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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최일환목사

[스크랩]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창2:15~17/2003년1월 26일

하나님이 금한 선악과

창세기2:15~17

2003년 1월 26일 주일 낮 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2: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설교:

歷史란 假定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에덴동산의 아담이 그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어찌되었을까?

만약에 아담이 하나님이 찾아와 왜 먹었냐고 물을 때 그때 회개했더라면?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다면 ?

만약에 빌라도가 예수를 무죄 석방했다면?

만약에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안 터지고 우리가 일제에 50년이상 통치를 받았다면 ?

만약에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안 맞았다면?

그리고 만약에 히딩크가 우리나라 월드컵축구팀 감독이 안되었다면?


역사를 만약이라는 假定 下에 추정하여 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주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지금의 배우자와 만나지 않았다면?

만약에 여러분이 그때 예수를 안 믿었다면?

만약에 최일환이 목사가 안되었다면...?  아주 재미있지 않습니까?

만약에 최일환이 예수를 안 믿었다면 牧師도 안 되었을 것이고 조복희란 사람과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러면 장안중앙교회도 안 세워졌을 것이고 무엇보다 제 자녀들은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저와 여러분이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며......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가정일 뿐입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역사에 있어서 假定은 그저 假定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거기에 온갖 좋은 것을 다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에덴동산의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존재였고 영원히 죽지 않고 살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동산 모든 것을 다 누리도록 하신 하나님이 유독 한 가지는 먹지 말라고 하시며 그것을 “먹으면 정령 죽는다” 고 경고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잘 아는 善惡果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곳에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그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주 재미있는 추정들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아담과 하와가 그 선악과를 따먹었고 결국 돌이키기 어려운 심판이 인간에게 임했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선악과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만 있었던 과거만이 아니고 오늘날도 현대인들에게 건드려서는 안 되는 善惡果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의미와 성격, 그리고 결과에 있어서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나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도 선악과 같은 건드릴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되는 선악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현대판 선악과가 몇가지 있는데  

 

1. 主日 聖守입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동시에 그것은 성도의 標示입니다. 이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어지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성도의 복을 위해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대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왜 지키지 못하는 것일까요?

1)貪心 때문이며 2)잘못된 價値觀 때문입니다. 3)더 나아가 하나님의 約束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이익, 당장의 욕심을 채우려는 탐심이 에덴동산의 하와의 눈을 멀게 했듯이 현대를 사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그래서 주일을 못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 이유는 잘못된 가치관 때문입니다. 뭐가 더 귀한 것인지 뭐가 덜 귀한 것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잘못된 가치관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世上的 가치관에 물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우리도 귀하게 여기고 세상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는 것을 우리도 천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경적 가치관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어떤 것이냐 하면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것을 나도 귀히 여기고 하나님이 천히 여기는 것을 나도 천히 여기는 것입니다. 내게 아무리 큰 유익이 된다할지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면 버릴 수 있는 자세가 있어야 하며 내가 손해가 될지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기꺼이 앞서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聖經的 價値觀을 바르게 확립하여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일을 지켜야 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갈등과 고민이 필요 없는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믿지 못함으로 주일을 성수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약속으로 믿는다면 고민도 않고 갈등도 없이 지킬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안식일을 범하는 자에게 돌로 쳐 죽이라고 까지 하면서 계명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주일 성수는 믿는 성도의 기본자세요 따먹어서는 안 되는 선악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일 성수는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1)하나님의 것으로 지켜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 전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한 시간이지만 주일만큼은 말 그대로 주의 날입니다. 주님을 위해 사용해야 할 날이며 주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할 날입니다. 이것을 주의 날로 지키지 못하고 내 날로 지키면 그야말로 “날 도둑”이 되는 것입니다. 시간의 소유권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지, 안하는지를 볼 수 있는 표시가 주일입니다.


“첫 열매”는 “대표성의 원리”가 있습니다. 첫 열매를 왜 요구하실까요? 첫 것은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첫날인 주일이 하나님의 날임을 믿고 드리는 사람은 일주일 전체를 주님께 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첫 것을 구별하는 사람은 그 믿음을 주님께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에게 靈肉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2)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 성수의 基準이 무엇입니까? 주일에는 매매하지 말라 일하지 말라하는데 과연 어떤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이고 어떤 것은 해야 할 일일까요? 그 기준은 하나님의 약속이 기준인데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가능하나 자기의 유익과 편의를 위한 것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일에 차를 타고 오다 기름 떨어져 휘발유를 넣은 문제, 주일에 버스를 타고 오는 문제, 주일에 몸이 너무 아파 병원에 가는 문제 등 등, 우리의 상황이 주일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인지 아닌지를 구별키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럴 때 어찌해야 하는가? 我田引水격의 해석이 되면 안 되겠으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면 행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튼 이날은 하나님을 위한 날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날로 힘써 지키시기를 축원합니다.


3)감사와 기쁨으로 자원하여 지켜야 합니다.

주일은 기쁨의 날이고 감사의 날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쁨과 감사로 지내야 할 날입니다. ?이날은, 이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즐겨하세 그렇습니다. 이 찬송가처럼 기쁘게 그리고 즐겁게 지내야만 합니다. 물론 너무 감사고 고마워서 눈물이 날수도 있습니다. 너무 감격하면 눈물이 펑펑 흐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날을 슬퍼하며 괴로워하며 지내는 사람도 매우 많습니다. 인간관계에 고통당하고 일에 눌리고 너무 힘들기에 짜증이 나기도 하고 너무 무겁기에 고통스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런 예배와 주일성수는 하나님이 받으시기 어려운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금한 선악과는

2.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분명한 복이 약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함부로 건드리거나 손을 댈 수 없는 선악과 같은 것입니다. 주일 성수와 같이 성도가 지켜야 할 기본의무이며 신앙 고백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지키지 못할까요? 마찬가지로 잘못된 탐심과 잘못된 가치관과 약속에 대한 不確信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만물의 창조주요 소유주가 하나님이라 분명히 명시하였고 그 주인이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소유의 십의 일을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고백해야합니다. 십에 하나는 하나님 것이고 아홉은 내 것이라는 고백이 아닙니다. 십의 십 전체가 하나님 것인데 그중에 첫 것 하나를 드리면 전체를 하나님의 것으로 고백하는 믿음의 표시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열겠다고 약속하시고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시험해 보라고 하십니다.


고아출신으로 갑부가 된 “깁슨”이라는 부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친구이며 여전히 거지로 사는 친구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자네는 나와 함께 깡통 차고 살던 사람이 아닌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부자가 되고 나는 여전히 거지로 사는가?  참  불공평하지 않은가?”깁슨이 이야기하기를  “내가 나와 같이 부자가 되는 비결을 알려 줄테니 이 네 가지를 하나도 절대로 어기지 말고 10년 동안 지켜야 되네, 만약 10년 동안에 이 네 가지를 지켜도 부자가 되지 않는 다면 내 재산의 절반을 자네에게 주겠네” 그러자 그 친구가 귀가 번쩍 뜨입니다. 그래서 단단히 약속을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잘 믿고 주일 성수할 것, 

둘째는 술은 절대로 입에 대지 말 것,

세째로 십일조는 꼭 하나님에게 드릴 것,

네째로 무슨 일을 하든지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할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쉬운 조건에 거지 친구는 자신 있게 그러겠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리해서 곧 철공소에 박봉으로 취직했는데 그는 돈버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이 4가지만 10년동안 지키면 친구 재산의 절반은 내 것”이라는 데만 관심 속에서 이 4가지를 지키는데만 전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 10년이 가기 전에 그 거지친구는 철공소 사장의 신임을 얻어 공장장이 되고 지점장이 되면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십일조를 지켜 오셨습니까? 

바라기는 1)여러분의 신앙고백으로 드리시기 바라며 2)정성과 감사로 드리시기 바라며 3)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시는 통로임을 믿고 드리시기 바랍니다.


제발 이것을 따먹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발 내 맘대로 손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도적놈”으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어찌 잘되기를 기대하겠습니까?


목사가 보는 성도의 신앙은 헌신의 모습에서 그 크기를 봅니다. 그 척도중의 척도는 십일조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십일조를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께 아무리 인정받으려 해도 인정받을 길이 없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리는 성도는 하늘의 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손 댈 것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업신여기지 마세요. 당장은 안 드려도 별 탈 없이 지나는 것 같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적당히 넘어가시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계산하시고 반드시 믿음의 헌신을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현대판 선악과는

3.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妄靈되이 일컫는 것도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하나님을 업신여기거나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를 한다면 하나님은 그 누구도 그대로 용납지 않습니다.

시편 93:1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權威를 입으셨도다” 하셨고 출애굽기 20: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권위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존귀한 것이며 그래서 시편기자들은 그 존귀하신 이름을 찬양하라고 외쳤습니다. 

시편 148:13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 할지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 나심이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도전하며 그 이름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 때 하나님의 권위를 건드리는 것일까?

1)하나님을 인간만도 못하게 대할 때입니다.

존귀하신 하나님을 사람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인생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두지 않으심을 성경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가나안땅의 백성들을 그토록 진멸하셨을까요? 왜 아말랙을 진멸하신 것일까요?


2)교만과 불순종으로 행할 때 입니다.

교만하면 하나님의 명령이 순종으로 받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순종하게 되고 결국 그들의 末路는 심판입니다. 사울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겸손한 자는 놀라운 은혜를 누립니다. 다윗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3)하나님의 세운 종을 무시할 때 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에게 때로 엄청난 권위를 부여하십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의 권세를 부여합니다. 그를 대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취급하십니다. 게하시가 엘리사를 속일 때도 단순히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님을 보여주십니다. 또 엘리사의 말 한마디에 권위를 부여합니다. 요단강에 가서 7번 씻으라는 그 말에 하나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그대로 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의 권위를 위해서입니다. 엘리야나 엘리사뿐 아니라 하나님이 쓰신 종들을 도우시고 그들의 귄위를 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종들을 함부로 대하며 비웃으며 조롱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임을 믿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우리 교역자들이 좀 못났어도 함부로 대하지 마시고 좀 잘못했어도 세워주고 덮어주고 이해하려고 해주시기 바랍니다. 노아의 허물을 떠벌리고 다녔던 함은 저주를 받았고 그 허물을 조용히 덮은 셈과 야벳은 복을 받습니다. 자기가 실수해놓고 그럴 수가 있나 하나 아버지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떨어트리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저주를 받은 것이고 그 허물을 덮은 아들들이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것을 알았기에 사울이 아무리 자기를 해하려고 달려들어도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이라고 함부로 대하지 않은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복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건드려서는 절대 안되는 선악과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그래야만 우리가 복을 누리는 도구입니다. 

기도합시다.

 

출처 :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글쓴이 : 최일환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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