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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신비한 응답

기도의 신비한 응답

렘 16:19-21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라는 것이 있습니다. 1961년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가 발표한 기상 모델의 새로운 이론입니다. 브라질에서 한 나비가 펄럭인 날갯짓이 멀리 미국의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그러니까 사소한 움직임 하나가 도저히 연관이 없을 것 같은 곳에서 거대한 기상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상학자들은 이 나비효과가 실제 기상현상에서 발견된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가 엘니뇨현상입니다. 엘니뇨는 페루 인근에서 따뜻한 해류가 차가운 해류를 밀어내서 바닷물의 온도가 높아지는 현상입니다. 엘니뇨라는 말은 스페인어로 “아기 예수”라는 뜻입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나신 크리스마스 시즌에 정말 가끔 알 수 없는 이유로 일어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엘리뇨 현상 때문에 지구촌 전역에서 엄청난 기상 이변이 일어납니다. 어떤 곳에서는 혹한과 가뭄이 또 어떤 곳에서는 이상고온과 폭설로 갖가지 재난이 일어납니다.

   로스 쿠퍼-존스턴이란 사람이 쓴 [엘니뇨: 역사와 기후의 충돌]이란 책을 보면 놀라운 사실이 기록되어있습니다. 1641년 중국에 엄청난 가뭄이 일어나서 명나라가 몰락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바로 이 엘니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912년 당대 최고의 호화여객선 타이타닉이 침몰된 원인 역시 이 엘니뇨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에 실패한 것도 그 원인이 바로 이 엘니뇨 때문에 일어난 기상이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인과관계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런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작고 사소한 기상현상이 지구촌 곳곳에서 정말 놀라운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일이 때로는 내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때가 있습니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때로는 내 삶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미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다가 영적인 영역에서도 이런 나비효과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의 기도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남왕국 유다가 멸망해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미 바벨론으로부터 1차 침공을 받아서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야김 왕은 정신 차리지 못하고 우상숭배하며 하나님 앞에서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이제 바벨론이 2차 침공하기 직전입니다.

   이런 안타깝고도 급박한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 내용이 놀랍습니다. 19절을 보면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간단히 말하면 지금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을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할 상황인데,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조국 유다가 하나님께 돌아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국가적인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상황인데,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잘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무척이나 생뚱맞은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왜 예레미야가 하필이면 이 때 이런 기도를 드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런 기도를 드린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평상시 예레미야가 해왔던 것과 다른 기도를 뜬금없이 드리게 됐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기도가 자그마치 600년 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 응답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레미야는 이 기도의 응답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의 결과는 먼 훗날 예레미야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됐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예레미야,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저 이스라엘 땅에 살던 한 사람의 뜬금없는 기도의 열매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도의 나비효과입니다. 영적인 나비효과입니다.

 

    미국의 2차 대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챨스 피니 목사님의 자서전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시골 마을에 경건하지만 무서운 폐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가난한 데다 몇 년 동안 병과 싸우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친절한 상인이 있었다. 이 상인은 이 병자와 가족들에게 가끔씩 필요한 것들을 보내주곤 했다.

  이 병자는 고마웠지만 답례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기도 밖에 없어서 이 상인의 구원과 아울러 그 마을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다 이 병자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후 나는 이 마을을 방문했다. 그 상인이 구원 받은 것은 물론이고 이 마을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 때 이 병자의 부인으로부터 남편의 일기를 건네받았다. 그 일기를 읽으면서 그 마을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고, 또 그 상인이 구원 받게 된 원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일기에는 병자가 죽기 전에 기도했던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었다. 그 상인의 구원을 위한 기도, 그 마을의 복음화를 위한 기도, 마을의 목회자 30명을 위한 기도, 그 마을의 교회들을 위한 기도...

   챨스 피니 목사님은 바로 이 죽은 병자의 기도 때문에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때로 나비효과를 일으킵니다.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사심 없이 기도할 때 그 기도가 브라질의 한 나비의 날갯짓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마치 머나먼 텍사스에서 토네이도가 일어나듯 놀라운 기도의 응답을 일으킬 때가 있습니다.

 

  제가 이번 휴가기간에 중국 서안을 다녀왔습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섬서신학교 교수 세미나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확인한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섬서성에 전체 교회 가운데 1/3이나 되는 교회에서 주일학교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5년 전 제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저들이 주일학교라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었습니다. 주일학교를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제게 안타까운 마음을 주셔서 그곳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주일학교를 설명하고 함께 기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곳에 주일학교가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심코 성령의 인도를 따라 기도할 때 그 기도가 여러분도 모르는 엄청난 기도의 응답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바람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기도할 마음을 주실 때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기도 제목을 생각하게 하실 때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으로 기도해 보십시오. 교회를 위해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기도해 보십시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저 북한을 위해 성령께서 떠올려 주시는 기도제목으로 기도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기도가 나비효과로 엄청난 역사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 기도나 기도의 나비효과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기도나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도를 통해서 역사하실까요? 오늘 본문의 예레미야의 기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올바른 신앙고백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19절을 보면 예레미야는 기도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 날의 피난처시여!” 지금 예레미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의 힘, 자기의 요새, 자기가 겪고 있는 환난 날의 피난처라는 신앙고백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레미야는 온 몸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역했던 시기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참혹한 때였습니다.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던 그 시절입니다. 세 차례 바벨론이 쳐들어 와서 온 국토를 유린하고 성전을 초토화시키고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가던 그 때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슬퍼했습니다. 렘 1:6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신을 보니 도저히 부르심에 응답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아이처럼 너무도 연약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예레미야는 실제로 사역의 현장에서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 나의 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했습니다. 특히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외쳤을 때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저주했습니다. 심지어 고향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실제로 여러 차례 매도 맞았고, 여러 차례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열어주셨고 예레미야를 지켜주셨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위태롭고 고통스러운 사역을 40년이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여호와 나의 요새, 환난 날의 나의 피난처시여!”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올바른 신앙고백으로 드리는 기도야 말로 하나님께 올려 집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 기도를 통해 역사하셔서 신비로운 응답의 결과를 나타내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입니다.

   본문 19-20을 보면 예레미야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 사람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하리이다.” 이 기도는 형식상 기도라기 보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예언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어폐가 있기 때문에 기도인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장차 우상을 섬기던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조상 때부터 전해져 오던 우상숭배가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숭배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예레미야는 지금 시급하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조국 유다가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이방나라 저 바벨론이 쳐들어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도를 드리고 싶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들을 공격해 오는 저 이방민족 바벨론의 멸망을 위해 기도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 상황에서 저 바벨론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땅 끝까지 이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이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기도는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비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세워놓으셨던 뜻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하나님의 비전, 그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축구시합이 열렸습니다. 상도교회와 중앙교회가 한편 승부를 펼칩니다. 두 교회의 명예가 걸린 시합입니다. 그리고 이긴 팀에게 큰 상이 주어지는 시합입니다. 두 교회 교인들이 열렬히 응원을 펼칩니다. 두 교회 모두 시합에 앞서서 선수들과 교인들이 함께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우리교회가 저 교회를 물리치고 꼭 이기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요? 아마도 하나님께서 몹시도 입장이 난처하실 겁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실까요? 어떤 기도를 들으실까요? 이긴 팀은 자기 팀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자기의 소원에 함몰되어서는 안 됩니다. 보다 넓은 지평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런 기도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한 응답의 역사를 나타내게 됩니다.

 

셋째, 약속이 있는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을 2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땅 끝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셔서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예레미야의 기도대로 역사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기도의 응답은 기도 즉시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거의 대부분 기도 현장에서 기도의 응답은 약속으로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때에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직 그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기도에 대한 응답은 약속으로 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마 1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17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왜 신약성경을 시작하는 벽두에 이 계보를 기록해 놓았을까요? 구약에서 약속된 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내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메시야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내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과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약속만 받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저들이 죽고 난 후 긴 세월 뒤에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응답이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약속으로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그 약속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살아생전에 그 기도의 응답을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약속의 응답을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약속을 받은 기도를 드릴 때 이 기도가 장차 놀라운 응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예레미야와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차 생각지도 못했던 신비롭고 놀라운 응답을 받는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