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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박봉수목사

인정받는 사람들

인정받는 사람들

딤후 4:9-18

 

   금번 성지순례는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르는 여행이었습니다. 우선 ‘네압볼리’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이곳은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드로아에서 마게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고 성령에 이끌려 배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가 첫 발을 내딛은 곳입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마쳤습니다. 이곳은 사도 바울이 순교로 30여 년 간의 선교여정의 대장정을 마쳤던 곳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그 흔적이 남아있는 곳에서 큰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특별히 가장 큰 은혜와 도전을 받았던 곳은 사도 바울이 참수형을 당했던 ‘바울의 참수터’였습니다.

   이곳에는 두 개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도 바울의 순교기념 교회’입니다. 다른 말로는 ‘트레 폰타네’(세 분수 교회)라고도 합니다. 바울이 참수 당할 때 목이 잘렸다는 돌기둥이 보존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목이 잘릴 때 세 번 목이 튀었다는 그 자리가 그대로 보존되어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교회에서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소위 ‘천국계단’ 교회라는 곳입니다. 이 교회 지하에는 사도 바울이 순교 당할 때까지 갇혀있었다는 지하 감옥터가 남아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에 죄수로서 2년여 간 갇혀있을 때는 셋집에서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풀려났다가 다시 두 번째 투옥되었을 때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가 순교 당했습니다. 이 감옥터가 바로 사도 바울이 순교 직전 투옥 당했던 그 곳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서 흐느낄 정도로 큰 감동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오늘 본문을 생각했습니다. 왜냐 하면 바울이 오늘 본문이 포함된 디모데 후서를 바로 이 지하 감옥에서 썼기 때문입니다.

   특히 딤후 4:6 이하의 말씀이 마음에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음으로... ”      바울은 바로 이 지하 감옥에서 순교를 예감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동안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뒤 30 여 년 간 2만 여 킬로를 걸어서 달려온 그 대장정의 선교여행을 마쳐야 할 때가 온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위대한 사도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 주님께서 저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때 바로 그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주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다 마치고 이런 마음을 느껴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야 할 텐데...’ 간절한 마음의 소원을 가지게 됐습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바울은 저 멀리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고 있던 제자요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빨리 로마로 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가기 전 디모데를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 편으로는 마지막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기 때문일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너무도 외롭고 쓸쓸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고 말씀하고 있고, 13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겉옷을 가지고 와 달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로마는 지중해성 기후입니다. 여름은 건기이고 겨울은 우기입니다. 여름에는 태양이 작열하여 뜨겁지만 건조하기 때문에 그늘에 들어가면 견딜 만합니다. 게다가 바람이라도 불면 시원합니다. 그러나 겨울에는 추운데다 습합니다. 그래서 겨울에는 뼛속까지 그 추위가 파고듭니다.

   지금 바울은 지하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이미 지병이 있고 65세가 넘은 노구의 몸입니다. 게다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견디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지금 지독한 외로움에 견디기 힘든 육체적인 고통이 바울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견디며 인생의 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차분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과연 나는 견딜 수 있었을까? 그러면서 또 다른 마음의 소원을 가지게 됐습니다. ‘고난이 찾아오더라도 인생의 마무리를 정말 의연하게 품위 있게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뜻 밖에 여러 사람들 이름을 거명하며 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그동안 겪었던 많은 사람들이 생각이 났던 것 같습니다. 크게 두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는 마음속에 안타까움으로 남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고마움으로 남는 사람들입니다.

 

안타까움으로 남는 사람들

   우선 바울은 데마라는 사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바울은 데마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데마는 누구일까요? 성경에 두 차례 데마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우선 몬 1:24입니다.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바울은 동역자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분명하게 데마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데마가 바울의 사역을 열심히 도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골 4:14입니다.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누가가 바울 곁을 지키고 있었던 것처럼 데마도 바울 곁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데마는 열심 있는 신앙인이었고, 바울 곁에서 바울을 도왔던 동역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마가 바울을 등지고 훌쩍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한쪽 팔이 잘려져 나간 것처럼 허전함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가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등지고 떠났기 때문입니다.

   요일 2:15~17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은 우리의 육신의 정욕을 채워줍니다. 육신의 욕망을 만족시켜주고 육신을 즐겁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우리의 안목의 정욕을 채워줍니다. 눈에 화려한 것을 보여줍니다. 눈을 즐겁게 해 줍니다. 또한 이 세상은 이생의 자랑을 채워줍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과시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데마는 이런 것들을 따라 세상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잠시 지나갑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은 한 번 채워졌다고 끝이 아닙니다. 또 채워져야 합니다.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채워졌다고 해서 남는 것이 없습니다.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데마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데마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습니다. 저도 마음속에도 데마와 같은 이름들이 있습니다. 예수 잘 믿고 주의 사역도 헌신적으로 잘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으로 떠나버렸습니다.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한 사람 알렉산더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14-15절을 보면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라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대적했습니다. 수많은 이방인들도 그를 힘들게 했습니다. 심지어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를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한 사람을 꼭 집어 거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입니다.

   도대체 알렉산더가 어떤 사람일까요? 왜 그 이름을 꼭 집어 말하고 있을까요?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성경에 이 사람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이 사람 때문에 정말 큰 어려움을 겪었고 앞으로도 복음 사역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도 이 사람을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오늘도 이 알렉산더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의 종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의 사역에 걸림돌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기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고마움으로 남는 사람들

   바울이 지하 감옥에서 참수형을 받을 날을 기다리며 돌이켜 생각해 보니 고마운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이름을 거명합니다.

   우선 누가입니다. 11절을 보면 “누가만이 나와 함께 있느니라” 여기서 누가는 의사요 지식인으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집필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이 이차 전도여행 도중 드로아에서 누가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 누가를 데리고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유럽의 첫 성 빌립보에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난 뒤 빌립보 교회를 돌보도록 누가를 빌립보에 남겨두었습니다.

   바울이 삼차 전도 여행시 빌립보에 들렸을 때 다시 누가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지금 로마 감옥에 수감되어있을 때까지 함께 했습니다. 바울이 제일 힘들고 어려울 때 누가는 바울 곁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이사랴에서 2년여 간 투옥되어있을 때 바울 곁에서 의사로서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로의 그 험한 행해 길에 동행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로마에서 1차 가택연금기간에 함께 했고, 지금 다시 2차 투옥기간에도 곁에서 수시로 면회하며 바울을 뒷바라지 하고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누가는 결혼도 하지 않고 바울과 함께 하며 바울의 뒷바라지를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생각하면 할수록 누가가 고마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힘겹고 고통스러운 인생길의 마무리를 곁에서 지켜주는 누가가 정말 고마웠을 것입니다.

   시인 정호승의 시 가운데 [그는]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 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바울에게 누가는 ‘그는’의 그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그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의 종들에게 그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마가입니다. 11절을 보면 “네가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누구일까요? 초대교회 시절 예루살렘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 받았던 그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을 마가의 다락방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일찍이 예수를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1차 전도여행 때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 나섰다가 박해와 고난이 심해지자 예루살렘으로 돌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가에 대해 크게 실망했었습니다. 2차전도 여행 때 다시 따라 나서겠다고 했을 때 바울은 마가 때문에 바나바와도 갈라서서 따로 실라와 함께 전도여행에 나서기 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뉘우치고 새롭게 결단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울은 마가를 받아들였고 마가와 함께 여러 가지 사역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어있으면서도 마가가 필요하다고 디모데에게 저를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옛날 일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1차 전도여행 때 마가 때문에 실망하고 화가 났던 일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마가를 보지 않겠다고 했던 일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가 달라졌습니다. 놀라운 정도로 변했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꾼이 됐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은 마가가 꼭 필요하다고 느낄 정도가 됐습니다.

   생각해 보니 고마운 일입니다. 실망을 시켰던 사람이 변하여 꼭 필요한 사람이 됐으니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의 일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회 일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안타까움으로 남는 이름들이고 다른 하나는 고마움으로 남는 이름들입니다. 안타까움으로 남는 이름들은 실망스러운 사람들이고, 고마움으로 남는 이름들은 인정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한 번 주어진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면서 그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누가 인생을 잘 사는 것일까요?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이름이 어떤 이름으로 남느냐에 따라 가름이 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그 이름이 안타까움으로 남는다면 그 인생은 잘 사는 인생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 이름이 고마움으로 남는다면 그 인생은 잘 사는 인생일 것입니다.

   누가 인생을 잘 사는 것일까요? 사람들을 실망시키느냐 아니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느냐에 따라 가름이 날 것입니다. 사람들을 실망시키며 살아간다면 그 인생은 잘 사는 인생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면 그 인생은 잘 사는 인생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들 중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들이야 말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다간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하 감옥에서 인생을 회고하며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려봅니다. 그 때 그 마음에 고마움으로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누가, 마가, 디모데, 브리스가, 아굴라, 오네시보로... 저들은 모두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모두 이렇게 인정받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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