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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지도자의 선발기준

영적 지도자의 선발기준

딤전 3:1-7

 

   한 가지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만일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님이시라면 어떤 사람을 채용하시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입사원서를 내고 면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뽑으시겠습니까?

   학교 성적이 좋은 사람을 뽑으시겠습니까? 여러 가지 자격증을 딴 사람을 뽑으시겠습니까? 그 분야의 경력이 있는 사람을 뽑으시겠습니까? 능력이 있는 사람을 뽑으시겠습니까? 사람이 좋은 사람을 뽑으시겠습니까?

 

  미국 정부에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자리가 3,141개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원서를 제출한 사람이 33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때 미국 정부는 철저한 인재선발 기준을 근거로 사람을 뽑는다고 합니다.

  미국 정부가 견지하고 있는 인재선발기준이 ‘3C’ 랍니다. 첫째가 ‘Competence’ (능력)입니다. 단순한 성적 좋은 수재를 뽑는 것이 아니라 종합적인 업무처리 능력을 본다는 것입니다. 둘째가 ‘Character’(인격)입니다. 사람됨과 성품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가 ‘Commitment’ (헌신)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온전히 헌신하는 자세를 본다는 것입니다.

 

  인도 캘커타에서 사역하던 마더 테레사는 자기를 도울 조수를 뽑을 때 남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세 가지 기준인데 첫째는 잘 웃는 것이고, 둘째는 잘 먹는 것이고, 그리고 셋째는 잘 자는 것이랍니다.

  마더 테레사가 이런 기준으로 사람을 뽑았던 이유가 독특합니다.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는 사람만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잘 견딜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만이 남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사람들을 뽑으실까요? 주님께서 주님의 귀한 사역을 맡기실 사람을 뽑으실 때 어떤 기준으로 뽑으실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답을 찾으면서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제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의 일  부분입니다. 바울은 당시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던 제자에게 목회적 가르침을 주기 위해 이 편지를 썼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세우는 일에 관해서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교회의 감독을 세우려고 할 때 어떤 사람을 세워야 할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감독은 도대체 어떤 직분일까요? 우선 이 감독은 초대교회 시절에 아직 교회의 직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되기 전에 세워졌던 직분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목사와 장로 직분이 체계적으로 제도화되기 전에 교회를 지도하던 지도적 직분이었습니다. 물론 오늘의 감리교에서 목사 직분 위에 세워진 감독 직분과는 다른 것입니다.

   대체로 초대교회 시절에 사도들은 연륜을 갖추고 신앙적인 모범이 되는 사람을 훈련하여 감독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감독들에게 교회 생활과 사역을 이끌고, 교인들의 신앙생활 전반을 보살펴주는 책임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이 감독은 교회 행정과 교육 그리고 목회의 수반으로서 지도자적 위치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렇게 중차대한 사람을 뽑아서 훈련할 때 선발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적 지도자의 선발 기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본문이 제시하는 영적 지도자의 선발 기준은 무엇일까요?

 

첫째, 영적 리더십입니다.

   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신앙적 경륜이 깊지 않은 사람을 감독에 세우면 교만으로 말미암아 마귀가 당할 정죄에 떨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감독에 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영적인 리더십이 서 있는 사람을 감독으로 세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리더십이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영적인 영향력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미쳐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더욱 잘하도록 이끌어주는 힘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영적인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 주변에는 정말 하나님을 더욱 잘 믿어보려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삼상 22장을 보면 우리가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하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블레셋 가드에 은신해 있다가 다시 유다 지역의 아둘람 굴로 피해왔습니다.

   삼상 22:1-2을 보면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지금 다윗은 도망자 신세입니다. 언제 사울에게 발각되어 죽게 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다윗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무려 400여명이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들도 다윗과 내통하였다고 사울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삼상 22:17-19절을 보면 제사장들이 다윗을 도왔다고 사울 왕이 부하를 시켜서 제사장 85명을 죽였을 뿐 아니라 놉이라는 성읍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도륙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 주변에는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사울은 왕입니다. 권력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이게 마련입니다. 권력 주변에는 부스러기라도 얻어먹을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울 주변에는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습니다.

   삼상 22:8을 보면 사울이 이렇게 한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알리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실제로 사울 왕 주변에는 에돔 출신의 도엑이라는 사람 빼놓고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다 사울에게서 등을 돌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있었을까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그가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 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영적 리더십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다윗은 쫓기는 신세입니다. 위태로운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기도했습니다. 23:2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4절에 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향했고, 하나님께서도 사울이 그토록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녀도 눈동자처럼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 주변으로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영적인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영적 리더십을 가지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해바라기처럼 늘 하나님을 향하는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됩니다. 영적인 사람들이 이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영적인 도움을 받고자 그 주변으로 모여듭니다. 그래서 영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게 됩니다.

 

둘째, 본의 리더십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감독의 선발 기준으로 제시한 두 번째 기준은 본의 리더십입니다. 한 마디로 본을 보일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을 감독으로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이런 말씀입니다. 감독이 될 사람은 그 가정이 본이 되어야 하고, 그 삶이 본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그 사역이 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이 되는 사람을 감독으로 세울 때 교인들이 그 사람의 본을 받으면서 올바로 믿음이 자라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이름 하여 ‘본의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지도자가 되면 지도자의 권리를 주장하려 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기 쉽습니다.

 

  영국의 처칠수상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처칠이 급한 일이 있어서 운전사에게 차를 급히 몰게 했습니다. 그런데 교통 경찰관이 과속으로 달리는 것을 차를 세우도록 하고 면허증을 보자고 했습니다.

  기사가 말했습니다. "수상께서 타셨습니다." 경찰관이 답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속은 과속입니다. 딱지를 떼겠으니 벌금을 물도록 하십시오." 이번에는 처칠이 직접 나서서 그 특유의 여송연을 문채 말했습니다. "이봐! 내가 누군 줄 알아?" "예, 얼굴은 우리 수상 각하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법을 지키는 것은 비슷하질 않습니다." 결국 수상 차는 딱지를 떼었습니다.

  처칠은 의회에서 업무를 마치고 올라와 경시총감을 불렀습니다. 그 딱지 뗀 경찰관을 격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그 경찰을 찾아 특진시킬 것을 명했습니다. 그러나 경시총감은 과속차를 적발했다고 특진시키라는 규정은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면 자리가 주는 권력을 과시하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삶이 변질되기 쉽습니다. 그럴 때 더욱 본이 되려고 힘써야 합니다.

   고전 4:1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할 수 있는 이유는 평소에 늘 고린도 교인들의 본이 되려고 힘써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잔칫집에 갔습니다. 그 집 하인이 다가와서 어린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마실 것 뭘 줄까? 우유를 마실래 아니면 술을 마실래? 네가 원하는 대로 갖다 주마." 그러자 어린아이는 이렇게 주문했다. "아버지가 마시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속으로 술을 마시고 싶었으나 어린 아들을 생각해서 술을 요청할 수 없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나만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들은 본이 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목사가 되고 난 뒤에 가장 힘든 것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본 모습 그대가 본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본 모습 이상의 행동을 하려니 힘이 듭니다. 그런데 어떤 때도 그 조차도 힘이 듭니다.

   그래도 영적 지도자들은 본이 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태도를 갖는 일이 중요합니다. 부족하지만 본이 되려고 노력하다 보면 점차 성숙해 지기도 합니다.

셋째, 공적 리더십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감독의 선발 기준으로 제시한 세 번째 기준은 공적 리더십입니다. 한 마디로 공적으로도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을 감독으로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여기서 외인이란 교회 밖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교회 밖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말하고 이것은 다른 말로는 교회 밖의 공적인 영역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는 말은 교회 밖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정리해 보면 교회에서 영적인 지도자를 세울 때 그 사람이 교회 밖에서는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 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공적인 영역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교회 내의 지도자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친구 목사님으로부터 푸념어린 한탄을 들었습니다. 타교단의 한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답니다. 강의를 해 보니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됐답니다. 학생들 가운데 이혼한 사람들이 상당수가 되더랍니다. 그리고 전과자들도 눈에 보이더랍니다.

  왜 저런 사람들을 신학생으로 받았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랬던 답변이 가관이랍니다. 겉으로는 처음에는 입학할 때 그런 내용을 숨기고 들어오기 때문에 걸러낼 수가 없었다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속사정은 달랐답니다. 학교 운영상 어쩔 수 없이 다 받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최근의 한국사회가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금년 ‘대상’이라는 불교계의 한 잡지에서 조사한 종교 신뢰도 조사 결과가 이렇습니다. 천주교가 31.7%, 불교가 31.6%, 그런데 기독교는 21.6%입니다. 종교 밖의 사람들 눈에 비쳐진 각 종교의 신뢰도 중 기독교가 가장 낮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신뢰도가 낮은 이유로 언행불일치를 첫 번째로 꼽았습니다. 그리고 시급히 개선해야 할 점으로 윤리도덕의 실천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공적 리더십이 부끄러울 정도로 바닥을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는 나름대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비해서 교회 밖에서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행 11:26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복음이 확산되어갈 때 이방 땅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교회 밖의 사람들이 성도들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들과 다른 삶을 산다는 뜻이고, 자기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적 영역에서 이런 평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이라 뭔가 달라도 다르다’는 말을 들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주님의 귀한 사역을 담당할 영적 지도자를 찾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선뜻 택하실만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영적 리더십, 본의 리더십, 그리고 공적 리더십을 갖추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