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본문/ 고전 2:1-5
제가 근자에 TV 드라마 하나를 즐겨보고 있습니다. KBS 사극 [정도전]입니다. 이 드라마를 보는 중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포은 정몽주’에 관한 것입니다.
제가 정몽주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학교 다닐 때 역사시간에 배운 것이 전부였습니다. 정몽주는 끝까지 혁명에 반대하다가 선죽교에서 살해당한 선비요 만고의 충신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니 정몽주는 단순한 선비로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다 살해당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성계 일파의 혁명을 막기 위해 나름대로 힘을 모아 맞섰고, 모략도 꾸몄고, 자객을 보내 이성계를 제거하려고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살해당한 것은 치열한 혁명공방의 와중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정몽주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흠과 티가 없는 만들어진 영웅이 아니라, 치열하게 자기의 신념을 지키며 갖가지 공과 과를 드러낸 실전의 영웅이라는 점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정몽주를 더욱 가까이 느끼게 됐습니다. 그리고 더욱 마음으로 존경하게 됐습니다.
이것은 제가 바울에 대해 알게 되는 과정에서도 비슷합니다. 과거에 바울은 아주 특별한 사역자로만 알아왔습니다. 늘 모든 일에 완벽하여 놀라운 역사만을 이루어왔던 그야말로 실패를 모르는 완벽한 영웅으로만 알아왔습니다.
그러나 일전에 바울을 깊이 연구하면서 바울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울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됐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사역을 행할 때 자신감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두려워서 떨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던 바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관심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바울이 왜 두려워서 떨었을까? 그러면 어떻게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고린도에서 성공적인 사역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답을 찾으면서 제게는 큰 위로가 됐습니다. 그리고 큰 교훈을 얻게 됐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면서 자꾸 실패하고 자꾸 넘어지는 사람들에게도 큰 교훈이 될 것입니다.
실패의 아픈 경험
바울이 두려워 떨었던 이유는 바로 앞의 아덴에서의 사역 경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행 17장을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사역했던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곳에서 사역했던 이야기와는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바울의 사역이 주로 변론하는 일에 치중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주로 말씀을 선포했는데 이곳에서는 변론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포는 이해를 하든 말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변론은 이해를 시키기 위해 인간적인 지혜를 동원해서 설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변론을 하다 보니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기 보다는 계속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고 조롱하기도 하면서 말씀의 역사가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본격적인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병 고침의 이적이나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도 않았고, 사람들이 회개하는 두드러진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아덴에서 다른 곳에서와는 달리 사역의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어찌 보면 일종의 실패를 경험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와 달리 많이 위축된 상태로 고린도에 오게 됐습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바울이 두려워 떨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또 다시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에 두려워 떨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시 실패할까 두려워서 떨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이런 두려움이 있지 않았습니까? 당당하게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며 살려고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두려워 떨다가 물러섰던 일이 있으십니까? 복음을 전해보려고 했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두려워 떨다가 물러섰던 일이 있으십니까?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입을 열어 복음을 전했는데 상대방의 반응이 완강해서 두려워 떨었던 일은 없으십니까?
제게도 이런 부끄러운 경험이 있습니다. 10년은 된 것 같습니다. 총회 전도학교에 참여했습니다. 3일 동안 종일 전도 훈련을 받고 4일째 되는 날 현장 실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기도 곤지암 지역에서 길거리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어있습니다. 날씨가 추웠습니다.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습니다. 적어도 3사람 이상 결신시키고 결신카드를 작성해서 돌아오는 과제를 받고 길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동안 교회 안에서 잘 믿는 사람들만 상대하는 도중 믿지 않는 사람을 상대하는 감을 잊어버렸습니다. 과거 노방전도하고 축호전도하고 특히 대학로나 공원에서 길거리 설교를 하던 때의 영적 감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근처 아파트로 들어섰습니다. 첫 번째 집에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나오셨는데 다짜고짜 면박을 줍니다. 소리를 지르며 문을 닫습니다. 길거리로 나섰습니다. 한 아저씨가 다가오기에 정중하게 인사하고 훈련받은 대로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이분이 인상을 쓰며 자기는 절에 다닌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립니다.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처럼 너무도 나약한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두려워서 심히 떨었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나 정말 막막했습니다.
저는 본문을 읽으며 그 때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도 저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제가 정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런 실패의 경험은 내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로구나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역자도 이런 실패가 있었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려고 애쓰는 중에 때론 갖가지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영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동안 때로는 여러 가지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때가 중요합니다.
실패를 극복하려는 노력
바울은 사역의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떨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비록 실패의 자리 아덴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고린도로 와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에 와서 또다시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우선 1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아덴에서와 같이 논리학이나 수사학적 기법으로 변론을 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아덴에서 나름대로 세상 학문적 지식을 자랑하고 사람들과 지적인 대화를 시도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만 전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우선 실패의 원인을 철저하게 분석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덴에서 왜 실패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다음으로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찾아냈습니다. 그래서 아덴에서 와는 전혀 다른 접근 방법으로 사역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패 이후가 중요합니다. 실패로 인해 좌절하고 주저앉으면 결코 성공의 길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앞을 향해 최선을 다해서 달려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외과의사 ‘벤 카슨’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흑인의사로 최초 샴쌍둥이 분리수술을 하여 일약 최고의 의사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 분은 어린 시절 공부를 참 잘했습니다. 그런데 흑인이라는 이유로 백인 선생님에게 냉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검둥이는 실력이 있어도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좌절하여 불량청소년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절한 권고와 격려로 심기일전하여 다시 공부에 매진하여 최고의 의사가 되었습니다.
이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장애물을 만납니다. 다만 성공하는 사람은 장애물을 발판 삼아 도약하고, 실패하는 사람은 장애물 때문에 좌절합니다. 차이는 이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장애물 경기와 같습니다. 때로는 장애물이 나타납니다. 그 때 뛰어넘어야 합니다. 좌절하고 주저앉으면 안 됩니다. 도망쳐도 안 됩니다. 만일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넘어졌다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도전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넘어설 때가 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패하여 주저앉아 계십니까? 일어나십시오. 다시 도전하십시오. 장애물 앞에 서 계십니까? 최선을 다해 달려가십시오. 그리고 뛰어넘으십시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그런데 본문을 보면 바울이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은 따로 있었습니다. 물론 그가 심기일전하여 실패를 극복하려고 노력한 것도 한 몫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실패를 극복한 것이 아닙니다.
4절을 보면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자기극 실패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고린도의 사역에서는 성령의 능력있는 나타나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덴에서 사역할 때 성령의 능력있는 나타나심이 없었지만 이곳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는 성령의 능력있는 나타나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덴에서와 달리 고린도에서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고 그 결과 풍성한 사역의 열매가 나타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의 나타나심’이라는 표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니까 “the demonstration of the holy Spirit”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엉뚱한 이해일 지는 모르지만 이 말을 요즘 우리가 쓰는 표현으로 다시 번역해 보면 “성령의 데모”, “성령의 시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데모를 많이 하는 나라도 드믈 것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자유롭게 시위를 할 수 있는 나라도 찾아보기 힘이 들 것입니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에 진보진영의 사람들이 이 데모를 자기들의 의사표현의 수단으로 활용해 왔습니다. 서울 시청 앞 광장에 모여 집회를 하고 촛불을 켜고 거리 행진을 했습니다. 때로는 지나쳐서 부작용을 낼 때도 있었지만 상당부분 집권세력이 압박을 느끼고 정책을 바꾼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보수진영의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데모를 자기들의 의사표현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진보진영의 행동이 문제가 있다고 싶으면 집회를 열어서 강력하게 성토를 합니다. 그리고 진보진영의 집회가 있는 날이면 주변에서 맞불 집회를 열기도 합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1인 시위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당당하게 혼자서 피켓에 자기의 의견을 적어서 직장 앞에서 관공서 앞에서 때로는 길거리에서 드러냅니다.
이런 데모 즉 시위는 자신들의 의사를 더 이상 감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그 결과 공동체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려고 합니다.
성령의 나타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숨기거나 억압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뜻대로 우리를 이끄시고 주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사실 바울은 아덴에서 이점에 실패했습니다. 아덴의 지식인들,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에게 자신의 학문과 지식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혹시 성령의 드러내면 저들에게 무시당하고 조롱을 당할 것 같아서 성령을 숨기고 자신의 것을 드러내려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오히려 자기가 무시당했고 조롱당했습니다.
바울은 이 점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와서는 성령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자신을 감추고 적극적으로 성령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성령이 드러나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예배드릴 때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연약한 육신으로 예배 드리게 됩니다. 예배 도중 계속 사탄의 방해를 받게 됩니다. 예배에 집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으면 예배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됩니다. 예배 안에서 내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기도할 때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의지로 기도하게 됩니다. 내가 소원을 아뢰는 것으로 끝이 나게 됩니다. 자칫 기도가 독백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기도가 무척 힘이 듭니다. 그러나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으면 기도가 달라집니다. 기도 안에서 마음의 변화를 느낍니다. 때로는 눈물이 나고 때로는 감격의 기쁨이 느껴지고 또 때로는 강력한 믿음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기도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내 소원을 두고 기도하다가 점차 하나님의 소원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원에 집중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봉사할 때도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자신을 드러내려 봉사하게 됩니다. 봉사할 때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합니다. 누가 알아주는 일을 찾아하려고 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계속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으면 봉사가 달라집니다. 하나님만을 의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생각으로 봉사하게 됩니다. 누가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든지 상관없이 기쁨이 있습니다.
전도할 때도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의를 나타내기 위해 전도합니다. 전도할 때 내가 설득하고 강권하려고 합니다. 생각지 못했던 반발이 일어납니다. 열매를 거두기 힘이 듭니다. 그러나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으면 전도가 달라집니다. 전도해야겠다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납니다. 전도할 방법도 떠오릅니다. 전도할 때 생각지 못했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바뀝니다. 제 발로 교회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그저 우리 안에 머물러계시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이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성령의 데모, 성령의 시위기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의 능력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이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초대교회가 시작될 때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했던 그 사건을 기념하면서 전세계교회가 함께 이 날을 지킵니다.
성령강림주일을 지키며 우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성령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시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이 나타나서 우리가 성령의 능력있는 역사를 체험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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