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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랑은?(고전13:4~7)

사랑은?(고전13:4~7)

 

 

제가 홍수를 만난 적이 한 번 있습니다. 1987년 여름에 제가 개봉동 고가 밑에 살았었는데 그 때에 홍수를 만났습니다. 밤에 잠을 자다가 홍수를 만나서 이불까지 다 젖은 적이 있습니다. 홍수니까 사방 천지가 물입니다. 물 천지인데 물이 없습니다. 마실 물이 없고요, 씻을 물이 없는 것입니다. 물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물이 없으면 생명이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물이 오염되면 그 물로 인하여 죽기도 합니다. 사랑도 물과 같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이 오염되면 이 사랑 때문에 사람이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을 마감하는 13절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세 가지를 말씀하시면서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가장 귀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뿌리가 약하면 모든 것이 금방 상하거나 망가집니다. 집을 짓는데도 기초가 중요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도 기초가 중요합니다. 이 기초를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마지막에 한 비유를 들어서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를 설명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고 어리석은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런 일이 터지기 전에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창수가 나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나, 반석 위에 지은 집은 건재 하는 것입니다.

뿌리라는 것은 보이는 부분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것도 뿌리의 특징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보이는 사랑은 때로 악마의 달콤한 유혹일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도 중요하지만 반석으로서의 사랑, 뿌리로서 사랑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뿌리로서 사랑은 쉽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매로서의 사랑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속이 깊은 사람은 뿌리의 사랑에 감동을 받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양은 뿌리의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고, 염소는 열매의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양으로 비유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뿌리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염소들을 통하여 열매의 사랑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도 알 수 있습니다. 뿌리의 사랑은 그렇게 돋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양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5,6) 굶주린 자들에게 한 끼 식사를 대접하였고, 목마른 자들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하였고, 벗은 자들을 보면 자기가 안 입는 옷 한 벌 주었고, 병들은 사람이 있으면 한 번 찾아가 보았고, 옥에 갇힌 자들을 찾아가 저들의 벗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큰 돈 드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화려한 일들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러러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사랑의 뿌리가 튼튼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염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저들은 주님께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시자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라고 반문을 합니다. 저들이 이렇게 반문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들은 만약에 자기들 앞에 주님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저들은 의리 번쩍하게 주님을 섬길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을 만나면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내가 주님을 대접하리라. 저들은 어쩌면 주님이 나타나기만을 학수고대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주님 나타나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기만 하면 내가 모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리라”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열매의 사랑으로 주님을 대접하려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열매의 사랑보다 뿌리의 사랑을 더 원하심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뿌리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고 놀랄만한 일도 아니지만 거기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사랑이 담겨진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가 지난 화요일 저녁에 부산에 도착하였습니다. 부산에서 저녁 7시 열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니까 10시 쯤 되었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독산동에 도착하니까 저녁 11시 가까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편물을 챙기고 가방을 끌고 가는데 주차장 옆에서 김영님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저는 일을 하시다가 끝내고 잠깐 쉬시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인사를 하고 집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무슨 과일 봉지를 하나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드시려고 사신 것인데 저를 주는 것 같아서 괜찮다고 말하자, 가방에 넣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가방이 가득차서 넣을 수 없으니까 그냥 가져가시라고 다시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서운한 눈빛이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권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거절하는 것도 안 될 것 같아서 받아들고 집으로 가서 집사람에게 말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본인이 드시려고 산 것이 아니라, 저를 주기 위해 거기서 늦은 밤까지 기다리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찡하던지요. 바로 이런 것이 양들이 보여준 뿌리의 사랑이 아닐까요? 저는 우리 성도님들의 그런 뿌리의 사랑을 받고 사역을 하는 행복한 목사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을 때에 정말로 행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 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우리는 귀한 것들은 귀하게 다룹니다. 보석을 아무 상자에나 보관하지 않고 보석 상자에 보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보석이 상할까봐 그런 것입니다. 보석에 상처가 나면 그 가치가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도 가장 귀한 보물과 같은 것이기에 그 사랑이 상처가 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이 상처가 나면 증오가 되어서 폭발해 버립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어떻게 사랑을 상처 나지 않게 하며 귀하게 간직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첫 번째로 사랑은 ‘오래 참음’이라는 보석 상자에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오래 참음’이라는 상자에 들어 있지 않다면 그 사랑은 상처 나기 쉽습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오래 참음’이라는 보석 상자에 들어가 있어야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옆 사람과 함께 축복의 인사를 하십시다. “당신의 사랑이 ‘오래 참음’이라는 상자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음’이라는 상자 속에 들어 있어야 상처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성급함’이라는 상자 ‘조급함’이라는 상자 속에 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랑하고 나서 이런 말들을 자주 합니다. 그럴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사랑했는데 그럴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오래 참음’이라는 상자 속에 사랑을 담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배반에도 내가 그럴 줄 몰랐다는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랑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사랑을 받는 것도 또한 쉽지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지만 저들은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구원자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습니까? 사랑을 안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으로 오래 참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급하면 사랑에 상처가 납니다. 여러분의 사랑에 상처가 나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래 참음’이라는 보석 상자에 사랑을 담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오래 참음’이라는 상자 보다는 ‘빨리’라는 상자, 또는 ‘성급함’이라는 상자에 담으려고 하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보면 오래 참음을 시작으로 해서 ‘온유’,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함’, ‘자랑하지 아니함’, ‘교만하지 아니함’, ‘무례히 행치 아니함’,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함’,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함’,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함’, ‘진리와 함께 기뻐함’, ‘모든 것을 참음’, ‘모든 것을 믿음’, ‘모든 것을 바람’, ‘모든 것을 견딤’이라는 상자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상자들은 ‘오래 참음’이라는 상자 속에 있는 상자 속에 들어가 있는 상자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래 참음이라는 상자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이런 상자들 또한 별 의미가 없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모든 상자들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요? 사랑이라는 보석을 온유라는 포장하고, 등등 여러 가지로 포장하고 마지막에 하는 포장이 오래 참음이라는 포장으로 마무리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참음’에 대해서 우리가 제대로 이해한다면 다른 것들은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사랑을 담는 ‘오래 참음’이라는 상자는 어떤 상자일까요? 우리가 성급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생각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상대방이 거기에 맞게 나와야 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때부터 초조해지기 시작하고 성급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에게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에 성급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절대로 자기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자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지 자기에게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초점을 맞추고 사랑합니다. 그래서 오래 참지 못하고 사랑이 상처가 나서 증오가 되고 한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에 예수님의 사랑이 ‘오래 참음’이라는 상자에 담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주님의 사랑은 상처가 나서 엄청난 증오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래 참음’이라는 상자에 담겨져 있었기에 주님을 배반한 제자들을 구원하고, 모든 만물이 주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래 참음의 영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래 참음의 영광은 영광중의 영광입니다. 가장 높은 영광이 오래 참음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오래 참음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가장 고귀한 영광의 길이 오래 참음의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급해지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대가를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대가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거저 주셨습니다. 어떤 대가를 기대하시지 않으시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반역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십자가를 못 박는 것을 아시면서도 하나님은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대가라는 것은 어떤 보이는 것을 기대하는 것을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알아주기를 원하는 마음도 대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 사랑은 사람의 대가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기억하심으로 만족합니다. 마25장에 나오는 의인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를 주목하지 않아도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다고 하였을 때에 저들은 도무지 기억이 없습니다.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셨나요?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누구에게 기억시키기 위해서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기쁨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들의 행복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사랑은 대가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함으로써 행복하고, 그것으로 충분하며 행복한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다른 어떤 것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 그 자체로 온전한 행복이요, 온전한 기쁨인 것입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가장낮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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