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 (행 2:42-47)
우리가 신앙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성도의 교제가 믿음으로 고백하는 내용 가운데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우선 ‘성도의 교제’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라틴어로 된 사도신경의 원본에는 '코무니오 상토룸'(Communio Sanctorum)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영어로 이것을 ‘communion of saints’라고 번역했고, 이것을 우리말로 성도의 교제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성도들 사이에 있는 교제’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성도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교제라는 말은 성경 원어로는 ‘코이노니아’(Koinonia)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코이노니아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의 뜻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면 코이노니아라는 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코이노스’(Koinos)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이 코이노스라는 말은 ‘함께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함께 하며 서로 사귀고 가진 것을 나누면서 공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성도의 교제라는 말은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함께 하며 사귀고 나누면서 예수께로부터 받은 복음을 공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 안에서 믿음과 은사와 사명을 공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성도의 교제가 사도신경에 들어있을까요? 왜 성도의 교제를 믿음으로 고백하게 했을까요?
사도신경을 보면, 먼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라는 점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다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심판하시기 위해 재림하실 것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이런 신앙고백은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고, 경험으로 입증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만 믿음으로 고백할 뿐입니다. 성령이 도와주셔서 믿음으로 고백하고 후에 영적 체험으로 알게 될 뿐입니다.
성도의 교제도 이런 믿음의 고백의 대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의 고백도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고, 경험으로 입증할 수 없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때만 이런 성도의 교제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때만 성도의 교제가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공유지의 비극’이란 말이 있습니다. 미국의 생물학자인 가렛 하딘(Garrett Hardin)이 이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한 뒤 보편적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공유지의 비극이란 ‘지하자원, 초원, 공기, 바다에 있는 고기와 같이 모두가 함께 사용해야 할 자원을 마구잡이로 사용해 고갈될 위험에 처해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는 이런 공유지의 비극이 매일처럼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두의 재산이라 할 수 있는 바다 연안에는 물고기들이 씨가 말라가고 있습니다. 먼저 잡는 것이 임자라는 생각으로 촘촘한 그물로 잡다 보니 결국은 나중에 자기도 잡을 것이 없게 바다가 황폐화되고 만 것입니다. 쓰레기 봉투제를 실시한 뒤 남몰래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자기는 쓰레기 처리 비용을 아낄 수 있겠지만 피해는 모두에게 돌아가고 결국 자기도 피해를 보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이기적입니다. 철저하게 자기 이해타산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렇게 자기중심적입니다. 철저하게 자기의 관점에서 행동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로 코이노니아는 불가능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남과 공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고 나면 달라집니다. 아니 달라져야 합니다.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서로 깊이 사귈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기적인 우리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믿음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성도의 교제의 전형이 나옵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함께 더불어 살며 체험했던 성도의 교제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 우리도 함께 더불어 믿는 성도들과 함께 이루어 가야할 코이노니아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성도의 교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영적인 교제
오늘 본문 4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7절을 보면 저들이 날마다 성전에 모여 함께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저들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이 영적인 교제입니다. 성도들이 서로를 향해 영적으로 열려있어서 서로 영적인 교제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함께 말씀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양하고,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마 18:19-20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해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우선 이 말씀은 성도들이 두 사람 이상 함께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면 주님께서 그곳에 함께 계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영적인 모임을 가질 때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체험할 수 있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단 3장을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느브갓네살 왕에게 박해를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왕에게 총애를 받고 있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평소보다 7배나 뜨겁게 타오르는 풀무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너무 뜨거워 저들을 붙잡고 있던 사람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풀무불에 던져진 저들이 어떻게 되었나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단 3:25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함께 풀무불에 던져졌습니다. 아마도 저들이 풀무불 속에서 함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기도 자리에 주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지켜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사람들만의 교제가 아닙니다. 주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이 함께 모일 때 주님께서 그 자리에 함께 하십니다. 그야말로 ‘+1’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교제는 영적으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의 교제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면 더욱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할 수 있게 되고 응답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도들이 함께 말씀을 나누게 되면 혼자서 보다 주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고 또 그 말씀을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성도들이 함께 찬양하면 찬양 가운데 임하시는 주님을 뜨겁게 체험하면서 그 찬양이 하나님께 상달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겨울에 난로를 피웠습니다. 교실 한 가운데 무쇠로 만든 난로가 있고 그 안에는 조개탄을 넣었습니다. 석탄을 조개처럼 만들어서 조개탄이라고 합니다. 조개탄이 난로 안에 들어가면 정말 뜨겁게 활활 탑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알을 끄집어내어 보면 얼마 안가서 식어버립니다.
성도의 영적 교제는 이와 같습니다. 함께 있을 때 영적으로 불 붙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뜨거움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랑의 교제
오늘 본문을 보면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누가 모이라고 해서 모인 것이 아닙니다. 모이면 차비를 주거나 선물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모이고 싶어서 모였습니다.
그것도 매일 모였다고 했습니다. “하루만 못 봐도 못 살겠네!”라는 노래가사처럼 모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매일 모였습니다. 그리고 모일 때마다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 때 정말 기뻤습니다. 그리고 거리낌이 없었고 불편함이 없었고 순전한 마음으로 모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모일 때 성령께서 서로의 마음속에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모이고 싶어 했고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우리나라는 불명예스럽게도 자살대국의 오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8년째 OECD 국가 중에 자살대국의 자리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65세 이상의 노인 10만 명당 자살자가 81.9명입니다. 일본은 17.9명, 미국은 14.5명입니다. 우리나라 노인의 자살률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살은 본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특별한 질병 현상의 자살자 외에 자살자들 대부분 전조현상을 보이는데 그 때 공동체에서 그것을 알아차리고 예방조치를 위할 수 있다면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살전조현상은 이런 것들입니다. 먼저 자살하려는 사람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자살을 암시하는 말이나 글을 내비칩니다. 특히 자살하려는 사람의 80% 이상이 자살의도를 직접 말하고 글로 남기는 사람도 15~30% 정도입니다. 다음으로 자살 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심경을 토로 할 사람을 찾습니다. 친구나 선생님이나 목회자들에게 도움을 구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자살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의 변화를 보입니다. 명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말이 없다든지, 사회이슈나 돈에 초연해 진다거나, 잠을 자지 않거나, 먹지 않기도 하고 자신이 아끼던 귀중한 물건을 주는 등의 행동의 변화를 보인다.
그런데 이런 자살전조현상을 보이는데도 주변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자살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서로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여 자살전조현상을 돌아볼 여유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자살률이 점점 높아만 갑니다.
이런 시대상황 속에서 성도의 교제는 인간적으로 볼 때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시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서로를 보는 눈이 열립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열립니다. 마치 자석에 끌리듯이 서로에게 끌립니다. 그래서 함께 모이기를 좋아합니다. 함께 마시기를 좋아하고, 함께 음식을 먹기를 좋아하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이런 성도의 교제는 사랑의 울타리가 됩니다. 삶에 지친 사람들을 보듬어줍니다. 상처받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위로해 줍니다. 갈길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을 이끌어 줍니다. 낙심하고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 희망을 줍니다. 그래서 이 사랑의 교제는 성도들의 울타리가 됩니다.
나눔의 교제
오늘 본문 44절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저마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의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은 나눔입니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누가 시켜서 가진 것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도 욕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쓰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내놓았습니다. 필요한 사람들이 그것을 가져다 썼습니다. 그래서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 사이의 나눔이 실현되었습니다.
최근 빈곤층의 자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서울 세 모녀 자살 사건에 이어 울산에서도 모자가 생활고를 비관해 목숨을 끊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국민소득이 3만 불이라는 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가족이 동반해서 자살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 가지의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부의 편중 문제입니다. 우리사회가 갈수록 빈부격차가 커져가고 있고 빈곤층이 늘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은 허술한 복지체계와 사회안전망의 부실입니다. 극빈층에 대한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셋은 나눔의 실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진 자들이 점점 더 인색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에는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과 같은 부자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어느새 세계적인 기업들이 생겨났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부자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기부하고 나누는 부자들은 아직 생겨나고 있지 않습니다.
한 유치원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가난한 어린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집에 남는 장난감이나 인형이 있으면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둘러보니 놀지 않는 인형이 몇 개가 있는데 너무 낡고 형편이 없어서 가져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가져가지 않을 수도 없고 해서 지금 자기가 가장 아끼는 인형을 가져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옷도 깨끗하게 정돈하고 머리도 잘 빗어주고 예쁘게 해서 가져갈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져다주려니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래서 인형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밤새 울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인형이 눈물로 흠뻑 젖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눔은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많이 가지고 있다고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진 것이 적어도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나눌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 안에는 성령이 거하십니다. 이 성령께서 나눌 능력을 갖게 해 줍니다. 서로의 필요를 보게 해 줍니다. 그리고 내 안의 욕심을 버리게 해 줍니다. 그래서 손을 펼 수 있게 되고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의 능력으로는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영적인 교제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함께 예배하고 함께 기도하면서 그 안에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사랑의 교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면 사랑의 울타리를 만들어갑니다. 그리고 나눔의 교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서로 가진 것을 나누며 서로의 필요를 채워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런 성도의 교제가 더욱 풍성해 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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