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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박봉수목사

감동이 있는 삶 창세기 41:37~40

최근에 대학가에 전에 볼 수 없었던 플래카드나 포스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답니다. “선영아! 생일 축하해” “선영아! 우리 만난 지 777일 되는 날이야” “선영아 사랑해!”... 친구나 애인을 감동시키기 위해 저지르는 일종의 깜짝 이벤트성 감동작전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재기와 대담함에 그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감동 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감동만 되면 지난 월드컵 때 보듯이 길거리로도 뛰쳐나가고 땅 바닥에 앉아서 하루 종일 미친 듯이 소리도 지릅니다. N세대 용어로 ‘feel이 꽂히면’, ‘뚜껑이 열리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런 감동 받고 싶어 하는 시대 흐름을 놓칠 리 없는 기업에서는 영업 마케팅 전략도 이름하여 ‘고객 감동 전략’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고객을 만족시키는데 초점을 두고 ‘고객만족 전략’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안 되고 고객을 감동시키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감동은 모두가 인위적이요, 의도적이요, 가공된 것들입니다. 억지로 감동을 이끌어 내려고 만든 일종의 ‘쑈’요 ‘이벤트’일 뿐 입니다. 감동 아닌 감동을 상품화한 상업주의적 감동입니다. 사실 진정한 감동은 순수함에서 나옵니다. 진정한 감동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깁니다. 진정한 감동은 잔잔함에서 우러나옵니다.

시인 박노해는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이 나날이 새롭다는 것을 깨닫고 감동하고, 울타리에 피어난 개나리꽃에 스며든 새 봄에 감동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따뜻한 밥상을 대하며 감동하고, 잊었던 파랑새 소리를 들으며 감동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창조력을 잃어버린 사람이요,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더 이상 영적 성장이 멈춰버린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감동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감동시켜달라!’ 외쳐보지만 정작 감동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창조력을 잃어버리고 영적 성장이 멈춰버린 시대입니다.

 

감동을 찾은 사람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감동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감동할 것을 감동할 줄 압니다. 감동할 때 감동할 줄 압니다. 작은 것에 감동하고, 순수한 것에 감동할 줄 압니다.
어떻게 감동이 되살아날까요? 우선 주님을 닮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장 4절을 보면 첫째 날 빛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무슨 말입니다. 빛을 만드시고 그 빛을 보시면서 감동하셨다는 것입니다. “야! 좋다” “야! 멋지다”... 엿새 동안 하루에 하나씩 만드시면서 매일 감동을 연발하셨습니다. 특히 마지막 날 인간을 만드시면서 모든 창조를 끝내시고는 더욱 크게 감동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야! 너무 좋다” “야! 너무 너무 멋지다!”

대하 1장을 보면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리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기브온 산당으로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만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제사를 드리되 전무후무하게 번제를 드리되 일천 희생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1:7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밤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하나님께서 크게 감동을 받으신 것입니다. 솔로몬이 기도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너무 감동을 받으셔서 무엇이라도 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감동하실 줄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일을 보고 감동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에 감동하십니다. 우리의 정성을 다하는 봉사와 헌신에 감동하십니다. 예상치 못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크게 감동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하나님을 닮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동하고, 하나님의 솜씨를 보고 감동하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의 파노라마를 보고 크게 감동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술의 대가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음으로 우리에게 감동이 되살아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성령의 감동입니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감동이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볼 때 “어떤 것을 보고 들어서 깊이 느껴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성경 구약에서 “하나님의 신이 감동했다”든지 신약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자극하시고 격려하셔서 그 마음이 움직이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감동이 없는 시대에 살면서도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 가운데 오셔서 만져주시고 자극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면 우리 마음이 움직입니다. 마음이 열립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벅찬 감동을 받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감동적인 일들을 하게 됩니다.

 

감동이 있는 삶

이렇게 감동을 되찾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감동이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첫째, 깨달음의 감동이 있습니다.

그리스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벌거벗은 수학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시라큐스의 왕의 부탁을 받고 왕관에 금과 은이 어떤 비율로 섞여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연이 목욕탕에 갔다가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들어갔다가 부피만큼의 물이 넘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는 순간 벌떡 일어나서 벌거벗은 채로 “휴레카”를 외치며 집으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이렇게 부력의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깨달음의 감동이 너무 커서 벌거벗은 채로 집으로 달려갈 정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에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성령이 감동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눅 9:43-45을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주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요 16:13을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행 2:36을 보면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령 받자마자 베드로가 예루살렘 성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년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고 나니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게 되었고 그것이 무슨 뜻이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우리 심령을 감동하시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신다는 성경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게 되고 온 몸에 전율을 느낄 정도로 큰 감동을 받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 지 몰랐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게 되고 감당할 수 없는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눈물로 찬양하게 됩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성령의 감동 없이는 부를 수 없는 찬양입니다. 큰 감동을 느끼지 않고는 부를 수 없는 찬양입니다.

 

둘째, 감사의 감동이 있습니다.

어느 시골교회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이 교회에서는 추수감사예배를 추수한 곡식을 가마니 째 강단에 쌓아놓고, 각종 과일과 채소들도 가득 쌓아놓고 추수감사예배를 풍성하게 드렸습니다. 져녁 예배도 마친 뒤 교회당은 적막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교회당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자꾸 들리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사택에 계시던 목사님 부부가 이상해서 본당으로 달려와 보았습니다. 곡식과 과일 같은 것들이 본당에 있어서 도둑이 들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불을 켰습니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곱추인 교회 집사님 한 분이 눈물을 흘리고 땀을 뻘뻘 흘리며 춤을 추고 있는 것입니다.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자기는 너무 가난해서 추수감사절인데도 변변하게 예물을 준비하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아픈 마음으로 주께 기도를 드렸는데 그 때 성령의 감동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그런 음성을 듣게 됐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 이 집사님은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곱추춤으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다고 생각해고 모두가 다 돌아간 뒤에 하나님 앞에서 감사의 공연을 한 것입니다. 감사의 춤을 추는데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저수지 봇물 터지듯이 터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땀만 흘리다 이제 눈물까지 흘리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감사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드리는 감사에 드리는 사람이 더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감동을 받으십니다.

주후 155년 2월 23일 서머나 운동경기장에는 구름같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서머나의 주고 폴리갑의 처형을 보기 위해서였다. 친구였던 섭정관이 가이사가 주시라고 외치고 예물을 드리면 살 것이요. 마지막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 때 폴리갑이 교회사에 빛나는 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86년간을 주님을 섬겨왔는데 단 한번도 주님은 나를 섭섭하게 하신 일이 없습니다. 내가 어찌 나를 구원해 주신 내 왕을 욕하고 배반할 수 있겠소” 사람들이 화형시키기 위해 기둥에 묶으려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두라 불을 견뎌내게 힘을 주신 주님께서 이 불길 속에서도 나로 하여금 움직이지 않고 남아있게 하여 주실 것이다.”

폴리갑이 이렇게 감동적인 순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86년간의 주님의 은혜에 진정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그 크신 사랑에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주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 감사는 우리에게 감사의 감동을 느낄 수 있게 해 줍니다.

 

셋째, 감동을 일으키는 감동이 있습니다.

행 7장을 보면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가 당당하게 설교를 합니다. 산헤드린 공회 회원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해 이를 갈았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논쟁이 조금 더 진행되는 가운데 공회원들의 분노가 점점 더 극에 달하게 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공회원들이 스데반을 성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돌로 쳐서 스데반이 죽게 됐습니다. 죽어가면서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기도 후에 그가 운명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 부분을 기록하면서 두 가지 주목할 반응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에서의 반응입니다. 55-56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이 감동적인 순교 장면을 하늘에서 주님께서 지켜보신 것입니다. 더 이상 앉아계실 수가 없어서 자리를 박치고 안타까운 마음에 일어나신 것입니다. 마치 감동적인 연주 장면에 기립 박수를 보내듯이 주님께서 큰 감동을 받고 일어서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큰 감동을 받고 주를 위해 드리는 헌신은 주님을 감동시켜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감동으로 감동받은 사람들만이 주님을 감동시켜드릴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뜻 밖의 인물들이 주님을 감동시켜드린 예가 많습니다. 한 예로 가나안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의 거절을 무릎쓰고 간청을 했습니다. 심지어 이방인으로 개취급을 받으면서까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마 15:27-8을 보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우리가 성령의 감동으로 주 앞에 서면 때로 우리가 주님을 감동시켜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감동 받고 싶어하십니다. 저와 여러분 때문에 주님께서 감동받으실 일이 많아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하나는 땅에서의 반응입니다. 58절을 보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고 했습니다. 물론 사울의 회심은 9장에 나옵니다. 그러나 누가가 사울의 이야기를 이 결정적인 장면에 쓰고 있는 것은 이미 이 사건을 지켜보고 있던 사울 곧 바울에게 감동이 시작됐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신약성서신학자들은 이 사건에서 사울의 마음 흔들리기 시작했고, 바로 여기서부터 사울의 회심은 준비되기 시작했다고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큰 감동을 받고 주를 위해 드리는 헌신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저들을 주께로 인도합니다. 주님을 위해 크게 쓰임을 받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는 두고 두고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입양하고 순교하는 그날까지 친아들처럼 사랑으로 돌보고 사랑했던 그 이야기는 당시 여수 애양원 식구들은 물론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도 큰 감동을 주었고, 저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견인차역할을 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감동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때문에 이 땅에 감동의 물결이 널리 널리 퍼져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동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갑니다. 억지로 만들어진 감동이 아니라 진실한 감동이 필요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이 감동은 성령의 감동으로부터만 올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 안에서 진정한 감동을 맛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 받은 바 감동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켜드리고, 또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성령의 감동 안에 살게 하소서.

주님을 감동시켜드리고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이 땅에 감동을 전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