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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목회처신법

[스크랩] 목사의 자기 자신에 대한 금기사항

목사의 자기 자신에 대한 금기사항




* 이런 것들에게 매이지 말라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벧전2: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이 글은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종으로 살면서도 이런 일들에 메여 자유 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역하다가 하나님의 종으로서도 실패하고 인생살이에서도 실패하는 일들을 막고자 하여 쓴 것이다. 또한 이런 구속은 목사들을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스스로 이런 것들에게 얼마나 심각하게 매여 있는지를 스스로 발견하시고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유를 회복하시기를 바란다. 

여기서 메이지 말라는 말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지배받지 말라는 말이다.

1. 욕망과 탐욕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목사의 욕망과 탐욕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이상과 꿈이라는 가면을 쓰고 목사를 얽어맨다. 이런 욕망과 탐욕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이성과 지성을 상실하게 하고 하나님의 작은 일에 대한 충성심을 외면하게 하며 한 영혼을 귀하게 보고 대하는 사랑의 마음을 파괴시킨다. 대체적으로 목사의 욕망과 탐욕은 신령한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것들이 많다.

이 욕심과 탐욕을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최고 최선의 목표로 삼고 한가지도 예외가 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맹세하고 약속하며 실천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것인 것 같아도 탐욕과 욕망 적인 것들이 많다. 

30여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나는 목사로서의 성공과 실패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결단코 이 성공과 실패라는 단어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었으며 실패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과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벗지 못했다. 반면에 내 표준으로 성공한 친구 목사들을 대할 때에 좌절감과 부러움을 가출 수가 없었고, 스스로 생각할 때 성공했다고 하는 친구들의 그 잘난 모습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겨우 이제사 깨달았다. 목사의 성공과 실패의 척도가 결단코 내가 보았고 기준 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안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잘 했는가 못했는가가 목사의 성공 실패의 척도다. 어떤 때에 누구에게 하나님께서는 잘했다고 칭찬을 하셨는가? 그것은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잇듯이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다.
자기가 맡은 일이 작던 크던 그곳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기를 바란다. 천국에 가면 세상에서 그렇게 이름을 날리며 큰 일을 하던 칭찬 받지 못한 종들이 있을 것이며 어느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았는데도 칭찬을 듣는 종이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늘 듣는 말로서 지금 하나님의 사역에 힘들어하는 목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지어 낸 말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이제사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작은 종이 있기 대문에 큰 종도 있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 간다는 것을 알고 좌절하지 말고 힘을 내시기 바란다.


2. 자기의 이상과 꿈에 메이지 말라.

"(전5:7)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구약의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이상과 꿈들이 많았다. 이런 이상과 꿈들은 장차 되어질 일에 대한 계시였다. 그러므로 목사의 이상과 꿈은 선지자의 그것과 같은 것이 여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이 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상과 꿈을 가져야 한다. 사람 더욱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목사가 어떻게 이상과 꿈을 가지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이 이상과 꿈이 어떤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을 흐리게 하고 영적인 안목을 가린다. 목사의 이상과 꿈은 큰 교회, 많은 성도, 온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 영광과 칭찬, 화려하고 안락하며 안정된 생활이 아니다. 이런 꿈에 메이게 되면 그는 이미 목사가 아니라 세상의 누구들과 같이 잘 살기를 염원하는 보통 사람일뿐이다. 이런 이상과 꿈에 메여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쓰시지 아니할 것이다.
비록 그것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이 아니면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나는 어느 교회 목사의 설교에서 도저히 들어 줄 수 없는 망말을 들었다. 요셉은 이상과 꿈을 가진 사람이 였기 때문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으니 우리도 우리 자식들에게도 요셉의 이상과 꿈을 가지게 하면 반드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 강조하는 설교였고 성도들은 아멘으로 크게 화답하는 것이 였다.
이것은 완전히 하나님도 없도 믿음도 왜곡된 인본주의적인 이단 세속 설교다. 그러나 그가 우리가 모두 인정하는 보수 개혁 신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아무도 그 설교와 목사의 사상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목사의 설교대로 라면 아마 그 교회에서는 국무총리가 수도 없이 많이 나올 것이다. 그래도 되는 것인가?

요셉의 이상과 꿈은 하나님께서 장차 되어질 일 즉 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큰 만족하게 하시겠다는 것을 미리 알려 주신 것이고 요셉은 그 이상과 꿈을 붙들고 고통과 괴로움을 참고 승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의 꿈은 아브라함에게는 하늘을 보는 것으로 미리 보여 주신 것이기도 하다. 

목사의 이상과 꿈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보여 주신 세계를 찾는 것이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목회를 할 것인가가 목사의 가장 높고 고상하고 바른 이상과 꿈이다. 그것이 죽는 것이라면 스데반과 같이 죽을 수도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기도를 하면서 자기가 바라는 소망을 하나님께 강조하고 "밑싸오니 주실 줄 밑씁니다"라고 하며 성숙되지 못한 초신자나 일반 평신도와 같은 수준에서 하루 빨리 벗어 나는 것만이 꿈과 이상의 메임에서 자유할 수 있는 길이다.
 

3. 잘못된 성격

"(고전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사람의 성격을 사람마다 다르다. 성격이 완전한 사람이 없고, 성격이 절대적으로 나쁜 사람은 없다. 사람은 두 가지 성격을 모두 가지는 것이며 사람의 성격의 좋고 나쁨의 평가도 여러 가지 정황에 따라 다르게 생각되는 점이 있다.
여기서 못된 성격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방해가 되고 장애가 되는 성격들을 말한다. 변명, 잘못에 대한 핑계, 책임 전가, 개으름, 안일함, 세상적인 쾌락 추구, 지나친 정의감, 결백성, 성급함, 무절제, 소극적인 평가와 비판 같은 자신의 성격 가운데 못된 성격들에 메이지 말라. 이런 성격에 지배를 받으면 그는 틀림없이 망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목사로서의 실패뿐 아니라 세상살이에서도 실패를 하고 말 것이다.

목사는 자신의 못된 성격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성격 분석을 받아야 하고 자신을 망하게 하는 인격적인 결함을 과감히 시정하기를 열망하고 노력해야 한다. 사람이 자기를 다스리지 못하고 자신의 가장 작은 세계인 가정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교회와 세상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

여기 잘못된 성격을 고치기 위해 인격 훈련을 해야 한다는 글의 일부분을 기록한다.
나는 내 주변에서 많은 목사들이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전혀 부족하지 않는 풍부한 사랑을 받고 유아와 유년 때를 보내고 건강하고 원만한 인격 형성이 되는 청소년기를 지나서 아름다운 이상과 꿈을 키우고 가꿀 수 있는 청년기와 사랑을 받고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감사 감격하여 헌신된 사람을 그렇게 많이 보지 못했다. 더욱이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되어 평생을 하나님의 종으로 훈련된 목사를 그렇게 많이 보지 못했다.

대체적으로 가난하고 무식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고생고생하며 살다가 하나님을 믿게 되고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그 은혜의 감격으로 인해 헌신하여 하나님의 종이 된 목사들을 너무 많이 보았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모든 일에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나서 목사가 되고, 누구는 환경이 나빠 대학 진학을 못해서 신학교에 와 목사된 사람도 많이 있고, 세상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할 일도 없어 목사된 사람도 많이 보았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의 경우를 자세히 살펴보면 소위 목회를 잘하는 목사들은 태여 난 환경이나 부모들이 모두 특별하였으며 그 분들의 자란 배경이나 처지가 남달랐다는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즉 부모님이 무식하고 가난했지만 기도 많이 하시고 신앙으로 자식을 기르신 분들이라든지 순교자의 자녀들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그 분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인격 훈련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잘 이루어져 평생 목회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목회를 원만하고 은혜롭게 잘하게 된다는 말이다.

나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다듬어지지 목하고 우상을 섬기며 조상 숭배를 신앙으로 가진 불신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천성과 열악한 환경에 의해 잡초처럼 형성되고 이루어진 인격으로서는 하나님의 교회 섬기기가 얼마나 부족하며 모자라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잡초와 같은 다듬어지지 못한 인격을 그대로 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쓰실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시는데 이것이 목사 개인에게와 가족들에게 정말 견디기 힘든 고생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의 인격 부족으로 인한 고생을 단축시키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쓰임 받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목사의 인격 훈련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과 교육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이 인격 훈련에는 각자의 인격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잘못된 것을 발견하게 하고 잘못된 인격을 교정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나는 목사로서 가장 좋은 인격은 주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이런 인격으로 목회를 해야 소금과 빛이 될 것이다.
(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 우지 못할 것이요 

이외에도 남 대접하기, 감사하기, 섬기기, 다른 사람 말 경청하기, 양보하기, 인내, 작은 일에 충성하기, 야심 죽이기 등등 수많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인격 훈련이 계속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목사의 인격을 위한 어떤 프로그램도 알지 못한다. 이런 중요한 일이 교단에서도, 신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방치되어 있고 목회의 실패와 아픔의 원인을 모른 체 오늘도 산에 올라 가 소리만 질러 대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그리고 어떤 목사는 조금만 다듬어 지면 좋은 목회자가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목사로서의 자질을 비관하여 목사의 신분을 숨기고 먹고살기 위해 거리를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 것인가? 참으로 가슴 저리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날 내가 타고 다니던 고물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본네트를 열고 여기 저기를 살펴보았으나 고장의 원인을 알 턱이 없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카센터의 기술자를 불렀는데 이 사람이 기술이 없어 고장난 곳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시간에 쫓긴 내가 종종거리며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우리 곁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제가 잠깐 볼까요"라고 했다. 카센터 기술자는 대단히 기분이 나빠하면서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는 뒷짐을 지고 차를 자세히 보더니 "고장이 난 것이 아니라 아니라 밧데리의 연결선이 녹이 슬어 접촉 불량입니다. 빼서 조금 긁어 끼우고 나사를 조여 보십시오" 그래서 그가 하라는 데로 했더니 금방 시동이 걸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하도 고마워 누구시냐고 물었다. 그는 "예. 앞 동에 사는 사람인데 대한항공에서 비행기 정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목사의 인격의 한 부분만 고치면 아주 훌륭한 목사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복되게 세상을 살아 갈 수 있는 목사들이 목회의 어려움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 스스로를 패기 처분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되는 것이다.   

죄악 가운데 태어난 천연적인 인격으로 좋은 목사 되기는 어렵다. 반드시 하나님의 종의 인격으로 교육되고 훈련되어야 한다. 목사는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거듭 난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종의 그릇이 갖추어져야 한다.

나는 아직도 내 인격이 하나님의 종으로 만족스럽다고 도저히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작은 종으로 쓰실 만 하게 되기까지 나를 연단 하셨고 훈련하셨다. 그것은 수 없이 많은 시행 착오와 고통과 고생으로 나에게 나타났다. 그 과정에서 우리 식구들도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지금도 나와 같은 과정을 겪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목사의 인격을 하나님의 종의 인격으로 만들 수 있는 좋은 교과 과정이 있고 그곳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다면 목사들이 좋은 그릇되기 위한 고생을 좀 덜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나날들의 괴로움을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상(이 글은 목사 제 훈련 학교가 필요하다는 글의 일부이다.)

못된 성격을 고치기 위해서는 자기의 그런 성격을 미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잘못된 성격을 증오하며 털어 버리기 위해 기도하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심한 자책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못된 성격을 애정을 가지고 보호하며 장려하는 사람도 있다. 혈기를 열정이라고 착각하며 개으름을 신중함이라 하고 지나친 정의감을 의롭다고 오해하여 자신을 미화시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은 평생 성격 고치기에 시달리며 하나님에게 온전히 쓰임 되지 못할 것이다.


4. 근심, 염려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목사의 근심과 염려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불안과 초조를 낳게 되고 일을 성급함으로 처리하게 하여 실수를 연발시킨다. 그리고 평안한 심령을 상실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게 하여 주님의 뜻을 역행하게 한다.
이런 근심과 열려는 대게의 경우 자기의 욕심이 만족스럽게 채워지지 않을 때에나.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할 때, 어떤 실수를 저질렀을 때, 질병, 가난, 외우내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서 생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장중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다. 욥이 말한 주신 분도 하나님이 시요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근심 걱정하므로 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얻은 것이 없는 대신 많은 것을 잃게 된다. 할 수 만 있으면 근심 걱정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하지만 인생살이가 어떻게 그를 수만은 없다, 그럼으로 이런 일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며 이런 일이 생기면 즉시 버리는 훈련이 필요하다. 
근심과 염려를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금식 기도나 산행이나 좋은 음악을 듣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기도와 산행이 좋았다. 


5. 죄와 죄책감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아니하고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서 속죄하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사단은 목사의 사기를 꺾어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과거에 지은 죄나 죄책감을 이용한다. 범죄한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지만 이미 용서받은 죄의 짐을 지고 괴로워하는 것도 바른 일이 아니다.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용서해 주신 죄에 대하여 깨끗이 잊어 버리라.

우리 몸에 상처가 나면 고통스럽지만 그 상처가 아물면 고통도 사라진다. 그러나 상처의 흔적은 만든다. 마찬가지로 죄로 인한 고통은 죄를 용서받음으로 없어지지만 죄로 인한 상처의 흔적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 흔적으로 지난 고통을 상기할 필요는 없다.   

죄책감은 대체적으로 완전주의자들에게 심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야스퍼스는 인간 실존에 네 가지의 한계 상황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죽음, 고통, 투쟁 그리고 죄책감이다. 이 네 가지의 한계 상황은 세상살이에서 인간이 불가피 하게 만나는 실패와 좌절들이며 이것들은 인생의 결정적인 비약을 연결시켜 주는 고리와 같다. 물론 투쟁과 죄책감은 근원적으로 우리에게서 비롯하고 죽음과 고통은 우리의 행위와 관계없이 불청객처럼 우리는 찾아온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이런 실패의 원인이 되는 성격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를 특수 존재(dasSo-sein)라고 생각하는 특수 성격에서 비롯되며 갖게 되며 반대로 자기 자신을 특수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고 했다. 그래서 특수 존재로서의 성격과 죄책감은 언제나 함께 간다. 내가 보편성을 생각하지만 나의 실존은 언제나 그 보편성을 특수 존재의 제한된 창문을 통하여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나의 사랑도 질투와 미움과 배척의 숨은 심리 현상으로 인해 다 들어 내지 못한다. 그래서 죄책감은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으로서 또 하나의 다른 고통으로서 나에게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웨슬레에게 의하면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을 그대로 방치해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양심 속에서 선행적인 은총으로 역사 하여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을 율법의 심판 아래로 이끌어 들임으로서 타락의 조건을 인식하게 한다. 이런 인식은 죄인인 인간들이 하나님의 선행의 은총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기 시작하게 한다. 사실 그 양심으로 죄책감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선행의 은총을 양심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죄인임을 깨달음으로 구원은 시작되는 것이며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했다.

죄책감을 벗기 위해서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다.
모든 예배 의식 속에는 누군가에게 어떤 종류의 치유가 일어나게 마련이다.
즉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깨달을 때 과거의 심각한 죄책감이 치유되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새로운 희망이 싹터 슬픔이 치유된다. 또한 용서받았기에 용서할 수 있게 되며 실망한 영혼이 치유되고 하나님은 인생의 사소한 일 조차도 처리해 주실 만큼 위대함을 깨닫게도 된다. 이렇게 되어 근심이 치유되고 자기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중요한가 인식하게 되며 비로서 자기 비하가 치유된다

또 다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경고의 대목이 나오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다시 결단하게 하고 확신을 주는 말씀에서 자신의 죄책감과 실패 감으로 인하여 생겨진 좌절들에게서 벗어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나를 용서하심을 알게 되고 안도함을 되찾을 것이다. 이런 말씀과의 거듭되는 교감으로 목사는 건강한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자유를 누리며 살 줄 알아야 한다.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가장낮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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