자가라는 이유 때문에 선택한 길일까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사실 이 길을 가겠다는 우리의 다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가 선택의 이유가 되지 않을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 까지 고린도전서 13장을 보았습니다. 고전13;9,10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다고 하지만 그 이유를 들어보면 부분적인 것일 때가 많습니다. 기도를 하는 이유도 부분적이고, 찬송하는 이유도 부분적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아요. 그 복이라는 것이 솔직하게 말하면 경제적인 부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까? 기도를 하는 것도 부분적입니다. 어떤 문제로 인하여 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문제가 사업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고, 가정일 수도 있고, 직장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런 것들은 부분적인 것입니다. 길을 가면서 한 때 만나는 일이지, 그것이 길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온전한 것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무슨 얘기냐면 나의 가야할 길에 대한 것이 되길 원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저는 예수 믿어 복을 받고 싶어요. 하나님 저의 이런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로 우리의 신앙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생, 내가 가야할 길에 대한 해답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 인생이 이런 인생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가야할 인생길이 이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보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옆 사람과 축복합니다. “당신의 신앙이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인생의 해답이 되길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 인생의 해답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여지고 온전한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야할 길이 어떤 길입니까? 성도가 가야할 길이 어떤 길입니까? 보통 십자가의 길이라고 우리가 대답을 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 길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가신 길입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십자가”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고난의 상징으로 떠오를 것입니다. 십자가 하면 고난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몇 년 전에 보았던 “패션”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많이 흘렸고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하는 장면이 너무 리얼하게 촬영되었기 때문에 정말로 실제로 그런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번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 이렇게 내가 보고 은혜를 받는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야할 길이 아니라, 내가 보고 은혜를 받는 길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만 생각합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만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의 십자가를 보고 은혜를 받아라. 내가 십자가에서 흘린 그 피를 보고 은혜를 받아라. 이것이 나의 뜻이라.’고 하실까요? 예수님은 막8;34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내가 진 골고다의 십자가가 아니라, 너희가 져야 할 너희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나의 십자가를 보고 은혜를 받으라가 아니라, 너희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주님의 십자가를 보고 은혜를 받는 길을 넘어, 나도 주님처럼 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32~34을 함께 보겠습니다.
(막 10: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막 10: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막 10: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지금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를 보니까 그렇게 좋은 분위기가 아닙니다. 32절에 보니까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놀라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요? 놀람이라는 것은 예상 밖에 일이 일어날 때에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제자들의 놀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예상 밖에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 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 놀람과 두려움으로 맞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지금까지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하였고,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 거대한 물결을 거스를 사람이 갈릴리에는 없습니다. 이제 갈릴리는 예수님이 정복한 것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세상이 된 것이죠. 그런데 이 갈릴리를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적어도 제자들에게는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목에 힘주고 산 적이 없었는데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이제 조금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데, 그곳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갈릴리와는 다릅니다. 갈릴리는 가난하고 무지랭이들이 사는 곳이지만, 예루살렘은 날고 긴다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있고, 그리고 로마의 총독부가 있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갈릴리와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접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이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니 놀랍고 두렵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길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제자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길을 돌이키는 것은 예루살렘을 접수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제자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상황을 빨리 알아 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한 가지 요청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공을 하신다면 우리 형제를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이 얘기를 듣고 있던 나머지 제자들이 화를 내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이것은 다른 제자들도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야고보와 요한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제자들은 이 말을 들으면서도 예루살렘에서 성공하면 한 자리 분명히 차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고 저들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같은 길을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겉으로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분명히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똑같이 예루살렘으로 함께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길이 아닙니다.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은데 같은 길을 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도 지금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같은 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같은 길을 가려면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이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야 같은 길이죠. 다른 마음을 갖고 간다면 우리는 같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길을 가는 것은 모든 인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주러 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얻기 위해서 가지만, 예수님은 주기 위해서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이 믿음의 길이요,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 생명이 있다고 믿고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얻는 것이 생명의 길이 아니라, 주는 것이 생명의 길이라고 믿고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이라는 것을 알고 가십니까? 내가 가는 길은 주님이 가신 길이요, 그 길이 생명의 길이라고 믿고 가십니까? 내가 가는 길은 무엇을 더 차지하기 위해서 가는 길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서 내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주기 위해 가는 길이라고 믿고 이 길을 가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을 어떤 길이라고 생각하고 가는 것입니까? 야고보와 요한처럼 무엇인가 한 자리 차지하여 목에 한 번 힘을 주고 싶어서 이 길을 가는 것입니까? 우리는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의 길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어는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보면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맨 끝에 놓여있던 사랑의 종착역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해서 그 사람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준다’ 라고 말할 때 인간이 마지막에 내어줄 수 있는 것은 하나 남은 목숨입니다. 사랑을 향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내어놓아야 합니까? 내가 가진 것을 조금 떼어서 내어줄까요? 내 옷을 내어줄까요? 내 수고를 내어줄까요?’ 라는 질문에 십자가는 ‘너의 목숨까지 내어주라’고 하는 명료한 답변입니다. 그것은 결코 부인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이론으로 어떤 교리로 어떤 상상력으로 십자가를 치장하려고 하더라도 십자가의 본질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본질은 절대로 변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본질은 사랑이요, 마지막 남은 목숨을 사랑하기 위하여 내어 준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종착역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너의 목숨까지 내어 주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바로 이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십자가로 초청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 다릅니까? 다르지 않습니다. 그 이유도 그 목적도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와 내가 십자가를 지는 이유는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심같이 우리도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귀함은 누가 지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십자가 그 자체가 고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선택한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종착역이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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