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과 선입견을 넘어서라
막 6:1-6
인터넷에 떠도는 유머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속에 두 마리의 개를 키웁니다. 이 두 마리의 개의 이름은 하나는 편견(犬)이고, 다른 하나는 선입견(犬)입니다. 그런데 이 두 마리 개를 쫓아버릴 수 있는 특별한 개도 있습니다. 이 개의 이름은 조금 긴데 ‘백문이 불여일견’(犬)입니다. 이 개는 온 몸에 흰털 무늬가 가득해서 백무늬 불여하다고 했고, 애칭으로 줄여서 ‘일견’(犬)이라고도 부릅니다.
개로 비유한 편견이란 ‘한 쪽으로 치우친 공정하지 못한 견해’를 말합니다. 그리고 선입견이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 또는 주장에 대해서 직접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리 마음에 담고 있는 견해’를 말합니다. 그리고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보고 확인한 올바른 견해’를 말합니다.
이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저마다 편견과 선입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하거나 판단을 하려고 할 때 어김없이 나타나 영향을 미칩니다. 때로는 그 편견과 선입견이 심각한 수준이어서 생각과 판단을 그르치게 만듭니다. 그래서 큰 실수를 저지르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편견과 선입견은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처럼 사실을 확인해 보고 정확하게 알게 될 때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 편견과 선입견을 우상이라고 부르면서 네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가 종족의 우상입니다. 인간이라는 종족의 관점에서 가지게 되는 편견이나 선입견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새가 짹짹하고 소리를 내고 있는데,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슬플 때는 새가 슬프게 운다고 하고, 또 자신이 기쁠 때는 새가 노래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그저 자신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판단하는 오류를 많이 범합니다.
둘째가 동굴의 우상입니다. 자신이 타고난 성격이나 환경으로 만들어진 좁은 생각 때문에 가지게 되는 편견이나 선입견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기가 경험하고 아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판단하는 오류를 말합니다.
셋째가 시장의 우상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정보를 교류하는 시장에서 떠도는 이야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편견이나 선입견을 말합니다. 소위 ‘... 카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나도 모르게 영향을 받고 잘못 판단하는 오류를 말합니다.
넷째가 극장의 우상입니다. 극장에서 배우의 연기를 실제로 받아들이듯이 권위 있는 사람들의 말이나 전통적인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가지게 되는 편견이나 선입견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서 맛 집을 소개하면 그대로 믿고 그 집이 제일인 줄로 아는 오류를 말합니다.
이런 베이컨의 지적대로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수많은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실수를 저지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런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하늘이 주신 기회를 놓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하시던 중에 제자들과 함께 고향을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의 고향은 갈릴리 내륙지방에 있는 나사렛을 말합니다.
이 나사렛은 예수님께서 자라신 곳입니다. 지금도 어머니와 동생들이 살고 있는 정든 고향입니다. 마 5:13을 보면 유대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뒤 본격적으로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러 가는 도중 잠시 들르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셨습니다.
이번 고향 방문은 한참 갈릴리 지역에서의 사역이 활발하게 무르익고 있을 때에 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고향에까지도 전해진 뒤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를 느끼시고 일부러 고향 나사렛을 찾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에 가셔서 가장 관심을 두셨던 곳이 회당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당시 회당에서는 그 회당을 방문한 선생들에게 회당장이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회당에서 선생들이 성경을 가르친 것을 듣고 자라셨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갈릴리 지역 곳곳에서 환영을 받으시고 그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구름처럼 모여드는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마가는 본문 3절에서 저들의 반응을 한 마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를 배척한지라”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환영하기는커녕 배척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께서 고향을 떠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저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저들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이 편견과 선입견 때문입니다. 마치 집을 방문한 귀한 손님들을 향해 짖어대는 개들처럼 저들 마음속에 못된 개 두 마리 즉 편견과 선입견이 날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저들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편견과 선입견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게 하고 배척하게 만들었던 편견과 선입견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학벌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입니다.
2절을 보면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저들이 했던 첫 번째 말이 이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사실 나사렛 사람들은 지난 30년 동안 예수님을 지켜보아왔습니다. 변변한 교육을 받은 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교육이라고 해 봐야 회당에서 가르쳐주는 초등교육이 전부였습니다. 고등교육을 받으려면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시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고향을 떠난 일이 없으셨습니다.
당시 회당에서 성경을 가르치려면 적어도 고등교육은 받아야만 했습니다. 랍비가 되는 교육을 받든지 바울처럼 성경학자가 되는 대학자의 문하에서 사사를 받으면 더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교육을 받지 못한 분이라는 사실을 저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니 깜짝 놀랄만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이 회당에서 들어본 그 어떤 성경 가르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권위가 있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학벌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로막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사회에 고질적인 편견과 선입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학벌’입니다.
한 청년이 조용히 찾아와 심적 고통을 털어놓았습니다. 자기는 지방 대학을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실력이 있는 대학이고 거기서 최선을 다해 공부해서 학점도 잘 받고 각종 자격증도 이것저것 땄다는 것입니다. 남들처럼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서류를 냈는데 좀처럼 연락이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위 서울의 SKY출신이 아니면 웬만한 기업에서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교회도 이런 풍조를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울의 중대형 교회의 담임목사 청빙 조건을 보면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장신대 신대원 출신으로 박사학위 소지자여야 하고 외국에서 유학하면 가산점을 준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오늘 한국교회에서는 절대로 목회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둘째 과거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2절을 보면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저들이 했던 두 번째 말이 이것입니다.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사실 지금 저들이 보고 있는 예수는 지금까지 자기들이 알고 있던 예수가 아닙니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예수는 저런 놀라운 말씀을 할 수 있는 지혜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알고 있는 예수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하는 말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교육목사 시절에 겪었던 일입니다. 아동부 수련회를 떠나는데 한 엄마가 찾아와서 신신당부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는 아침을 먹지 않습니다. 대신 이런 것 저런 것 간식을 챙겨주세요’ 당황스러웠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아이 하나를 별도로 챙겨주는 일도 번거로울뿐더러 만일 그럴 경우 혹시 공동체 안에서 그 아이가 따돌림을 받지 않을까 우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수련회에서 이 아이가 아침을 너무도 잘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맛있다고 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물어보니까 집에서는 아침에 늘 토스트하고 씨리얼을 준답니다. 자기는 유치원 다닐 때 그게 싫어서 먹지 않았는데 엄마는 아예 자기가 아침을 먹지 않는 못된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런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의 과거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 사람을 계속해서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오해를 낳는 경우가 많습니다.
셋째 배경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3절을 보면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저들이 했던 세 번째 말이 이것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사실 저들이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그 말씀은 목수가 할 수 있는 수준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랍비나 대학자들 수준에서나 할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아들로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집안 출신인데 어떻게 저런 수준의 말씀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사회에서는 한 사람을 평가할 때 그 배경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습니다. 한 예로 고향이 어디냐를 묻습니다. 지역적 편견과 선입견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뭐하시냐를 묻습니다. 학교는 어디를 나왔느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이런 잘못된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자기들을 위해 일부러 찾아오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만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만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그래서 결국 고향을 위해 변변한 도움을 주지 못한 채 떠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요? 그래서 6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저들의 편견과 선입견이 결국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편견과 선입견이 저주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편견과 선입견을 넘어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겸손해야 합니다.
약 1:5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우리 자신이 지혜가 부족함을 인정하는 태도가 우선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경험, 내 지식, 내 판단 이런 것들이 충분하지 않고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겸손한 자세로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떤 판단을 하려고 할 때, 특히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삼하 2:1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 가리이까” 다윗은 그토록 집요하게 자기를 추격하던 사울 왕이 죽고 백성들의 여론도 다윗 밖에는 왕이 될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때 다윗은 겸손하게 여호와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고 여쭈었던 것입니다.
자칫 다윗은 자기의 욕심에 따라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따라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여론에 등 떠밀려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겸손하게 주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성급하게 판단하다보면 편견과 선입견에 휘둘릴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시 119:105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인은 늘 말씀을 앞세우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등불을 켜고 그 등불이 보여주는 길을 따라 인생길을 걷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등불이나 랜턴 없이 나서면 실족하게 됩니다. 길을 찾지 못해서 길이 아닌 곳으로 들어서기도 하고, 때로는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또 때로는 낭떠러지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 생각과 판단으로만 인생길을 걸으면 각종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실족하게 됩니다. 지름길을 앞에 두고도 멀리 돌게 됩니다. 엉뚱한 길로 들어서서 영영 목적지를 찾지 못하게 됩니다. 오판하게 되어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올바르게 인도해 줍니다. 편견과 선입견을 물리치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는데 예수님을 배척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복이 찾아왔는데 그 복을 걷어차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잘못된 편견과 선입견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찾아온 복을 잘 누리려면 이 편견과 선입견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평소에 늘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지배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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