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 가운데서 들려오는 말씀 (욥 38:1-7)
욥기는 욥이라는 한 사람이 겪었던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원래 그는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행복한 조건을 다 갖추고 살던 사람입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삶을 살았고, 자녀도 열이나 두었으니 유복했고, 재산도 많은 부자였고, 도덕적으로 흠 잡을 데가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탄의 시험과 하나님의 허락으로 거대한 폭풍우를 만난 듯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자식도 잃고, 재산도 잃고, 몸의 건강도 잃고, 아내마저 저주하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욥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이전보다 배나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40세까지 그 갑절의 복을 누리며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핵심 줄거리는 처음의 두 장인 1-2장, 그리고 마지막 장인 42장, 이 세 장에 다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욥기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3-41장에는 이 핵심 줄거리와 직접 관계가 없는 논쟁이 길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특히 3-37장에는 욥과 세 친구 간의 논쟁이 지루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에 한 치의 양보가 없는 논쟁이 이어집니다.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친구들은 저마다 다른 관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찌됐든 욥이 하나님 앞에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폭풍우 같은 고난을 겪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가 겪고 있는 이 폭풍우 같은 고난은 결코 자기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긴 논쟁 속에 욥의 감춰졌던 속마음이 드러납니다. 원래 욥은 고난이 닥쳤을 때 의연했습니다. 1:21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그리고 2:10을 보면 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이렇게 욥은 의연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원망하지 않고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지만, 그 속마음에는 결코 떨쳐버릴 수 없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왜 이런 고난이 자기에게 임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선하게 살아온 자기에게 왜 이런 고난이 찾아왔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고난이 자기에게 임하도록 내버려 두셨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긴 침묵을 깨뜨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욥의 이런 고민을 보시고 이에 답하시려고 입을 여신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폭풍우 가운데서 말씀하셨을까요?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형태가 여럿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왕상 19:12을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호렙산에서 만나셔서 말씀하실 때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격려하시고 새롭게 그에게 할 일을 말씀하실 때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설득하시고 격려하실 때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본문에 나온 것처럼 폭풍우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출 19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시내광야에서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권위 있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권위 있게 선포하실 때 폭풍우 가운데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욥에게 폭풍우 가운데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욥에게 권위 있게 말씀하시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욥과 세 친구 사이의 지루한 논쟁을 지켜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욥도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그 마음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더 이상 지루한 논쟁이나 말싸움을 그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권위 있게 알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폭풍우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폭풍우 속에서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른 말씀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대와 전혀 다른 말씀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받자옵기 힘든 말씀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아멘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폭풍우 속에서 말씀하신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제일 먼저 말씀하신 것은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욥에게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는 말씀입니다. 네가 네 지식과 지혜와 판단력으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말할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사실 욥은 세 친구들과 논쟁을 하면서 자기는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자신의 고난이 들어 있다는 점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지배와 공의를 의심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욥은 자신의 짧은 경험과 지식으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능력과 주권적 섭리를 분별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질책하셨습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욥은 이 말씀을 온 마음을 다해 받았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회개했습니다. 42:3을 보면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라고 회개했습니다.
시골의 한 마을에 할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눈이 침침해서 멀리를 보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도시에 살고 있는 자녀들의 성화에 못 이겨 읍내 안과 병원을 찾았습니다. 안과 의사가 세밀하게 조사해 보고는 사흘 후에 오라고 했습니다.
사흘 후에 이 할머니가 안과 병원을 찾았습니다. 안과의사가 준비해 놓은 안경을 건넸습니다. 할머니가 안경을 쓰고 나더니 깜짝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 우리 교회가 보이네. 저렇게 멀리 있는 교회가 이렇게 잘 보이다니...”
안과의사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가지 저 앞의 교회도 못 보고 사셨단 말입니까? 지금까지 장님처럼 사셨군요.”
그렇습니다.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눈 뜬 장님들이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 영적인 장님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잘 믿어 온 의인이었습니다. 고난 한 가운데를 지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겪고 있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또 다른 역사를 계획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영적으로 무지한 말을 쏟아놓게 되었습니다.
욥 3:11 이하를 보면 욥이 이렇게 탄식합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다가 아닙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믿음을 지킬 뿐 아니라 그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해야 합니다.
둘째,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으라”
본문 3절을 보면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대장부처럼’이란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전쟁에 임하는 용감한 남자를 말합니다. 승리를 확신하고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전쟁에 임하는 전사를 말합니다.
고전 16:13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영적 전투에 임할 때 전사처럼 강건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담대하게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극심한 고난을 겪으면서 욥의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게 계속되는 고난을 겪으면서 마음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 9:34-35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의 위엄이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라.” 욥의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욥의 자기 고백입니다. 지금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척이나 약해져있는 것입니다.
욥과 같은 믿음의 사람도 얼마든지 이렇게 마음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이 찾아들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우리 마음에 찾아들면 우리는 피하려고 도망치게 됩니다. 마음이 위축되고 생각이 경직됩니다. 마치 독사와 마주 친 쥐가 꼼짝 못하고 두려워 떨다가 잡혀 먹는 것처럼 마음이 쪼그라들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그러다 사탄에게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장부처럼 되라” 마음을 굳게 먹고 담대하게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피하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허리를 묶으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철저하게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출 12:11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기 전날 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말씀입니다. 출애굽 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는 말씀입니다. 이 때 제일 먼저 말씀하신 것이 허리에 띠를 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동안 욥이 모르고 있던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자 하셨습니다. 이 때 욥의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허리를 묶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덕희라는 분이 쓴 [토스카니니: 세기의 마에스트로]라는 책을 보면 토스카니니가 왜 세기의 마에스트로가 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나는 지휘를 할 때면 언제나 준비를 합니다. 나는 내가 토스카니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대중 앞에서 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단코!“
토스카니니는 ‘언제나 준비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지휘했기에 최고의 지휘자가 되었고 또 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이런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이런 자세로 해야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 설 때는 더 그렇습니다. 잘 준비하고 서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길고 고통스러운 고난 속에 흐트러진 욥의 마음을 추스르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음을 추슬러야 합니다.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어야 합니다.
셋째,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본문 3절을 보면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물을 테니 답변을 해 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38:4에서부터 39:30까지 압도적인 질문이 쏟아집니다. 땅의 창조의 기원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바다의 기원에 대한 질문, 밤과 낮의 창조에 대한 질문,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는 인간에 대한 질문, 하늘의 신비에 대한 질문, 그리고 갖가지 동물들의 생태에 대한 질문들이 쏟아집니다.
욥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질문들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대신 욥은 이렇게 쏟아지는 질문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새롭게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서 회개할 수 있게 됐습니다.
사실 욥은 지금까지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물었고,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물었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래서 관심은 온통 하나님에 대해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욥은 자신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습니다.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의인이고 자신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추호도 의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에게 허물이나 죄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질문공세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려다 보니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알지 못하던 자신의 허물도 보게 됩니다. 자신의 죄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할 수 있게 됩니다.
참된 신앙은 내가 묻는 것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질문을 듣고 그 질문에 답하는 데에서 이루어집니다. 욥이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 자신을 깨달은 것처럼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제대로 깨닫게 됩니다.
오늘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질문과 요구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을 듣지 못합니다. 물론 대답도 잘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그 결과 자기 자신에 대해 올바로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질문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묻고 계시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 자신을 깨닫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그 큰 고난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더 깊고 높고 넓고 큰 세계로 불러 주시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질문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질문에 귀를 기울이고 또한 그 질문에 답을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침묵하며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때로는 간절한 소원을 품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또 때로는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오래 기다려 보십시오. 결국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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