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박봉수목사

고난을 이겨낸 사람

고난을 이겨낸 사람

단 6:10

 

   단 6장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을 기적적으로 구원해 내신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간 뒤에 바벨론에 복잡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메대-바사 연합군이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됐습니다. 이 때 다리오가 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다리오 왕이 포로로 끌려온 다니엘을 총애했습니다. 먼저 세 명의 총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발탁했습니다. 다리오 왕은 이것도 부족하여 다니엘을 최고의 자리에 앉히고자 했습니다.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시기하는 자들이 다니엘을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음모를 꾸밉니다. 다리오 왕에게 금령을 선포토록 청했습니다. 앞으로 30일 동안 다리오 왕이 아닌 그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게 하지는 것입니다. 음모인 줄 모르는 다리오 왕이 금령에 도장을 찍어서 반포했습니다.

   다니엘은 이 금령이 반포됐음에도 하루 세 번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체포됐습니다. 그리고 금령에 따라 사자굴에 던져지게 됐습니다. 다리오 왕이 나중에 음모임을 알았지만 자신이 반포한 금령을 번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져 죽게 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사자의 입을 막으시고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다리오 왕이 이 사실을 알고 조서를 내려 다니엘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을 섬기도록 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다니엘은 다리오 왕 시대와 그 후 바사의 고레스 왕 시대에 형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갑작스럽게 닥친 고난을 이긴 다니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왕의 총애를 받던 다니엘이 음모에 걸려 사자굴에 던져 저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의연하게 이 고난을 이겨냅니다. 오히려 전화위복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냅니다. 이방 땅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 속에 형통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어떻게 이런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본문에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본문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분명히 다니엘은 지금 음모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30일 동안 다리오 왕 이외에 다른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져진다는 조서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이 조서에 도장을 찍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져지게 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를 잡기 위해 자기가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니엘은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고민했을 것입니다. 30일 동안의 한시적인 금령이니까 일단 30일만 피해 볼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기도하더라도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몰래 기도할 생각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거침이 없었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지면 던져지리라는 담대함으로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소위 ‘절대 신앙’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신앙을 말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말합니다. 어떤 고난이 다가온다고 해도 물러서지 않는 신앙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을 말합니다.

 

  프란시스 쉐퍼 박사는 신앙공동체 ‘라브리’를 설립하여 기독교에는 물론이고 기독교 밖의 전 세계에 거룩한 영향력을 펼쳐왔습니다. 한번은 이 라브리에서 세계 석학들이 모여 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쉐퍼 박사는 시대의 방향과 믿음의 갈 길을 제시하면서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사람들이 절대 가치를 버린 것이다.”

 

   사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절대 가치를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그 절대 가치를 의심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는 절대 가치라는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과거에는 한 남자는 한 여자와 결혼하여 해로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이 가치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꼭 한 남자가 평생 한 여자와 살아야 하는가?” “왜 남자는 꼭 여자와 결혼해야 하는가?”

   그러면서 도덕과 윤리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혼이 급증했습니다. 심지어 동성애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에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과거에는 신앙적으로 절대 가치를 추구했습니다. 예를 들어 반드시 성수주일을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반드시 십일조 헌금을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을 신앙적 절대가치로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이 신앙적 절대가치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꼭 성수주일을 해야 하는가? 현대의 다양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꼭 주일을 지킬 수 있는가? 꼭 십일조 헌금을 해야 하는가? 십일조 헌금이 정말 성경적인가?”

   이러면서 신앙생활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주일을 범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헌금하지 않는 사람들도 급증했습니다. 결국 신앙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어떤 농부가 소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가 통 새끼를 낳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새끼 낳게 해 주시면 잘 키워서 팔아 절반은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그러니 꼭 새끼 낳게 해 주십시오.” 놀랍게도 소가 새끼를 낳았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의논한 뒤 잘 키워서 나중에 한 마리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며칠 뒤 한 마리가 앓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 농부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주님의 소가 죽고 말았어요. 주님께 바친 소가 죽었단 말이요”

 

   이 세상은 늘 우리의 신앙을 미혹합니다. 절대 신앙을 갖지 못하도록 시험하고 흔들어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절대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절대 신앙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습니다. 절대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렇게 절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한 결 같이 그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절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질 줄 알면서도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절대 신앙을 지켜갈 때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다니엘처럼 절대 신앙을 지켜 가시기 바랍니다.

 

“전에 하던 대로”

   본문을 보면 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다니엘이 고난이 닥쳤을 때 전에 하던 대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닥쳤을 때 하나님께로 나가기로 하고 안하던 기도를 새롭게 한 것이 아닙니다. 전에 하던 대로 했던 것입니다.

   사실 고난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앞이 깜깜할 때가 많습니다. 이 상황에서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알지 못해서 우왕좌왕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 기도해야 한다고 깨달아도 기도의 자리로 나가기가 힘이 듭니다. 기도 자리에 까지 나간다고 해도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기도하는 거룩한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렵지 않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찰스 두희그라는 사람이 쓴 [습관의 힘]이라는 책을 보면 습관이 우리 인간의 행동의 근원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매일 아침 눈을 뜬 뒤에 별 생각 없이 수많은 복잡한 일을 처리합니다. 침대에서 일어날 때 오른 발부터 디뎌야 할지 왼 발부터 디뎌야 할지 생각하지 않고 일어납니다. 옷을 입을 때 윗옷부터 입어야 할지 바지나 치마부터 입어야 할지 생각하지 않고 입습니다. 밥을 먹을 때 국부터 먹어야 할지 밥부터 먹어야 할지 고민하지 않고 밥을 먹습니다. 늘 하던 일이 습관으로 굳어져 있고 그 습관을 따라 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들은 습관이 형성되는 이유를 연구했습니다. 결론은 우리 뇌가 활동을 절약하기 위해서랍니다. 일상적인 일들은 습관을 만들어 습관을 따라 뇌 활동 없이 자동적으로 처리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뇌 활동이 줄어들면 뇌에 필요한 공간을 줄일 수 있고 그 결과 머리 크기도 작아질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뇌 활동이 줄어들면 에너지를 절약해서 다양한 창조적인 일에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이 책을 보면 유진이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1분 이전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침마다 냉장고를 열고 늘 같은 음식을 찾아서 먹습니다. 아침 먹고는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고 돌아옵니다. 기억은 잃어버렸지만 습관은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실제로 우리 삶을 지배하는 것은 습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 대부분 활동을 이 습관을 따라 수행합니다.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해서 깊이 생각한 뒤 어떤 행동을 결단했을 때 그것이 이미 습관으로 굳어진 일이면 쉽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습관화 되지 않은 일을 새롭게 하려고 하면 정말 힘이 듭니다. 한 두 번은 할 수 있겠지만 계속해서 반복하려고 하면 정말 힘이 듭니다.

   그래서 좋은 습관을 갖는 일이 중요합니다. 좋은 습관이 한 사람의 인생을 복되고 아름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나쁜 습관은 한 사람의 인생을 힘들게 하고 그 결과도 나쁘게 만듭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한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그 삶이 거룩해 집니다. 그러나 속된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그 삶이 속됩니다.

   눅 22:39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 누가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고난이 밀려드는 것을 아시고 기도하러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진 장면을 기록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습관을 따라 기도하러 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거룩한 습관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평소에도 늘 기도하셨지만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는 늘 기도부터 하신 습관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오시면 늘 겟세마네 동산에 오셔서 기도하시는 습관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습관을 따라 겟세마네 기도의 자리로 나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거룩한 습관이 예수님을 십자가의 고난을 이겨낼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는 습관을 따라 기도 자리로 나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룩한 습관을 키워 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습관, 매일 성경 읽는 습관, 교회를 가까이 하는 습관,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는 습관, 정성껏 헌금하는 습관, 이런 습관들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고난을 이길 수 있게 도와줄 것입니다.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본문을 보면 또 이런 말씀도 기록되어있습니다.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이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드렸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가 한 기도가 대부분 감사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보통사람 같았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우선 갑자기 닥친 고난 때문에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밀려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을 것입니다. 이 고난과 맞서기에는 한 없이 연약한 자신을 보면서 좌절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해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니엘은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지도 않았고, 좌절하거나 절망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원망했을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 원망을 늘어놓았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죽게 되었으니 이게 뭡니까?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다가 잡혀서 사자굴에 던져질 때까지 뭐하셨습니까?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는 것 맞습니까?”

   그리고 왕에게 불평을 늘어놓았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해왔는데 어떻게 왕이 그런 금령을 내릴 수 있습니까? 아무리 금령이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나를 사자굴에 던져넣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다니엘은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고난을 묵묵히 받아들였습니다. 정해진 대로 체포됐습니다. 정해진 대로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믿기 힘든 것은 이런 상황 속에서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온통 감사로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 가운데서 감사할 수 있었을까요?

   23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 다니엘이 이 고난의 한 복판에서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니엘은 이 고난 한 복판에서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중에도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중에서도 자신을 인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감사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사실 다니엘은 왜 이런 고난이 자기에게 닥쳤는지 몰랐습니다. 물론 앞으로 어떻게 될 지도 몰랐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죽게 될 수 있다고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지금 자기가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하나님께서 아실뿐 아니라 허락하셨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주셨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좋으신 하나님께서 이 고난으로 자기를 멸망시키지 않으시리라는 사실도 믿었습니다. 아니 이 고난을 통해 선한 결과를 주실 것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 믿음으로 드린 감사의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자굴에 임재하셨습니다. 천사를 통해 사자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을 그 고난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다리오 왕이 이 사실을 보고 더욱 다니엘을 귀하게 세우게 됐습니다. 바로 감사가 이루어낸 놀라운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에 뜻하지 않은 고난이 있습니다. 그 때 어떻게 그 고난을 맞느냐가 중요합니다. 다니엘처럼 절대신앙으로 고난을 대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타협하거나 물러서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니엘처럼 거룩한 습관을 따라 고난에 맞서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평소에 거룩한 습관을 키워놓는 일이 중요합니다. 다니엘처럼 믿음으로 감사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원망과 불평을 떨쳐버리고 감사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추천 설교 > 박봉수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0) 2015.12.15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0) 2015.12.15
영생을 믿습니다.  (0) 2015.12.15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0) 2015.12.15
어머니 어머니  (0) 2015.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