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이사야 6장 1 - 13절(개역개정)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저는 목사로서 이사야 선지자가 부럽습니다. 제가 그를 부러워하는 것은 그가 가진 세상적인 명예나 권세 때문이 아닙니다. 먼저 이사야의 설교사역이 부럽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설교자였습니다. 그의 설교사역은 풍성했습니다. 그에게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유대의 13대 왕 히스기야였습니다. 이사야의 설교는 왕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울 정도로 탁월했습니다. 목사는 능력 있는 설교자가 부럽습니다. 둘째는 이사야 선지자의 집필 사역이 부럽습니다. 그가 기록한 이사야서에는 구약 39권 중에 메시야에 대한 가장 많은 예언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메시야의 이름과 동정녀 탄생 그리고 수난까지 마치 현장을 보며 예언하듯이 선명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셋째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나타났던 초자연적인 능력이 부럽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사야와 히스기야의 합심기도에 응답하셔서 천사를 보내주시고 산헤립의 18만 5천의 군대를 하룻밤 사이에 물리쳐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사역 중 일어난 가장 큰 이적이라면 해 그림자가 10도나 뒤로 물러간 사건일 것입니다. 우주를 움직이는 놀라운 역사가 이사야의 사역 중에 나타났습니다. 목사인 저로서 정말로 부러운 모습입니다. 넷째는 그가 변함없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힘 받아서 씀임 받은 모습이 부럽습니다. 어떤 사람은 쓰임 받다가 버림받는 경우도 있는데 이사야는 60년을 한 결 같이 귀하게 쓰임 받았으니 얼마나 복된 분입니까? 제가 가진 소원 중에 하나가 있다면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끝까지 쓰임 받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욕심에 미혹되어 정도에서 벗어나는 목사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깨끗하게 쓰임 받고 싶습니다.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때가 웃시야 왕이 죽던 때입니다. 웃시야 왕은 남유다의 10대 왕으로 52년간 통치했습니다. 그는 군사와 외교 능력이 뛰어난 왕이었습니다. 그는 주변 국가들의 조공을 받는 등 국격을 높였습니다. 웃시야 왕의 통치 기간은 유다로서는 태평성대를 누렸던 때입니다. 그런 민족의 영웅인 웃시야 왕이 죽었으니 유다로서는 위기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이사야 입장에서 보면 웃시야 왕의 죽음은 자기 개인에게도 위기였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의 사촌이었으며 궁중 제사장으로 정치적인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이었습니다. 배울 만큼 배웠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기는 했지만 고난은 몰랐고 배가 부르고 편안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웃시야 왕이 죽었으니 이사야에게도 위기상황이 닥친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위기를 만난 이사야를 보면서 위기와 관련해서 몇 가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겠습니다.
1. 우리는 위기를 만날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1절). 1절에 보면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사야는 국가적인 위기이며 개인적인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은 위기를 만난 사람이 아니라 위기 중에도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요즘 일본은 지진과 해일 그리고 원자로 폭발까지 겹쳐서 엄청난 위기 속에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믿는 우리들이 볼 때 더 안타까운 것은 그들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고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환난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위경에서 건져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추운 겨울, 아기를 안고 길을 가던 한 부인이 길에서 쓰러져 얼어 죽게 되었습니다. ‘나와 내 아기는 이제 죽는구나.’ 마침 그때 마차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아저씨, 살려 주세요. 우리가 죽게 되었어요.” 마부가 보니 부인이 얼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말에서 내린 마부가 아기를 빼앗아 안은 후 부인을 밀쳐서 넘어뜨리고 마차에 올라탔습니다. 다 죽어가던 부인이 아기를 빼앗기자 아기를 놓아두고 가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마차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마부는 아기를 데리고 계속 달렸습니다. 그러나 빨리 달리지 않고 부인이 따라올 만한 속력으로 달렸습니다. 부인은 계속해서 “내 아들을 두고 가라.”하며 마차를 쫓아갔습니다. 20분 정도 지나자 부인의 온 몸에 땀이 막 흘렀습니다. 그제야 마부가 마차를 세우더니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부인, 미안합니다. 처음부터 부인을 마차에 태웠으면 부인은 얼어 죽었을 것입니다. 부인을 살리기 위해 연극을 했으니 이해하십시오.” 그래서 부인도 살고 아기도 살았습니다. 마부가 부인에게 20분간 고통을 준 것은 부인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허락해주시고 내 가정과 일터와 내 인생에 풍랑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실 필요가 있어서, 정신 차리게 할 필요가 있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원망하고 불평하면 시험에 듭니다. 얼어 죽어가던 여인이 마차를 따라 달렸던 것처럼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환난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개인적인 위기를 만났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힘이 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하늘을 바라보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슬픔과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고, 하늘을 바라보면 기쁨과 소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위기 중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1절). 위기 중에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간 이사야 선지자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위기 중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힘이 있을 때는 모여들지만 힘이 없어지면 다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의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나갈 때 함께 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어려움을 당해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벌어져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저기서 북군이 패배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패전의 소식은 흑인 웅변가 더글라스가 연설하고 있는 곳에도 전해졌습니다. 흑인들에게는 낭패의 소식이었습니다. 흑인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위하여 싸우고 있는 북군의 패배는 참으로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더글라스도 울고 많은 흑인들이 울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실망과 낙담으로 침울해 있을 때 한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까?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까?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까?” 한 노인이 외친 말이었습니다. 노인은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약한 자를 도와주십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하고 용기를 회복하였다고 합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은 모태신앙입니다. 그는 독실한 신앙인인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아버지 이삭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에 대한 간증을 듣고 자랐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야곱이 눈이 어두운 자기 아버지를 속이고 형이 받아야 할 아버지의 장자의 축복권을 가로챘습니다. 그 일로 화가 난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 합니다. 야곱은 불같은 형의 성격을 알았기에 정신없이 집에서 도망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형을 피해서 도망하는 야곱은 불쌍하게 되었습니다. 급하게 도망을 치느라고 여비도 재대로 준비를 못했는지 들판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땅을 요로 삼고 하늘을 이불 삼고 돌을 베개 삼고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처량합니까? 그런데 그 날 밤에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땅에서 하늘로 연결된 사닥다리가 보이고 그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그리고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야곱을 축복해주셨습니다. 야! 곱의 인생 중에 가장 불쌍한 순간에 하나님은 자신을 보여주시면서 야곱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있어도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게십니다. 사람은 나를 떠나도, 인간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위기에 놓여도 모든 문제를 풀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경 마 28:20에서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이사야와 함께 하심을 보여주셨던 장소가 어디였습니까? 성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하나님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신약적인 표현으로는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계 2;1에 보면 주님은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이십니다. 여기서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 즉 주의 종을 말하고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를 말합니다. 주님은 교회에 계시며 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는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체험적으로는 교회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은 주로 어디서 주의 백성들을 만나주시느냐 하면 교회에서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서 여러분을 만나 주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자주 찾아야 합니다. 주일 낮 예배에만 오지 마시고 오후도 참석하시고 수요일에도 금요일에도 오시기 바랍니다. 낮예배만 오시는 것으로는 약합니다. 낮예배만 오셔가지고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기가 어렵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위기를 만난 분들이 계시다면 하나님 앞에 나오십시오. 어디든지 계시지만 특별히 주의 전에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하나님 앞에 나오셔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하나님은 위기 중에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3. 위기 중에도 하나님은 찬양 받으실 분입니다(2-4절) 2-4절을 보면 스랍이라는 찬양하는 천사들이 나옵니다. 스랍천사들은 날개가 여섯 개입니다.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날개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두 날개로는 날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저의 개인적인 영적 체험을 간증하겠습니다. 제가 오금동에서 목회를 할 때입니다. 그 때는 기도의 날을 정해놓고 성도들과 함께 5시간 이상 씩 기도를 했습니다. 제가 아랫 강단에 엎드려 기도하는데 제 몸에서 영이 빠져나가서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광채 나는 보좌는 보았지만 하나님은 빛 가운데 계셔서 제 눈으로 볼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보좌 앞에 엎드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하면서 제 머리에 쓰고 있던 면류관을 벗어서 주 앞에 드리는 체험을 했습니다. 제가 한 영적 체험은 본문의 내용과 계 4장에 네 생물의 찬양과 24 장로들이 관을 벗어 하나님께 드리는 내용과 같은 체험입니다. 지금 이사야는 개인적인 위기를 만났고 유대민족은 국가적인 위기를 만났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위기를 만나도 하나님은 찬양 받으실 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사도바울이 감옥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처럼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하나님을 계속해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환경과 상관없이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찬양 받으셔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1절에 보면 하나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높고 위대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인생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는 목자이시기 때문에 항상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며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히브리 언어에 있어 세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최상급으로 강조하는 용법입니다. 두 번 강조하면 비교급이요, 세 번 강조하는 것은 최상급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거룩함을 가지신 분이라는 말이며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찬양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천사들처럼 의무적인 찬양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최상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4. 문제 해결보다 시급한 것은 우리의 깨끗함입니다(5-7절) 이사야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연히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빛 앞에서 이사야가 부정한 인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고백을 들으시고 스랍 천사를 통해서 이사야의 입술을 숯불로 지져주셔서 정결하게 해주셨습니다. 희한합니다. 재단 숯불로 입술을 지지면 상처를 받아야 하는데 상처도 없이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영적인 체험입니다. 하나님은 위기를 가지고 찾아온 이사야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보다 먼저 그를 정결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사명을 맡기시기 전에 먼저 이사야를 깨끗하게 해주셨습니다. 8절부터 보면 이사야의 소명이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소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그를 깨끗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문제를 만나면 문제 해결에 모든 신경을 집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문제해결보다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일에 더 관심이 크신 분입니다. 신자가 가장 열망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자신의 깨끗함입니다. 그릇 하나를 사용해도 깨끗해야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을 살고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이 되려면 깨끗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아름답게 쓰임 받으려면 깨끗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려면 깨끗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귀하게 쓰임 받으려면 깨끗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깨끗하게 되려면 이사야처럼 먼저 자신의 부정함을 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부정한 존재라는 것이 인정되어야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모르니까 까불고 잘난척하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가던 소크라테스가 배를 젓는 사공에게 “여보시오 사공! 당신은 철학을 아시오?”라고 물었습니다. 사공이 “나는 철학 같은 것은 잘 모릅니다”라고 대답 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아마도 빈정대듯이 말했습니다. “철학을 모르는 사람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요” 그 말을 들은 사공이 자존심이 상해서 조금 가다가 배를 뒤집어 버렸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렸습니다. 수영을 못하는 소크라테스를 본 사공이 빙그레 웃으면서 “당신은 수영을 할 줄 모릅니까! 수영을 못하는 것이 어떻게 사람이요. 개도 수영을 하는데” 라고 복수를 했다고 합니다. 그 일로 인해서 소크라테스가 크게 깨달은 것이 있는데 무엇인지 아십니까? “너 자신을 알라”입니다. 자기를 정확하게 봐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고칠 수 있습니다. 어떤 파출소장은 늘 술에 취해서 파출소에 와서 소리를 지르고 툭하면 파출소에서 하룻밤 자고 가는 사람의 주정하는 모습을 비디오로 찍어서 보여주었더니 미안하다고 하더니 다음부터 그러지 않더랍니다. 사람이 자기의 부정함을 고치려면 자기의 모습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기 모습을 보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고, 부정한 사람이 깨끗해지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사야가 깨끗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빛으로 인해서 자기를 봤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깨끗하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문제해결보다 시급한 것이 우리의 깨끗함입니다.
5. 위기 중에도 집중해야 할 것은 사명입니다(8) 이사야는 개인적인 위기, 국가적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왔는데,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소명을 주고 사명의 길을 가게 하십니다. 8절에 보니 이사야에게 주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 음성에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이 일로 인해서 지금까지는 직업적인 선지자였는데 이제는 사명감을 가진 선지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가 위기 중에도 사명에 집중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9-12절을 보면 이사야가 가는 사명의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이사야가 외칠 때 백성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명의 길은 힘들어도 가야 하고 열매가 없어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제가 한국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의사였던 박관준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새벽기도를 드리는데 자꾸 마음속에서 들리는 어떤 음성을 듣게 됐습니다. “나를 위해 피 흘릴 자가 누구냐?” 그런데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에 와 보니 조간신문에 “신사참배 문제로 기독교에 위기가 도래했다”라는 기사를 읽게 됐습니다. 이 장로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바로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알리는 전단을 뿌렸고, 총독을 면회하여 신사의 부당성을 경고하다가 투옥 당했고, 옥중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박관준 장로님은 자신이 그 일을 하면 주를 위하여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습니다. 그 일을 한다고 일제가 변한다고는 생각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이 사명의 길이었기에 그 길을 갔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사명을 감당할 때 어떤 열매가 있느냐가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내가 사명의 길에 서있는 것입니다. 독일 옛 동독 땅 중부에 보름스라는 조그만한 도시가 있습니다. 여기에 옛날 독일 의회터가 있습니다. 지금은 기둥과 흔적만 남았습니다. 거기 마르틴 루터가 당시 독일 의회에서 당당하게 종교개혁의 뜻을 밝히며 사형언도를 받던 자리가 있습니다. 동판에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라고 새겨져있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황제가 루터에게 마음을 돌리라고 회유했습니다. 그 때 루터는 너무나 유명한 답을 했습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완전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사명자는 큰 열매가 없어도 작은 것에서도 소망을 보고 사역하는 것이다. 13절에 보면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이사야가 설교 사역을 해도 10분의 9는 온데간데없어지고 10분의 1이 남아있을지라도 그 10분의 1마저 황폐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산에 있는 나무가 다 베임을 당하는 것 같은 처참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명자는 남은 그루터기를 보며 사역해야 합니다. 나무가 다 베임을 당해도 그루터기가 남아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명자는 풍성한 열매가 아닌 거룩한 씨만 있어도 사명의 길을 가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 진정한 성공은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은 사명을 발견하고 하루를 살아도 사명대로 사는 인생입니다. 80세의 모세처럼 사명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배 밑창에 있던 요나처럼 사명을 피하지 마십시오. 이사야처럼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하고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의 마음속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금요일 신문에 보니 일본 원전을 사수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자원한 사람들이 324명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일본의 미래가 내 행동에 달렸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지역과 국민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원전 현장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324명의 일본인들에게서 사명감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이 부르시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어려움에 집중하기보다 사명에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개인적인 위기와 국가적인 위기 앞에 선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봤습니다. 첫째, 우리는 위기를 만날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위기 중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셋째, 위기 중에도 하나님은 찬양 받으실 분입니다. 넷째, 문제 해결보다 시급한 것은 우리의 깨끗함입니다. 다섯째, 위기 중에도 집중해야 할 것은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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