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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귀 새끼 타는 예수님(막11;1~10)

나귀 새끼 타는 예수님(막11;1~10)

 

오늘은 교회가 종려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로 지킵니다. 종려주일이란 부활주일 전주일이며 수난주간의 첫째 날이기도 합니다. 이 날은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갈 때에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호산나 다윗이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찬송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때부터 사람들은 종려나무를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악마를 대적하는 축복의 나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성으로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길을 가지만 생각은 서로 다릅니다. 동상이몽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구속의 제물로 주시기 위해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서 올라가고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루살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예수님께 간청을 하였습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이 얘기를 듣던 다른 제자들의 반응을 보면, 다른 제자들도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마음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함께 따르는 무리들도 제자들처럼,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하셨던 것처럼 예루살렘에서도 그렇게 하여 마침내 예루살렘도 갈릴리처럼 될 것이라고 기대를 하고 지금 예수님의 행진에 합류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기 전에 제자들에게 분명히 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막10;33,4을 보면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는 주님의 이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예루살렘에서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고, 채찍질을 당하고, 마침내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의 귀에는 이 말씀이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제자들의 마음에는 뭐가 있습니까? 제자들의 마음에는 영광의 자리만 있습니다. 저들은 오직 그 자리만 생각하면서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의 마음에는 오직 영광의 자리로만 가득한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들리지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한다면 나의 마음을 먼저 비워야 할 것입니다. 비우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오직 자기의 생각으로 가득 찬 야고보와 요한은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간청을 합니다. 이 제자들의 간청을 들었을 때에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였을까요? 야고보와 요한은 어떤 제자들입니까?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딴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철부지 제자들의 간청을 듣는 예수님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요?

예수님은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간청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4,45). 주님의 이 대답이 제자들에게 들렸을까요? 주님의 이 대답 역시 들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저들의 마음에는 영광의 자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생각만 할 뿐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퍼포먼스를 행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언젠가 어떤 교회에서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교회 옥상에서 삼천만원의 현금을 뿌렸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게 사회문제가 되자, 목사님의 해명이 퍼포먼스라고 하였습니다. 퍼포먼스는 자기가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하는 행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로해서는 자기 뜻이 잘 전달되지가 않을 때에 퍼포먼스를 합니다.

예를 들면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합니다. 말로 타이르고 설명합니다. 아무리 반복적으로 타일러도 듣지 않습니다. 회초리로 때리기도 합니다. 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아들의 손에 회초리를 쥐어줍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종아리를 걷고, 아들에게 자기 종아리를 치라고 합니다.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의 종아리를 때릴 수 있습니까? 아무리 못된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아버지의 종아리를 칠 수 있겠습니까? 머뭇거리는 아들을 향하여 종아리를 치라고 아버지가 말합니다. 어쩔 수 없이 아들이 종아리를 칩니다. 아버지의 종아리에 회초리 자국이 생깁니다. 아버지가 더 세게 치라고 합니다. '더 세게, 더 세게'. 아들의 회초리를 맞는 아버지의 종아리에 핏자국이 서리고 마침내 피가 흐릅니다. 그러자 아들이 피가 흐르는 아버지의 종아리를 부여잡고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며 자기의 잘못을 뉘우칩니다. 아버지가 자기의 종아리를 걷고 아들의 회초리를 맞는 것을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타이르고 타일러도 되지 않자 아버지는 아들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려고 이런 퍼포먼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퍼포먼스에는 우리의 상식을 뒤 엎는 행위들이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종아리를 때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죠. 삼천만원이라는 돈을 길거리에 뿌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얘기입니다. 퍼포먼스에는 이렇게 상식을 깨는 행위들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는 것도 하나의 퍼포먼스라고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제자들과 세상을 향해, 주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성으로 올라가심으로 퍼포먼스를 행하는 것이 아닐까요?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저들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펼칩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합니다. 정말로 대단한 광경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광경을 연출하는 주인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이렇게 엄청난 환호를 받는 주인공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화려한 개선장군의 모습을 그릴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본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런 행렬의 제일 앞에는 언제나 황금투구를 쓰고 백마를 탄 개선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귀의 새끼를 타고 있는 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까? 예수님이 타고 있는 나귀는 사람을 한 번도 태어보지 않은 새끼 나귀입니다.

나귀는 큰 개정도 크기입니다. 그런데 나귀가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도 사람을 태어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탄 사람이 이 엄청난 행렬의 제일 앞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귀 새끼를 탄 예수님과 이 엄청난 행렬은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본문 1~6까지의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막 11: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막 11: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막 11: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막 11: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막 11:5)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 려느냐 하매

(막 11:6)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이 말씀을 보면 지금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갑자기 결정된 것이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뤄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도 모르게 이 퍼포먼스를 준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있는 산이고, 그 산 중턱쯤에 베다니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베다니에는 누가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사랑했던 나사로와 그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는 마을이 바로 베다니입니다. 성경에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마르다나 마리아에게 이 일을 미리 준비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아뭏튼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갈 계획을 오래 전에 세우고 준비하였음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려는 것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도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2~4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오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 오해는 과거의 오해가 아니라, 오늘 우리도 오해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오늘 우리가 그리는 예수님은 저처럼 멋있고 풍채가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의 배역을 보면 언제나 완소남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오해가 빚어낸 결과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면서 환호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의 행렬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과 삼년을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을 모릅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 분이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를 모릅니다. 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고 있지만, 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호산나를 외치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있는 이 행렬의 진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난 행렬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행렬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비틀거리며 올라가는 한 분이 계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들뜬 마음으로 흥분하고 있지만, 결코 흥분할 수 없는 비장한 마음으로 올라가고 있는 한 분이 계십니다. 다들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겠다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올라가지만, 하나 남은 자기 생명을 내어주기 위해 올라가고 있는 한 분이 계십니다. 다들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올라가고 있지만,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올라가고 있는 한 분이 계십니다. 이것이 이 행렬의 진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하겠다고 여기에 모였습니다. 오늘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 행렬의 진실 앞에서 나는 어떤 모습입니까? 아직도 주님은 혼자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아직도 주님은 나는 혼자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주님을 앞세우고 가지만 주님은 홀로였습니다. 홀로 비틀거리며 올라가시는 예수님, 지금도 홀로 너희를 위해서 내 하나의 생명을 주기 위해 오르신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간다고 가고 있는데, 주님은 홀로 간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음성이 들려오고 있습니까?

나는 주님과 함께 한다고 하는데, 왜 주님은 홀로 비틀거리며 올라가시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뒤따르고 있는데 왜 아직도 주님은 초라한 모습이란 말입니까?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희는 진실로 나와 함께 하고 있느냐? 진실로 너희는 나를 좇고 있느냐? 너희는 정말로 나의 길을 가고 있느냐?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의 길을 함께 가자. 이 길이 생명의 길이다. 비틀거리며 가는 이 길이지만, 이 길을 가야 너희가 사는 것이다. 나의 길은 이 길이다. 이 길을 함께 가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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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가장낮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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