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에게 보이신 예수님! (요20:19-23)
요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20: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더불어 구약성경에 이미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도 자신의 부활을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울러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하나의 분명하고도 역사적인 사실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일 누군가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구약성경도, 또한 자신의 부활을 계속해서 언급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실로 기술한 신약성경도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 사셨다는 사실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구약성경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자신의 부활을 언급하신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신약성경도 모두 그대로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일백 번 이상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적어도 열 번 이상, 그리고 적어도 오백 명 이상에게 친히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며, 확실하게 일어난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맨 먼저 마리아에게 보이셨습니다. 같은 날 저녁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로부터 여드레가 지난 후, 예수님은 도마를 위해서 또다시 보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맨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셨던 것은 예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애타게 찾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자신을 나타내심으로,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같은 날 저녁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들을 증인으로 삼아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로부터 여드레 후에, 예수님은 도마를 위해서 또다시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이는 도마의 부족한 믿음을 채워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내용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제자들에게 보이신 예수님(19절~20절). 둘째, 제자들을 보내신 예수님(21절). 셋째, 제자들에게 권세를 주신 예수님(22절~23절).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와 같이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믿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지불하셨고, 그 결과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셨음도 믿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찾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북돋우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권세를 주셔서, 그들을 예수님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도 찾아주시고, 우리의 믿음을 북돋우시며, 우리에게 권세를 주셔서, 우리를 예수님의 증인으로 삼으십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날마다 힘써 증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제자들에게 보이신 예수님(19절~20절).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날은 한 주가 시작되는 첫째 날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날을 가리켜서 일요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부활의 신앙을 가진 우리는 계1:10의 말씀에 따라서, 이 날을 “주의 날” 곧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맨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셨습니다. 그 후 마28:9에 의하면, 예수님은 같은 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다른 여자들에게도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그 때 여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한 누가복음 24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같은 날 낮에는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도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눅24:34에 의하면,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도 자신을 나타내신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같은 날 저녁에 되어진 일입니다.
요20:19 (1)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2)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3)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4)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20:20 (5)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6)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1) 때: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여기서 “이 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 날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이 날이 “안식 후 첫날”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성령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따라서, 이 날을 보다 자세하게 설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한 주의 마지막 날인 안식일, 곧 토요일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매주의 첫째 날, 곧 주일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로 새롭게 제정되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이 날을 강조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새 언약에 관한 모든 것이 주의 날에 다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주의 날이었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셨던 날도, 성령님이 강림하셨던 날도, 교회가 탄생한 날도, 성도들이 예배드리기 위해서 함께 모이던 날도 다 주의 날이었습니다.
행20: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고전16: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이처럼 교회는 매주의 첫날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로서, 하나님이 새 언약의 백성들을 위하여 새롭게 구별하신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바로 이 점을 나타내시려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은 안식 후 첫날임을 밝히셨습니다.
(2) 장소와 상황: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행1:13에 의하면, 그 때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어떤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행12:12에 의하면, 그 다락방은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집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때 제자들이 모여 있던 곳을 가리켜서, 흔히들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엠마오 마을로 가던 두 제자와 같이, 가까운 곳에 살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부득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습니다. 이는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열려있는 문들을 닫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아무도 허락이 없이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빗장을 단단히 걸어서 문들을 잠갔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로잡아 죽였습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자기들도 얼마든지 사로잡아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내용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서 유대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로 가자”라고 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제자들은 자기들에게도 같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사로잡히셔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자연히 제자들은 자기들도 유대인들에 의해서 사로잡혀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3) 찾아오심: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마18:20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예수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요14:18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것을 지키시며 또한 그대로 행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지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셨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 그 때 어떻게 예수님이 그 곳으로 들어오셨습니까?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문을 열어드렸기 때문입니까? 만일 그러했다면 눅24:37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때 제자들이 마치 유령을 보는 것처럼 놀라거나 무서워할 필요가 전연 없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때 예수님은 갑작스럽게 제자들의 눈앞에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부활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요20:6~7에서 밝히고 있듯이,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쌌던 세마포를 벗지 않고서도 그대로 세마포 밖으로 빠져 나올 수 있으셨습니다.
하기야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전에도, 이미 물위를 사뿐히 걸어가셨습니다. 하물며 이제는 부활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더 이상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대로 세마포도 통과하시고, 그대로 문과 벽도 통과할 수 있으셨습니다.
(4) 인사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Shalom to you!”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는 유대인들이 흔하게 사용하는 전통적인 인사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서로 만날 때나 헤어질 때, 또는 이웃을 방문할 때 늘 이와 같은 인사말을 서로 나누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19절에 이어서 다시 한번 21절에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때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의 관례적인 인사말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말씀에는 분명 보다 더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와 같이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평안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평안은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평안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일찍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그 평안 곧 평강을 여기서 실제로 그들에게 주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데서 오는 평안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예수님이 주신 이 평강이 우리 모두의 마음과 생각을 늘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5) 나타내심: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뒤에는,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셔야만 누구든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자신의 손에 있는 못 자국과 자신의 옆구리에 있는 창 자국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영화롭게 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입은 상처들은 예수님의 몸에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이 상처들을 영원토록 자신의 몸에 지니고 계실 것입니다.
계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몸에는 일찍이 죽임을 당하신 상처들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도,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입으신 상처들을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부활의 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부활의 몸은 말 그대로 몸입니다. 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의 몸은 눈에 보입니다. 그 몸을 만져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음식물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눅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24: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눅24: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이와 같이 부활의 몸에도 살과 뼈가 있습니다. 영이 아니라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에 있는 살과 뼈는 우리의 썩어질 육체와는 다릅니다. 고전15:42 말씀과 같이, 부활의 몸에 있는 살과 뼈는 영원토록 썩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부활의 몸은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쌌던 세마포를 풀지 않고서도, 그 몸이 그대로 빠져 나올 수 있으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잠긴 문을 그대로 통과해서, 제자들이 모인 곳으로 들어올 수 있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부활의 몸을 입으셨다고 해서, 그 몸에서 항상 찬란한 광채가 빛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여겼습니다. 또한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두 제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행인의 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변화 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었을 때는 달랐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났으며, 예수님의 옷도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또한 새 예루살렘에는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습니다. 그 곳에는 어린 양이 등불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부활의 몸은 필요에 따라서, 또는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땅에서의 몸과 같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하늘에서의 몸과 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경우가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감람 산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며,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셨습니다. 이는 땅에서의 몸과 같았습니다. 그러더니 예수님은 순식간에 하늘로 올려지셨습니다. 이는 하늘에서의 몸과 같았습니다.
빌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이와 같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우리의 낮은 몸도 부활의 몸 곧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우리의 영과 육 전체가 세세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의 것에 집착하지 맙시다. 땅의 것은 일시적일 뿐입니다. 늘 위의 것을 찾으며, 늘 하늘의 것을 생각하며, 늘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6) 반응: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바꾸어놓았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사로잡히실 때, 그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따라서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두 제자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결국은 제각기 각자의 길로 다 가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을 기쁨으로 바꾸었습니다. 엠마오 마을로 내려갔던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오게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기꺼이 순교하는 자리에까지 이르도록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우리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만 바라본다면, 우리의 소망은 더 이상 발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게 되실 예수님을 버리고 다 달아났던 제자들처럼, 우리의 소망도 결국은 산산조각이 나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친히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기쁨과 평강은 그만큼 커질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과 평강으로 늘 충만한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제자들을 보내신 예수님(21절).
요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먼저 마리아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자기의 증인으로 삼으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1) 평강을 주심: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예수님은 19절에 이어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Shalom to you!”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19절에서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없애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곳 21절에서는 그들의 사역을 힘있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많은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평안이,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이 항상 그들을 지켜주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빛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는 우리도 환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담대합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평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환난 많은 세상을 이기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보내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 사실은 요한복음 안에서만 40번 이상이나 언급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곧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라가셔야만 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세상에서 예수님의 뜻을 따라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그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예수님의 부활을 세상에 널리 증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제자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행2:23~24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행3:14~15 너희가....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행4:10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5: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와 같이 똑같은 증거가 사도행전 2장에서도, 사도행전 3장에서도, 사도행전 4장에서도, 사도행전 5장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이후로도 같은 증거는 계속되었습니다. 증거의 내용은 한 마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너희가 예수님을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도다.”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충성스러운 증인들이 되어, 예수님의 죽으심과 예수님의 부활을 힘써 증거했습니다. 그리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처럼, 그들도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기꺼이 순교하는 자리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때 마가의 다락방에는 예수님의 사도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엠마오 마을로 내려갔다가 되돌아온 두 제자와 같이 사도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곳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예수님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여기 있는 우리 모두도 똑같이 예수님의 증인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힘써 예수님의 죽으심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과연 우리는 얼마나 힘써 복음을 전했습니까? 혹시 지난 몇 개월 동안, 우리는 세상에서 단 한번도 예수님의 증인이 되지를 못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이는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이는 너무나도 큰 비극입니다.
요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요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요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상의 말씀들은 모두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의 관계를 들어서,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그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할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충성스러운 증인이 되어, 하늘 나라의 영원한 영광을 받아 누리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제자들에게 권세를 주신 예수님(22절~23절).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는 그들을 예수님의 증인으로 삼아서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을 그대로 세상에 보내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명 감당에 필요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1) 성령님을 주심(22절)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은 바로 앞 절에서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그들을 예수님의 증인으로 삼아 세상에 보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는 마치 창2:7에서,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심을 이와 같은 동작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령님을 받아야,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증인의 역할을 힘있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때 제자들이 성령님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이 때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셨다면, 여드레를 지난 후에 그들이 또다시 문들을 닫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요21:4에서처럼, 그들이 디베랴 호수에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요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로 올라가시고 난 뒤에,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실 것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시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올라가셔야만 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잘 아는 행1:8 말씀에서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실 것입니다. 그 후에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그리하면 제자들은 권능을 받게 되고, 그 때 비로소 그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때 예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자신이 친히 성령님을 그들에게 보내주실 것을 여기서 분명하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언제 성령님을 그들에게 보내셨습니까?
이 때로부터 40일이 지난 후에 예수님은 승천하셨습니다. 그로부터 또 십 일이 지난 오순절을 기해서, 예수님은 성령님을 제자들에게 보내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제자들은 권능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한꺼번에 수천 명을 회개시키는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롬8:9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전12:3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와 같이 우리는 이미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 때, 성령님은 우리에게 임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성령님의 권능이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담대하게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죄 사함의 권세(23절)
요20: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는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아무나 붙들고 “내가 당신의 죄를 사하노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당신의 죄는 그대로 두노라”고 말할 권세가 있다는 뜻입니까? 또 그렇게 말하면 그대로 된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이는 분명 그와 같은 뜻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막2:7에 이와 같은 질문이 나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여기에 대한 대답은 자명합니다. “아무도 없느니라.” 그러기에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임의로 사할 권세가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도 천주교는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천주교는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실제로 죄 사함의 권세를 주셨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 권세는 교황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지금도 교황에게 죄를 사하는 사면권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사실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때 예수님은 사도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눅24:33을 보면, 분명 그 때 그 자리에는 사도가 아닌 다른 제자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그 곳에 함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때 예수님의 말씀은 사도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 곧 예수님의 교회 전체에게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전체가 어떤 사람의 죄 사함에 대해서 결정할 권한을 가진다는 뜻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은 뜻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분명하게 그를 향하여 이와 같이 말 할 수 있습니다.
“형제여, 자매여, 당신의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고의적으로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를 향하여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형제여, 자매여, 안타깝지만 당신의 죄는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우리에게 이와 같은 권세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컨대 어떤 사람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서,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이와 같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하실까요?”
그러면 우리가 그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글쎄요. 죄 사함의 권세는 하나님에게만 있으니까, 제가 감히 무엇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나요? 이 다음에 죽어보시면, 그 때는 알 게 될 것입니다. 부디 예수님이 당신의 죄를 용서하셨기를 바라겠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와 같이 말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당신의 죄는 분명하게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권세를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강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의 능력을 주셨고, 아울러 죄 사함을 선포할 수 있는 권세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신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있는 곳을 증거의 자리로 삼읍시다. 그리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 나라의 영광을 세세토록 받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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