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 19:1-14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분명히 무엇인가 달라집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볼 때 다 좋아 보이고 다 예뻐 보입니다. 남들이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들의 눈에 눈살을 찌푸릴 일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사랑에 눈이 멀었다’라고들 합니다. 다른 말로 ‘콩깍지가 씌었다.’고들 합니다.
과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호르몬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우선 뇌에서 ‘엔도르핀’이 분비된답니다. 그러면 행복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더욱 그 사람에게 끌리게 된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호르몬인 ‘페닐에틸아민’이 분비된답니다. 그러면 열정적이고 감정적인 사랑을 느끼게 된답니다. 이 때 그 사람이 정말 아름답게 보이고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이 다 좋게 느껴지게 된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눈에 콩깍지가 씌어져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을 때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마음 깊이 이해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소중히 느끼게 될 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쓴 시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시를 쓴 다윗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마디로 다윗은 정말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야 말로 하나님께 대해 눈에 콩깍지가 씐 사람이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신 일
먼저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바라봅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봅니다. 남들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립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해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그렇습니다.
1절을 보면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다윗이 저 높은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이 보입니다. 다윗이 머리 위에 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바울이 신앙의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저 우주를 바라보면서 볼 수 있었던 장면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저는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방영한 ‘코스모스’라는 프로그램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습니다. 1980년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과학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리메이크한 작품입니다. 13부작으로 제작된 이 프로그램은 닐 타이슨이라는 저명한 천체물리학자가 상상의 우주선을 타고 시공을 넘나들면서 우주 구석구석을 안내하는 형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제일 먼저 이 상상의 우주선은 우주가 탄생될 그 시점으로 안내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38억 년 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핵보다 작은 한 점에서 대폭발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끝없는 팽창을 거듭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시점에서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이 폭발로 생겨난 뜨거운 가스 덩어리들이 중력에 의해 뭉쳐져서 별들이 생겨났고, 이 별들이 모여서 은하를 이루게 됐다는 것입니다.
저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저 하늘만 보고서 138억 년 전에 있었던 일과 그 이후 일어났던 일들을 추측해 낼 수 있을까?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그 장면을 그려낼 수 있을까? 한 마디로 칼 세이건이라는 과학자가 상상의 눈으로 저 하늘 바라보면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우주를 보게 됐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138억 년 전의 우주 대폭발 현상은 보았으면서도, 그 대폭발을 일으키신 하나님은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놀랍고 경이로운 우주의 신비는 보았으면서 그 안에 펼쳐진 하나님의 영광은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만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믿음의 눈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대해 눈에 콩깍지가 씐 사람들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다윗이 남들이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귀에 들리는 그 어떤 언어로 된 소리나 구체적인 말씀도 없었고 귀에 있는 고막을 진동하는 어떤 소리도 없었지만, 마음에 들려오는 강렬한 소리가 있어서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는 날이 날에게 전하고 또 밤이 밤에게 전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전해 주시는 메시지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귀를 가진 사람들만 들을 수 있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믿음의 귀를 가지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귀에 들려오는 음성을 듣고자 할 때만 들을 수 있는 소리입니다.
저는 요사이 문창극 총리 지명자 문제를 정말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일부 언론이 의도적으로 보도한 내용이 국민의 정서를 자극하여 사태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조금 답답한 것은 문창극 총리 지명자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해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속이 상한 것은 이 일로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욱 커져만 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분이 발언한 것은 신앙적 관점으로 역사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밝힌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시대를 벗어날 수 있었고 6.25 동란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나라와 민족이 하나님을 잘 믿는 나라가 되기 위해 이런 시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개입의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이런 우리의 신앙적 관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공적인 영역에서는 이런 견해가 자신의 사적인 신앙적 견해임을 밝히고 겸손한 자세로 이해를 구해야 합니다. 이번 문창극 총리 지명자의 아쉬운 부분이 이것입니다. 그리고 지나친 표현도 있었습니다. 이런 점들도 정중하게 이해를 구했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기독교가 오만한 종교라는 인상을 심어주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일반인들이 어떻게 보더라도 우리의 신앙적인 역사 해석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의 역사에 개입하시고 오늘도 친히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귀를 가진 사람들은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귀에 콩깍지가 씌었기 때문에 남들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신 말씀
다음으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살펴봅니다. 말씀 속에서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눈에 콩깍지가 씌었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다윗이 여호와의 율법을 자세히 살펴보니까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소성시키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 자신의 경험일 것입니다. 자기가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고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 그 영혼이 위축되고 그 영혼이 낙심하여 탄식했었을 것입니다. 그 때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고 그 말씀이 자기의 영혼을 소성시켜주었을 것이다. 말씀을 통해 위로를 얻고, 용기를 얻고, 새 힘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소성시킨다는 점을 알게 됐던 것입니다.
오래 전에 [기독공보]에 났던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한 사형수가 국민일보 주체 성경옮겨쓰기 대회에 응모한 뒤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바로 지존파 일당 18명과 함께 사형이 집행된 양진순입니다.
그는 1989년 9월 친구들과 함께 가정집에 들어가 살인 등 흉악범죄를 저질렀고 당시 범죄와의 전쟁 중이어서 사형을 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교도소에 복역 중에 인생에 회의를 느끼며 마음에 큰 동요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매일 성경을 읽으며 흔들리는 그 마음을 추스르며 수감 생활을 견뎌가게 되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쓰면서 그 영혼은 날로 새로워져만 갔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교도소 내의 전도사로 알려질 정도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고, 불신 가족들을 전도하는 데도 최선을 다해서 가정 복음화도 이루었습니다.
그는 성경옮겨쓰기 대회에 응모하기 위해 감방 찬 바닥에 성경을 펼처 놓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차례로 써내려갔습니다. 매일 7-10장씩 편지지에 써내려갔는데 편지지 사이사이에 간간이 눈물을 흘린 자국이 배어있어서 사람들의 가슴을 찡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편지도 함께 써 보냈는데 ‘갇힌 자 된 것을 감사한다’고 썼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일반인들에게는 평범한 문학작품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하는 사람들 눈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 영혼을 소성시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소중한 경험이 있습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그 말씀의 맛이 너무 달아서 자꾸 묵상하게 되고, 또 그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깊이 깨닫게 됐다는 것입니다.
사실 일반인들에게는 성경은 읽기 힘든 책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큰마음을 먹어야만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책입니다. 읽다보면 잘 모르겠고, 따분하고, 재미없고 그래서 오래 읽지 못하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을 때 단 맛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이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가까이 하게 됩니다. 열심히 읽게 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이들에게 성경을 읽게 하기 위해서 꿀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일정한 범위를 정해 놓고 읽게 하거나 암송하게 했습니다. 아이들이 잘 하면 상으로 맛있는 꿀을 주었습니다. 당시 변변한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 꿀은 아이들이 가장 먹고 싶은 먹거리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성경 말씀의 맛을 알게 되면 아이들은 꿀을 먹기 위해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게 됩니다. 이 때 저들이 쓰는 표현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성경 자체가 좋습니다. 송이 꿀보다 더 달고, 정금보다 더 귀합니다. 이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콩깍지가 씐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마음의 소원
이번에는 다윗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자기 안에 간절한 소원이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여기서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은 기도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내 입의 말’은 입으로 소리를 내서 하는 기도를 뜻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묵상’은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면서 하는 기도를 뜻합니다. 그리고 ‘열납된다’는 말은 ‘기쁘게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간절한 마음의 소원은 자기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아들여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의 소원은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병을 고쳐주시기를 바랍니다. 큰 시련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그 시련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홍해와 같은 해결할 수 없는 큰 문제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기도자들의 마음 자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다윗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 응답 보다는 기도 자체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기도 응답은 두 번째입니다. 먼저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한 교회 청년부에서 수련회를 갔습니다. 돌아가면서 연도로 기도하는 순서를 가지기로 했습니다. 순서에 앞서서 전도사님이 말씀을 전하면서 기도의 범위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지금까지 너무 자신 만을 위해 기도했으니까 기도의 범위를 넓혀서 부모님과 청년부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좋겠다고 구체적인 지침을 전했습니다.
전도사님이 먼저 기도하고 다음 옆에 손을 잡고 있던 자매가 기도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제 어머님이 금년에 70이 되셨습니다. 어머님께 딸이 하나 있습니다. 어머님 나이가 70이신데 아직 그 딸이 시집을 가지 못했습니다. 그 딸도 벌써 35세가 훌쩍 넘었습니다. 어머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 금년에 그 딸이 꼭 시집을 가서 어머니 근심이 사라지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늘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릴 뿐입니다.
음악 장르 중에 ‘세레나데’가 있습니다. 남자가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부르는 노래입니다. 가장 전형적인 세레나데로 카푸아의 곡 ‘마리아 마리’를 듭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창문을 열어다오 내 그리운 마리아” 이 세레나데에는 남자의 애타는 사랑의 마음을 연인이 받아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다윗의 고백은 마치 다윗이 하나님께 바치는 세레나데와 같습니다. 자기가 드리는 기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뿍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하나님께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뿐 아니라 그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기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소원이 이루어지는 기도 보다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그런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에 내 소원만 가득 담긴 기도가 아니라 기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담긴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하여 콩깍지가 씌어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자연 속에 펼쳐진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성경 말씀 속에서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습니다. 또한 남들과 다른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섭니다. 우리의 입술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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