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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목회처신법

[스크랩] 목사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실패한 가정 운영)

목사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실패한 가정 운영)

 

 

나는 여기서 교회를 직장으로 보고, 목회를 직업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 교회 부목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분들이 우리 교회에 온 것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1년쯤 지난 후인 것같다. 그런데 그들은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짓을했다. 그 납득할 수 없는 일이란 오후 6시만 되면 전화 코드를 빼 놓아서 연락을 차단시키는 일이다. 교회의 급한 일이 있어 그를 찾아도 전화가 되지 않아 여간 애를 먹어야 했다. 처음에는 실수로 그런 짓을 하는가 싶었으나, 알고 보니 의도적으로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몇번인가 전화를 연결해 놓도록 말했지만 잘 듣지 않았다. 나는 그 부부에게 목사의 사명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한 후에 사 납득이 되었는지 전화를 연결해 놓았다. 그러나 여전히 오후 6시 이후에는 교회 일에 소극적이고 전화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상당 기간 동안 신경을 쓰게 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현상이 우리 교회 전도사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서 알게 되었다. 어디에서 무슨 말을 듣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목회자의 사역과 가정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유형의 사역자들에게서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다.
즉 교회 일은 하나의 직장과 같고, 직장의 일이 끝나는 오후 6시 이후에는 자기들만의 가정 생활에 충실해야 한다는 그런 논리이다. 우리 전도사는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자기 부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서 오후만 되면 전화를 뽑아 버린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전도사의 부인을 불러 목회자와 가정, 그리고 직업 의식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는 묘한 교육을 해야 했던 것이다.       

나는 지금부터 우리 전도사와 그 부인에게 했던 묘한 교육의 내용을 이곳에 기록하려 한다.

 


1). 우선 목회자, 즉 목사가 하나의 직업인가 하는 문제다.
지금은 목사가 받는 생활비를 흔히 월급이라든지 아니면 급여라는 말로 부른다, 그러나 60-70년대만 해도 그런 말은 수치스러운 말로 들었다. 목사가 받는 생활비는 반듯이 사례비라고 불러야 했으며, 그렇게 부른 이유는 목사는 교회를 직장으로 하고 있는 직업인이 아니고, 교회를 섬기는 하나님의 종이며, 교회는 그 하나님의 종에게 필요한 감사의 표시를 한다는 의미의 생활비를 사례비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몰라도 교회에서나 목회자의 사고방식에 생활비를 월급이라고 불러도 아무 저항이 없어졌다. 이것은 목사를 하나의 직업인으로써 교회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식이 만연되고 보편화 되였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은 별 것이 아닌 것 같지만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목사가 하나의 직업인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목사가 한 사람의 직업인인가? 그리고 교회는 목사의 직장인가? 이런 직업 의식과 교회가 하나의 직장이라는 개념에서 퇴근(?) 후에는 교회와 연락을 끊어 버리려는 사고방식을 전도사와 그 부인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내가 결론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교회는 목사의 직장이 아니며, 목회자는 직업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와 그 가족들의 생각 속에 다른 직업인들처럼 정해진 시간 동안 일하고 나머지는 우리들의 시간이라는 개념이 팽대되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며 우리들의 일터다. 목사를 성직이라고 하고 천직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목사의 일이 직업적이여서는 안된다는 말이 된다. 목사는 그 가족과 함께 하나님께 바쳐진 헌신 자들이며 목사의 일은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시간의 개념이 없이 일하시므로, 주님께서도 시간 개념 없이 일하셨다는 말씀이고, 목사도 그렇게 일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시간을 제 가며 그 시간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시간이요, 하나님의 일(즉 교회을 위한 일)을 하는 시간 이외의 시간은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한,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고유한 우리들만의 시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직업을 가진 직장인들처럼 오전 9시에 일을 시작해서 오후 5시까지 자기 자리 앉아 어떤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시간을 챙기려 하니 참으로 몰염치하기 그지없는 짓이다. 목회자의 일은 천직이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헌신되어 섬기는 일이므로 24시간이 목사의 일하는 시간이요, 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것이요, 아버지의 자녀들을 돌보는 일이니 시간을 따져 하는 일이 아니다.

 

 

2). 목회자의 가족들은 목회자와 다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도 되는가?
“하나님의 일은 목사가 하는 것이요, 그 가족들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라는 망말을 나는 많이 들었다. 특히 선교사로 파송되는 목사의 가족들에게서 이런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었으며, 교회를 개척하면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즉 목사는 사명을 받아 선교지로 출발을 하고, 목사는 사명을 받아 교회를 개척하면서 고생을 하지만, 그런 사명을 받지 아니한 목사의 가족들은 사명을 받은 목사 때문에 덤으로 고생을 한다는 그런 논리다.
그러나 이런 사고 방식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목사와 그 가족들은 모두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다. 목사 자신은 물른 그 부인도, 그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그 자식들도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말은 목사의 자식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꼭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종의 사명은 꼭 목사가 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직업을 가져도 무방하겠으나, 목사의 가족이 된 이상 무슨 직업을 가지던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런 ‘목사 가족의 부르심’에 대한 인식이 너무 부족한 것같다. 아버지인 목사는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지만 자식은 사명을 받지 아니했으니, 하나님의 종의 지세를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고 방식이나, 남편은 목회자의 사명을 받았으나 그 부인은 사명을 받지 아니했으니 한 남자의 아내로써의 역할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은 정말 위험하기 그지없는 비 성경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신학교를 다닐 때 우리들도 흔히 했던 말들이다. 이 말들이 많이 유행한 것은 사모라는 사람들이 목사의 내조자가 되지 못하고 교회에서 어떤 말썽을 일으키고, 교회 일에 지나치게 관여를 해서 성도들에게 지탄이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생겨진 말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모가 목사의 내조자로서의 일을 잘못한 것이지, 하나님의 여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목사의 돕는 배필’이 아니라는 말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목회자의 가정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아주 쉽게 알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우선 아담과 하와와 그 가족들을 볼 수 있다. 아담과 하와가 잘못했는데 그 가족들이 모두 벌을 받았고 그리고 그 후손들인 우리들에게까지 그 죄얼이 유전적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의 역사에서도 나타나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은 모두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헌신되고 제물이 되는 것을 본다.

에스겔은 상징적인 선지자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어떤 행위를 통해 전하는 일이 많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그 말씀은 에스겔에게서 가장 귀한 것을 빼앗아 갈 것인즉 너는 슬퍼하지 말며 애통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에 에스겔의 부인이 세상을 따나 버렸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가족이 죽으면 우리와 비슷한 모양의 상복을 입고 애곡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속이 였는데,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상복을 입을 수 없었으며 애곡을 할 수 없었다. 선지자의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객들이 찾아 왔을 때, 상복을 입지 않고 애곡하지 않는 선지자를 이상히 생각하여 그 이유를 묻자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의 입을 통해 선포되기 시작했다.
“너희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사랑하는 사람이나 소중한 사람이 죽어도 애곡할 수 없을 때가 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사랑하는 아내를 제물로 삼아 그 완악한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려 한 것이다. (겔 24:15이하)

호세아는 고멜이라는 아내를 얻었다. 그런데 고멜은 창녀였으며 부정한 여인이 였다. 그러나 호세아는 고멜을 사랑했다. 그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가정을 버렸을 때도 몸값을 준비해서 고멜을 다시 찾아온다. 호세아와 고멜 사이에는 자식들이 있었다. 그 자식들의 이름은 ‘암미’와 ‘로암미’ 였으며 그 뜻은 ‘내 백성이라’고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태여 난 자식들의 이름은 ‘루하마’와 ‘로루하마’인데 그 이름의 뜻은 ‘내 사랑’ 이라는 뜻이요 ‘ 내 사랑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어느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지을 수 있을까 마는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런 이름을 지어 지식을 불렀다. 호세아의 아내 사랑과 자식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그 백성들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의 보여지는 제물’들이 였다.  

구약에는 그렇다고 해도 신약 시대는 그렇지 아니한가? 아니다.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오늘 우리들의 시대에나 하나님께서는 목회자와 그 가족들을 모두 활용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 백성들에게 전하시고자 하신다.
언제나 우리는 우리들은 변하지만 하나님은 변치 아니하신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볼 때 변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전달 방법이 아니라, 우리들의 세속적인 사고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시인해야 한다.

목회자와 결혼을 한 여자는 그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아니했다고 해도 목회자와 결혼한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며, 목회자의 자식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부리심을 받고 안 받고를 막론하고 목회자의 지식으로 세상에 태여 난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많은 목회자의 부인들이 목회자의 부인이 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여종으로써의 긍지와 자부심과 영광과 축복을 인식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목회자가 겪어야 하고 감당해야 하는 조그마한 어려움에 견디지를 못하고, 목사의 아내가 된 것이 인생의 무슨 엄청난 손실이나 된 것처럼 “당신은 목사지만 나는 목사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자기 사명을 망각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목회자인 남편을 하나의 직업인으로 전락시켜서 전화 끊어 놓기 따위의 작태나 벌리고 있다면, 남편인 목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께서 목회자에게 아내를 주신 것은 아담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돕는 배필’이 되도록 하신 것인데, 돕기는 커녕 오히려 하와와 같이 되어, 하나님의 종인 목사에게 걸림돌이 된다면 이에 더한 죄가 있을까? 목회자의 고생은 목회자 아내의 고생이며, 목회자의 영광은 목회자 아내의 영광인 것을 왜 모르는가?

자식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목회자의 자식이 된 것을 한탄하는 사람이 있다. 목회자의 자녀가 된 것이 인생의 무슨 큰 손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일차적인 책임은 목회자 자신과 그 부인에게 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대단히 불유쾌하고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해서 목회자의 자식으로 세상에 태여 나 세상을 살아 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사람들에 대해여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부끄럽게 생각하므로 나도 너희를 부끄럽게 생각하겠다”는 말씀이 적용되면 결국 누가 인생살이에 크나 큰 손실을 보게 될 것인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종이 된 것, 하나님의 종을 내조하는 아내가 되어진 것, 하나님의 종의 가정의 자녀로 세상에 태여 나고 자라는 것, 그 이상의 영광된 일이 있을까? 우리는 모두 죄인인 것을----

 

 

3). 전도사에게 딸을 시집 보내지 않는다는 사모.
내 친구 목사 가운데 썩 좋은 자식을 둔 목사가 있다. 그의 아들은 서울 대학교 철학과를 나와 합동측 총신에서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 장래가 촉망되는 전도사다. 그런 그를 보고 옆에 있는 친구 목사가 같은 친구 목사 딸을 중매했다. 그리고 전도사 아버지와 딸의 아버지도 친구 사이였기 때문에 서로 만나 아들과 딸에게 좋은 결실이 있어지도록 노력하자는 內約을 했다. 목사인 딸의 아버지도 그 친구의 전도사 아들을 좋아하고, 전도사의 부모도 친구인 목사의 딸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 중매가 혼사로 이어지지를 못하고 끝나 버렸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양쪽 부모들이 서로의 자식을 두고 혼사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뜻밖에 일이 생겼던 것이다. 아니 일이라기보다는 서로 예측하지 못한 생각의 거리를 간파했다는 말이 올바른 것같다. 즉 딸의 어머니가, 그러니까 목사의 사모님께서 전도사의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렇게 좋은 아들을 왜 신학교에 보내서 전도사를 만들었어요?」
「왜 전도사면 안되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다른 일을 하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전도사가 어째서요. 목사가 될 것 아네요.」
「목사 보다 더 좋은 직업이 얼마든지 있는데------- 아드님은 좋은 직장을 가질 수도 있잖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전도사의 어머니는 이 혼사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면서 그 목사의 딸과는 혼사를 치룰 수 없다고 확인했다. 상대방도 의사나, 판, 검사 출신이면 몰라도 전도사와는 결혼을 시킬 수 없다고 생각을 해서인지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4). 후계자 걱정을 하면서도 아들을 목사 되게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나이가 나이인지라(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 후계자 문제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평생을 하나님의 일에 종사하여 세운 교회를 누구에게 맡겨야 더욱 더 성장하고 바른 교회로 이끌 수 있을 것인가를 심각히 생각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회에 부목사나 전도사를 대할 때도 사람 살펴보기를 예사롭지 않게 되었다.
후임자는 은퇴를 생각하는 목사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교회는 물른이지만, 목사의 노후 생활이나 말년의 모든 것들에 대한 국가적으로나 총회적으로 확정적이며, 안정적인 대책이 없는 우리들의 현실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요사이 많은 목사들이 교회의 후임자를 염두에 두고 아들들을 목회자로 양성하기도 하고, 딸들을 유능한 전도사에게 시집을 보내 후계자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많은 것같다.
그러나 목사의 친자나, 사위가 선친이 섬기던 교회를 맡아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는 많은 저항이 있다. 항간에 일어나고 있는 어떤 교회의 사건들은 이 문제에 대한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왜 교회가 자격도 있고 유능한 목사의 자식들을 목사의 후임자로 받아들이기를 좋아하지 않는지는 다른 지면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중대한 후임자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목사들은 자식들을 목회자로 헌신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자식된 본인이 목회자 되는 것을 싫어해서라고 한다. 뚜렷한 직업도 없고, 세상을 목사인 아버지 보다 더 유능하게 살 만한 능력도 보이지 않고, 인생에 대한 뚜렷한 의식도 없으며, 자기 생활도 제대로 꾸려 가지 못해서 이리 저리 방황하면서도 결단코 목사가 되는 것은 거절하는 그런 아들들이 있다. 참으로 한심스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된 것 또한, 목사와 그 부인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해야 한다. 목사의 자식들에게 목사의 자식에 된 것에 대한 영광과 긍지를 심어 주도록 해야 한다.
나는 목사의 자녀들이 세상살이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후에 목사의 자녀가 아닌 것처럼 살아 왔던 일을 후회하면서 교회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그러나 그가 그런 깨달음을 가지고 교회 생활에 적극성을 띈다고 해도 교회에 어울리지 못하고 물위에 기름 돌 듯 외톨이가 되고 마는 경우를 보았다. 목사가 자식들은 엘리 제사장의 자식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키워서도 안되고, 제단에 잘못된 불을 들이다가 죽은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민 4:4)처럼 키워서도 안된다. 하나님의 종의 모든 가족들은 모두 하나님의 종인 것이다.

사무엘은 뛰어 난 하나님의 종이였지만, 그가 나이가 많아 제사장과 선지자의 임무를 마쳐야 하게 되었을 때, 그 백성들은 사무엘의 아들을 거부하고 ‘사울’을 선택했다.(삼상 8:1-5)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가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 낸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 가장 뛰어 난 사건은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일이라 할 것이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10번씩이나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시켜 주셨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삭 사건(창 22:1 이하)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는 약속을 확인하시지 않고, 약속하신 것을 본격적으로 실현해 주시기 시작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을 받아도 되겠다는 하나님의 아브라함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건에서 절대적으로 간과해서는 안되는 사실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렇게 신뢰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일, 즉 이스라엘 민족을 만들어 하나님의 뜻을 온 세상에 전하시고자 하시는 구원 사역이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이삭에게 대물림이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삭이 그 일을 대물림 받더라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확신이 하나님께 있었음으로 약속의 실현이 구체성을 띄고 이루워 지게 된 것이다.
이삭의 믿음과 순종,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질과 충성스러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신뢰와 축복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이지만, 그 아버지의 믿음을 따라 되어진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아브라함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이 많다. 그러나 그 많은 일 가운데 가장 뛰어 난 한가지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대물림하여 감당할 수 있는 자식을 길렀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 
우리는 우리들의 지식들을 하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되는 구원 사역의 한 부분을 잘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으로 길러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종으로 부끄러움이 없지 않을까 싶다.

 

 

5). 강단이 불을 지른 목사의 아들.
한국 교회가 다 아는 어떤 목사님이 계시다. 그 분은 6.25 사변에 부상을 당하여 인생살이를 비관하며 사셨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변화된 후, 우리 한국의 교회를 위해 큰 일을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나와 우리 가족들은 그 분의 기도원에 가 많은 은혜를 받았으며, 그 분이 기도원을 찾아 온 성도들을 위해 은혜를 받게 하고자 애쓰시던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되고 은혜가 되었던 분이다.
그 분 목사님뿐 아니라, 그 분의 며느리는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은혜를 끼친 설교가 였다. 사람들은 목사님 보다 그 며느리를 더 선호하여 기도원을 찾는 경우도 많았다. 그 며느리를 우리 교회에서 초청하여 부흥회를 한 일이 있었는데 소문에 소문이 나서 성전이 미어 터지도록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며, 특별히 강조하지 않아도 많은 헌금을 해서 부흥회 역사상 가장 많은 결신 자와 은혜가 쏟아진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의 아드님 되시는 전도사는 그렇게 인기가 있는 것 같지를 않았다. 우선 전도사는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다. 실력이 없어 목사 고시에 낙방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것은 전도사가 소위 일류 대학을 나온 머리 좋은 사람이 였기 때문이다. 왜 목사 안수를 받지 않고 있는지 잘 모른다. 목사가 되는 것이 죄송스러워서인지, 아니면 전도사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겸양의 미덕에서인지, 또는 목사라는 명칭에 어떤 갈등을 가져와서 그런지, 좌우간 알 수 없는 이유가 그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끔 은혜를 사모하는 수많은 성도들에게 그가 설교를 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아버지의 후광도 있었겠으나, 순수하게 보아도 성도들은 그를 사랑하고 사모하며 그를 통해 어떤 은혜를 받고자 하여 열광하고 환영했다.
나는 우리 성도들을 데리고 그 기도원을 찾을 때마다 그를 보면서 부러운 마음을 금하지 못했다. 저런 은혜로운 아버지의 아들로 태여 나 목사가 되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은혜를 사모하는 수많은 성도들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은혜를 받는다는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영광이 얼마나 큰 것인가? 평생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는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정말 부러운 전도사였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 들리는 그 자녀들의 소식은 정말 우리들을 우울하게 하고 답답하고 안타깝게 했다. 그 분들의 가정이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문이다. 나는 그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며, 설마 그런 일까지 있을까 생각을 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목사님이 돌아가신 후에, 그 기도원에 가보면 기도원의 분위기가 전혀 달라져 있다는 것이다. 물른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 분의 아들이 기도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며느리 되신 분도 더욱 더 열심히 찬송을 하고 설교를 했다. 그러나 기도원은 그 전과 같지 않았다. 엄청난 은혜를 체험하고 기도원을 운영하시며 설교하시던 권능 있는 아버지와, 그런 체험과 능력이 부족한 아들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기도원을 운영할 능력도 없어 보이고, 그런 사명도 없어 보였다. 그것이 문제다. 얼마 후에 아들과 며느리는 각각 어떤 곳에 교회를 개척한다는 소문이 들렀는데, 그 개척 교회가 바로 내가 섬기는 우리 교회에서 멀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 분들은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되지 않아, 다른 곳으로 교회를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그 분들의 가정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을 했다.    
그런데 능력 있으신 아버지 목사가 한참 열심히 일하시고 있을 때, 그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도원에 가면 늘 들을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강단에서 예화가 되기도 하고, 기도하려 간 사람들의 숙덕이는 말에서 들리기도 했다. 그 내용은 그 아버지가 서울의 어떤 곳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있을 때, 아버지를 핍박하는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들로 인해 고통 당하는 아버지를 보다 못한 아들이 강단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그 일을 철저히 회개하고, 고통 당하시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어 목사로 헌신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교회 강단에 불을 지를 수밖에   없었던 격정이 그 아들에게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일이 하나님에게 어떤 일로 보여졌을까?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사님의 무덤은 수많은 성도들이 모여 은혜를 받으며 찬송하던 집회 장소가 잘 내려다 보이는 산 중턱에 있다. 나는 목사님의 산소에서 수많은 성도들의 우렁찬 찬송 대신 스산한 바람 소리만 들리는, 그 때 은혜를 받았던 곳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써 부끄럽지 않는 길이 어떤 길인가를 골똘히 생각해 보기도 했다. 

 

6). 목사의 아들로 인해 고민하는 아버지와 교회.
내 동서가 부목으로 있던 교회는 60년대에도 이름을 날리던 부흥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교회다. 엄청나게 잘 지은 큰 성전과 새로 재개발이 되어 낡고 초라한 아파트는 모두 철거가 되고 화려하고 넓은 고급 아파트가 빼곡이 들어 서 있는, 그야말로 황금 어장의 한 가운데, 교회는 그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전도 안해도 부흥될 수 있는 입지적인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는 교회다.
그런데 그 교회가 지금 심한 아픔과 고통을 당하고 있다. 교회가 부흥되기는 커녕 점점 더 힘을 잃고, 아름다움이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목사님이 너무 나이가 많아져서 목회를 제대로 하지 못하시는데 있다. 설교도 잘 하실 수 없고, 심방도 할 수 없으며, 새로 지은 새 아파트에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는 성도들을 유치할 아무런 대안도 없이 그저 한 가지 일에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 모이는 오래된 성도들은 목사와의 정리 때문에 교회를 떠나지 않을 뿐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 전혀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고, 목사의 절대적인 권력 앞에 기를 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형편에서도 한가지 일만은 줄창 주장하고 고집하면서 말없이 목사님의 방침에 저항을 하고 있다. 그런 교회의 내부적 어려운 사정으로 인해 새로 이주한 성도들이 그 교회를 방문했을 때 전혀 은혜를 받지 못해 인근의 다른 교회로 가 버리는 사태가 계속해 발생하고 있다.
그러면 목사님이 그렇게 신경을 쓰며 성도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며, 그런 목사의 간절한 소원을 말없이 물리치기만 하는 성도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목사의 아들 문제다. 목사의 아들은 인류 대학을 졸업하고 유명한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교회와 아버지가 이사직으로 섬기는 교단의 신학교의 기대 속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모든 사람들은 그가 공부를 많이 해서 신학 대학의 이름 있는 교수가 되면서, 동시에 아버지가 그렇게 애를 써 세운 교회를 맡아 더욱 더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 낼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 올 것을 기다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보다 몇 년이나 더 공부를 하고 돌아 온 아들은 성도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무슨 원인인지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돌아 온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 짓을 하고 그는 돌아왔다. 아버지 목사님은 돌아 온 아들을 방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기 교회의 어떤 집사와 함께 기도원을 운영하면서 목사로서의 수업을 쌓도록 조치를 했다. 그러나 아들은 그곳에서도 적응을 하지 못해서 몇 달이 못되어 기도원에서 나와 버렸다.     
그렇게 되자, 목사는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기 위해 모든 잡음의 요소를 제거하기 시작을 했고, 교회가 목사의 최 측근들로 재정비가 되자 아들을 위임 목사로 청빙 하기 위한 투표를 실시했다. 목사는 지금 남아 있는 성도들은 절대적으로 자기와 아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들이 교회를 맡는다는 것에 조금도 의심이 없었다. 그러나 투표의 결과는 지극히 실망스러운 것이다. 절대적으로 아들을 목사의 후임으로 위임할 수 없다는 의사를 성도들이 표현 한 것이다. 목사는 너무나 놀랬다. 자기를 반대하고 반란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공부를 제대로 하고 오지 않은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목사가 아무리 아들을 부탁해도 실력이 없는 그에게 한 시간도 배려해 줄 수가 없었다. 목사는 모든 것을 잊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이 일로 사모님은 크나 큰 충격을 받아 하반신이 마비되는 고통을 당하기 시작을 했다. 목사는 아들 문제를 이대로 놔 둘 수가 없었으며, 이렇게 물러 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로 말하고 다시 투표를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여전했다. 이렇게 몇번인가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교회는 점점 더 괴로움과 고통을 받았다. 새로 이주한 좋은 성도들을 맞아들일 분위기가 전혀 아니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목사님은 아주 유명한 부흥 목사님이시고, 그 교회는 강남의 모처에 웅장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나 못난 한 사람으로 인해 크나 큰 손실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못난 인간은 하나님의 종으로써의 사명도 없고, 사명이 없으니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부모도, 교회도, 학교도 모두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한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

나는 그 교회가 지금도 그 모양인지 다른 좋은 목사를 모시고 상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2년전까지는 말한 그대로 괴로움이 많은 교회였다. 그런데 그 아들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나님께서 그를 태여 날 때부터 미리 미리 마련한 모든 축복과 은혜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까?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나는 그 해답을 여러분들이 찾아내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런 비극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7). 사고로 죽은 아들로 인해 교회를 사임한 목사님 이야기.
내가 군목으로 원주 육군 병원에 근무하고 있었을 때 있었던 일이다. 병원에 있다 보니 전방에서 사고로 사망한 병사들이 모두 병원으로 후송되어 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많은 병사들이 사고로 사망한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랬다. 일주일에 2번 내기 어떤 때는 4번 정도까지 사고로 사람이 죽어 병원으로 실려 왔다. 처음에는 일일이 사망한 사람들을 위해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찾아 온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그런 일이 너무 비일비재하다 보니 그 일에만 매달릴 수가 없게 되어 차츰 사망 사고에 대한 관심을 잃어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많은 사고 가운데 정말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병원에 출근을 했더니 우리 군종 사병이 어젯밤에 사고로 죽은 사람이 영안실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죽은 사람은 며칠만 있으면 제대를 할 사람인데 마지막 제대 휴가를 다녀와 죽어 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늘 하는 것처럼 영안실에 가 관속에 있는 그를 잠깐 살펴보고 사무실로 돌아 왔다.
그런데 오후가 되어서 어떤 분이 나를 찾아 왔다. 그 분은 그 사고 사망한 병사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부산의 모 교회를 시무하는 목사님이셨다. 나는 그 목사님을 만나고 서야 내가 너무 사망자에 대해 소홀히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로 그의 장례식을 해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이삼일 후에 그 목사님 때문에 마음은 달라져 버렸다. 졸지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잊어버린 부모의 심정, 그것은 한마디로 참담 바로 그것이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 목사는 내게 적극적으로 매달려 그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심정을 토로하면서 도움을 구했다. 그런데 그 분이 내게 바라는 도움을 나는 줄 수 없었다. 그 죽음의 원인을 밝혀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 였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당한 부모의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 원인을 구명할 수 잇는 힘이 내게는 없었으며, 더욱이 아들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장례식도, 시신의 인수도 거절한 체 흩트려진 몸가짐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부대 내를 동분서주하면서 배회하며 다니는 목사님의 모습은 참아 볼 수 없는 민망 그것이 였다.    
나는 군대에서 사고 사한 사람들의 죽음을 원인 규명도 없이 단순 사고로 처리하는 것을 찬성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의 경우에 상당한 지위와 힘이 있는 사람도 그 원인을 밝히 밝혀 진상 규명을 하고, 누구를 처벌한다는 것이 결단코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목사님과 유족들에게 차마 하기 어려운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목사님의 심정이야 오직 하시겠습니까 마는 저로서는 이런 문제를 규명하는데 힘이 되들일 위치에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제가 병원에 있으면서 몇 번 보았지만 대개의 경우 처음에는 강력히 진상 규명을 요구하다가도 시간과 금전적 손실만 보게 되고, 더욱 더 마음이 상하게 된 후에 현실을 받아 드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목사님께서도 이 점을 잘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내 말에 더욱 더 분노하고 좌절하며 절망했다. 그러면서 이 일에 대한 진상을 확실히 밝혀 아들을 죽인 놈들을 처벌받도록 하겠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렇게 시간이 자꾸 흘러가면서 아무 책임이 없는 병원 당국자들은 시신 보관하는데 짜증을 내고, 유족들이 목사인 것을 알자 나에게 일이 빨리 처리되도록 설득하게 했지만, 나로서는 정말 난감하기 그지없는 일이 였다. 그렇게 한 동안 부산과 원주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목사님 보기도 딱하고,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면서 하소연하고 화를 내는 목사님에게 시달리는 병원 당국자들도 딱하고, 그 사이에 끼어 이러 지도 못하고 저러 지도 못하는 무능한 내 자신도 한심스러운 지경이 얼마나 지난 후에, 결국 목사님은 아들의 시신을 화장하도록 허락하였다. 한 줌의 제로 변해 버린 외아들의 죽음을 품에 품고 한없이 통곡하는 어머니와 망연자실하여 절망하는 목사님은 정말 보기에 딱했다. 그러면서 나는 우리들 믿는 사람들이, 더욱이 목사님께서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절망이지만 아들의 죽음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의연함을 보였으면 결과적으로 훨씬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을 것을, 하고 생각하니 좀 아쉽기도 했다.    
그렇게 마음에 오래 남을 사고 사 사건을 잊어 갈 무렵, 나는 뜻밖에 그 목사님의 소식을 부산이 고향인 우리 군종 사병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목사님! 지난번 죽은 목사님 아들 있잖아요.」
「그래, 뭔데----」
「이번에 휴가를 갔더니 그 목사님의 일이 부산 지역에 소문이 나 있더라구요.」
「그래? 무슨 소문------」
「목사님이 교회를 사임하시고 어디론가 가 버리셨다는 데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들이 군대에서 사고로 죽은 일이 교회를 사임할 무슨 조건이 되나?」
「그게 아니고요. 일이 딱하게 되었더라 구요.」
「무슨 다른 일이 또 있었어?」
「죽은 그 사람이요. 그 교회 어떤 아가씨와 약혼을 한 사이였대요. 제대를 하면 곧 결혼을 하기로 한 모양인데 그런 일을 당했대요.」
「그래서----」
「그런데, 그 아가씨가 임신 중이였다지 뭐예요.」
「뭐. 임신??」
「그래서요. 이 사실이 교회에 알려져서 말썽이 생겼대요. 그러자 목사님이 견딜 수 없게 되었다지 뭐예요. 몇몇 교인들이 만류도 하고 한 모양인데, 아들이 죽은데다 결혼도 안 한 아가씨에 대한 책임도 있고 해서 목사님이 교회에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듣고 보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불행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어떤 뜻도 분명히 있으시겠으나, 그 목사님의 가정을 좀 잘 봐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진심으로 동정이 갔다.
죽은 아들의 약혼자가 임신을 했다는 것은 목사가 아닌 다른 사람일 경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별반 중요한 문제가 아닐 지라도 목사에게는 목사 자신의 일들과 그 가족들의 일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함에 치명적 결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사건을 잘 말해 주었다.
이 일을 보면서 나는 우리 아들에게 아주 중요한 교육을 해야겠다는 것을 명심했다. 당시에 우리 아들을 아주 어렸지만, 이 일이 잊혀지지를 않아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인생에서 경계해야 할 세 가지 교육을 하기 시작했다.
그 첫째는 이성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돈에 대한 것이며, 셋째는 말에 대한 것이 였다. 즉 여자 조심, 돈 조심, 말 조심이 였다. 여자에 대한 것은 여자 친구가 생겨도 결혼할 사람이 아니면 절대 손을 자아서는 안된다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어찌 보면 이런 교육은 참으로 따분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게 되면 안아 보고 싶어지고, 안아 보면 또 다른 것을 요구하게 된다는 그런 식의 교육이 였다. 그리고 남녀간에 한 번 실수가 평생 살아가는데 마음의 아픔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더욱이 장차 하나님의 종이 될 사람은 사람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떳떳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몸 안과밖에 이성으로 인한 약점이 있으면 평생 그 멍에를 지는 고통이 따른다고 했다. 이런 교육은 우리 아들이 자라면서 가끔 계속되었으며 그래 그런지 장가를 가게 된 지금까지도 여자 문제로 인해 실수하는 것같지는 않다. 돈과 말에 대한 것들은 다음에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펌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가장낮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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