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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을 이루는 교회

화평을 이루는 교회

 

골 1:18-20

 

   오늘 한국사회의 가장 큰 특징을 꼽아보라면 한 마디로 ‘갈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년 8월 21일에 개최된 ‘국민대통합 심포지엄’에서 삼성경제연구소의 박준 수석연구원이 주목할 만한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2010년 기준으로 우리사회의 갈등수준이 종교분쟁을 겪고 있는 터키를 제외하면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석 모델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우리나라의 사회갈등에 따른 경제적 비용이 최소한 82조원에서 최대 246조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만일 갈등지수를 OECD 평균수준으로만 개선해도 1인당 GDP가 7-21%나 증가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 갈등은 어느 나라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 정도가 유독 심합니다. 그리고 갈등이 일어나도 제대로 그 갈등을 해결하지 못해서 다툼으로, 분쟁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갈등하는 파열음이 들립니다.

   일전에 웃지 못 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뉴질랜드로 이민 간 동포들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뉴질랜드는 재미없는 천국이고,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다.” 그래서 뉴질랜드에서 살다가 재미없고 따분해 지면 한국으로 놀러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치권을 비롯하여 여기저기서 다투고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재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불구경과 싸움구경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실제로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갈등에 지쳐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부갈등과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갈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성적문제로, 친구 사이의 문제로 갈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일터에서 노사갈등과 치열한 경쟁으로 인한 갈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회에는 계층 간의 갈등, 이념간의 갈등, 정파 간의 갈등, 지역 갈등, 남북 갈등 등등으로 갈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마저도 갈등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내에 교파간의 갈등, 신학적 갈등, 이념적 갈등, 그리고 이단과의 갈등이 심각한 수준입니다. 게다가 많은 교회에서 교회 내의 갖가지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까지 갈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갈등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식처가 될 수 있는 교회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갈등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교회일 것입니다. 갖가지 갈등으로 몸살을 앓던 사람들이 평안을 누리고 참된 쉼을 얻을 수 있는 교회일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아직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 그런 교회가 되어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앞으로 더욱 안식처 같은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갈등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다툼과 분쟁으로 얼룩진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화평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갈등을 종식시키시고 다툼과 분열을 잠재우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예수님께서 머리시고 교회는 그의 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머리가 화평을 이루셨으니 당연히 그 몸 역시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몸은 머리의 지시를 따라 움직입니다. 머리가 목표를 세우고 그 방향으로 신호를 보내면 몸은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어있습니다. 만일 머리가 뜻하는 대로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뇌출혈로 마비가 온 사람들의 경우 머리의 생각대로 몸이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화평을 이루셨고, 몸에게 화평을 이루라고 지시하셨는데 몸이 따르지 않는다면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마땅히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화평을 이루셨고, 또 화평을 이루라고 몸인 교회에게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화평이란?

   그러면 화평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원어로 ‘에이레네’(Eirene)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에이레네는 구약의 히브리어 ‘샬롬’(Shalom)을 신약의 헬라어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화평이란 샬롬을 말합니다.

 

우선 화평 곧 샬롬은 단지 다툼과 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에 한일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과 일본이 단교를 했거나 전쟁상태에 있지는 않습니다. 왕래도 자유롭고 무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다툼과 분쟁은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사 문제로 갈등하고 있습니다. 독도 영유권을 놓고 심각하게 갈등하고 있습니다. 최근 양국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앙케이트 조사 결과를 보면 심각합니다. 상대방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가진 청소년들이 우리나라는 70%를 상회하고, 일본 청소년들도 50%가 넘습니다. 상대방을 군사적 위협으로 보는 시각을 가진 청소년들이 우리나라는 두 번째이고, 일본 청소년들은 다섯 번째입니다. 그리고 한일관계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보는 청소년들이 한일 모두 65%가 넘었습니다.

   물론 이런 관계를 화평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다툼이나 분쟁은 없을 지라도 지속적으로 갈등을 이어간다면 결코 화평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화평이란 다툼과 분쟁이 없을 뿐 아니라 갈등까지도 없는 상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려서 방학 때 시골 외갓집에 놀러가곤 했습니다. 한 번은 어린 눈에 이해하기 힘든 광경을 보았습니다. 이모님 댁에 마당 한편에 외양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토종닭들을 놓아먹여서 닭들이 외양간 안에를 수시로 드나들었습니다. 닭들이 소 여물통에도 올라가고 외양간 한편에서 자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소와 닭들은 오랜 시간 함께 지내고 함께 살았기 때문에 친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모님께서 외양간 앞에서 그 닭을 잡으셨습니다. 어린 저는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어서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런데 소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오래 동거동락했던 닭이 자기 눈앞에서 죽는 데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그냥 눈만 껌뻑거릴 뿐입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린다든지 아니면 차라리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린다든지 그래야 할 텐데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여물을 되씹으며 눈만 껌뻑거릴 뿐입니다. 나중에 ‘소 닭 보듯 한다.’는 말을 알게 되고서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관계도 화평 곧 샬롬이라 하지 않습니다. 다투지 않고 아무런 갈등도 없다고 다 샬롬이 아닌 것입니다.

 

화평이란 다툼과 분쟁도 없을 뿐 아니라, 그리고 갈등도 없을 뿐 아니라 서로 적극적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마음을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나누며 하나를 이루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나누며 하나를 이루어가면서 그 안에서 안식을 얻고 평안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화평 곧 샬롬을 이루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런 샬롬이 가득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화평을 이루려면?

   그러면 화평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화평을 이루기 위한 대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화평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행 2장을 보면 이 세상에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120명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늘로부터 성령이 그 공동체 위에 임했습니다.

   주목해 볼 것이 있습니다. 행 2:3-4입니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 120명 모두가 예외 없이 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모두 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이야기를 행 2:43 이하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 한 마디로 말해서 공동체가 화평의 공동체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성령 받기 이전과는 다른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화평은 구성원 모두가 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룬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나만 예수를 믿어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고 있지 못할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차피 아무리 노력해도 당장 온전한 화평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도 화평을 이루려는 노력을 포기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마 5:9을 보면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나는 최선을 다해서 화평을 이루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복이 있고,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김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화평을 이루려고 할 때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화평을 이루려면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화평을 이루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로 화평을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약 4:1-2을 보면 갈등과 다툼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 도다” 한 마디로 갈등과 다툼의 근본 원인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욕심 때문이라는 지적입니다.

 

  ‘빈 의자 게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 수보다 하나 적은 빈 의자를 둥그렇게 놓아둡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안에 노래를 하며 돕니다. 그러다가 호루라기를 불면 먼저 빈 의자를 차지하여 앉게 하는 게임입니다. 그래서 매번 한 사람씩 탈락을 하게 되고,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탈락을 계속하게 하는 게임입니다.

  이 게임의 재미는 치열한 경쟁입니다.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가 다 경쟁자입니다. 네가 탈락하느냐 내가 탈락하느냐의 절박한 상황을 맞습니다. 이 게임에서 협력이란 없습니다. 모두 그 속마음에 빈 의자를 차지하려는 강력한 욕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게임에서 보듯이 갈등의 근본 원인은 욕심입니다. 그 욕심이 서로를 경쟁 대상으로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욕심이 피차 갈등하게 만듭니다. 나아가 그 욕심이 심할 경우 다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갈등을 끝내기 위해서는 누군가 먼저 그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누군가 양보해야 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양보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희생한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십자가로 갈등을 끝내고 화평을 이룰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화평을 이룰 수 있는 길은 하나입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갈등을 끝내고 화평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내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일터에서 갈등을 끝내고 화평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갈등을 끝내고 화평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평을 이루려면 참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십자가를 진 사람이 예수님 뿐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화평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갈등과 다툼을 더 키우고 죽어갔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선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발적인 십자가인데 비해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는 억지로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지는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묵묵히 다 참아내셨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십자가를 지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저주를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니까 화평을 이루려면 십자가를 지되 잘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약 1:19-20을 보면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상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우리가 화평을 이루기 위해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선 말을 더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해서는 화평을 이루기보다는 오히려 갈등을 유발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말을 많이 하다 보면 말실수를 하게 되고, 그 말꼬리를 잡혀서 갈등이 심화됩니다. 그래서 화평을 이루려면 말을 더디 하고 듣기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내기도 더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를 내서는 화평을 이루기보다는 갈등과 다툼을 일으킵니다. 결코 화를 내서는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화평을 이루려면 예수님처럼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침묵하셨습니다. 하실 말씀이 하늘처럼 많았지만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참으셨습니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억울함에 원통함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끝까지 견디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화평을 이루는 사람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창립 58주년을 맞은 우리 교회가 더욱 화평을 이루는 교회가 되어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