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함이 없는 사랑(고전13;8~13)
고린도라는 도시는 그리스시대부터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시대에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고린도는 항구도시입니다. 그래서 무역항으로서 매우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부요할 때 생기는 문제가 윤리적인 문제이죠. 고린도에는 공창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1000명의 고급창녀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고린도는 미의 여신을 숭배하는 도시였습니다. 특별히 건축양식에 있어서 고린도 양식이 탄생할 정도로 아름다움을 숭배하였습니다. 이런 고린도에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였고, 마침내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선교여행을 하는데 고린도교회에 대한 안 좋은 소식이 전해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린도교회가 분열 가운데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파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아볼로파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바울파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는데 그 문제는 은사로 인하여 발생된 문제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하나님께서 다양한 은사들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받은 은사들을 가지고 교회가 혼란스러워지고 덕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시끄러운 것입니다. 각자 자기가 받은 은사가 더 좋고, 자기가 받은 은사가 더 귀한 은사라고 주장하면서 교회는 혼란스러워진 것입니다. 이런 소식을 듣고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있고, 자기가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달란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보통 우리는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가 잘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의 인생을 성공시키기를 원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공부하는 것이 자기 삶에 중심이 되기를 원하고, 손재주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통하여 자기 삶이 성공되기를 원합니다. 또 운동을 잘하는 사람은 운동을 통하여,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노래를 통하여, 등등 다양한 자기가 잘하거나 좋아하는 것을 통하여 자기의 삶을 성공시키기를 원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노래를 잘해서 자기 인생을 성공시켰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노래가 모든 것들의 최고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공부를 잘해서 훌륭한 학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공부가 인생의 전부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공부 잘한다고 하면 법대를 가라고 하고, 의대를 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60년대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농대를 가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공대하면 컴퓨터공학이나 IT쪽이 인기이고 섬유공학은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공대에서 섬유공학이 가장 인기 있는 학과였던 적도 있었고, 화공과가 가장 인기 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음악을 한다고 하면 집안에서 무슨 집안 망신시키려고 그런 일을 하느냐며 반대를 하였습니다. 운동을 하는 것도 그렇게 권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책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만 공부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런 공부를 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가수나 연예인, 운동선수가 청소년들의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또한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부를 쌓기도 합니다. 이처럼 지금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이런 비슷한 현상이 있습니다. 강해설교가 목사님들의 중요한 관심사였던 적이 있습니다. 강해설교를 하지 않으면 설교를 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였습니다. 한 때는 제자훈련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고, 또 전도폭발이 한국교회를 강타한 적도 있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찬양이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교회마다 찬양팀을 만들기 위해서 돈을 드린 적도 있습니다. 내적치유, 영적전쟁, 열린 예배, 등등 한국교회를 흔들고 지나간 다양한 운동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는 그게 중심이고 그게 아니면 이상한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들이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영원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임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은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은사는 신령한 것이고,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은사들을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하지만 그 은사들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은사들은 필요한 시간과, 필요한 상황 속에서 자기 임무를 다한 후에는 폐기처분 되는 것이 은사입니다. 그런데 폐기처분이 된 후에도 그것을 훈장처럼 가슴에 붙이고 싶다는 마음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제가 비행기를 처음 탔을 때에 이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내가 비행기를 탔다.'라는 흔적들을 지우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가방에 수하물 표시 스티카를 그대로 붙이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 흔적들이 어떤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효력도 없고, 오히려 쓰레기에 불과한데 그것을 자랑스럽게 훈장처럼 붙이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고린도라는 도시가 얼마나 세상적인 도시라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여러 다양한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얼마나 기쁘고 신기 하였겠습니까? 아마 자기가 받은 은사를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자기가 받은 은사를 훈장처럼 달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마 고린도교회에서는 자기가 받은 은사의 흔적을 남기는 방법으로써 자기가 받은 은사가 더욱 귀한 은사라고 주장하는 방법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예언보다 방언이 더 귀한 은사야, 아니야 예언이 더 귀한 은사야. 아니, 통역이 더 귀한 은사야. 이렇게 자기가 받은 은사가 더 귀한 은사라고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고전 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 13: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전 13: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8절 말씀을 보면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떨어지지 않지만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폐하여 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사랑만이 영원한 것이고, 사랑만이 실패함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인생을 성공시키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요, 내 인생을 성공시킬 수 있는 한 가지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지식으로도 내 인생을 성공시킬 수가 없습니다. 예언으로도 성공시킬 수가 없습니다. 방언으로도 성공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길은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실패함이 없는 성공을 우리들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은 다 그치고 폐하여지지만 사랑만은 결코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사랑은 실패가 없는 것이라고 재해석해 봅니다. 사랑은 때로 무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때로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만이 실패함이 없는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내 인생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만이 실패함이 없는 것이라고 확신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9~12절을 보면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 말씀은 사랑을 제외한 모든 은사는 온전한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것이고, 다른 모든 은사들은 어린 아이들이 하는 것이지만, 사랑은 장성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가 장성한 사람입니다. 사랑하지 못한다면 아주 많은 다양한 은사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인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훈장을 가슴에 달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장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어리아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사랑은 장성한 사람의 몫입니다. 장성한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장성하였습니까? 이것은 나이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이 먹었다고 할지라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장성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학식의 문제도 아닙니다. 배웠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을 나오고 박사가 되었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든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철들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철들었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는지를 가슴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철들기 전에는 내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지를 못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자기 목숨을 주듯이 주는데, 자식은 그것을 받고도 그것이 부모의 사랑으로 깨닫지를 못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야만 좋아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비록 부모가 자기 목숨과 바꾸듯이 준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철이 들면 부모의 채찍에도 부모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는지를 가슴으로 깨달아 질 때에 철이 드는 것입니다. 내가 부모님의 얼마나 큰 사랑을 가슴으로 깨달아질 때에 자식으로서 철이 든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자식은 부모한테 혼이 나고 꾸중을 받게 되면, "엄마 미워,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지?"라고 말합니다. 저를 혼내고 꾸중하는 것이 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에는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장성한 자의 사랑은 내가 이미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장성한 사람에게는 그 사랑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있습니다. 나를 이렇게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까? 이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아직 장성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직 철들지 않은 것입니다. 장성한 사람에게는 내게 베푸신 사랑에 대한 넘치는 감격과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사순절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가슴으로 받아들여지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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