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박상훈목사

[스크랩] 귀신을 내쫓으신 예수님! (막1:21~28)

귀신을 내쫓으신 예수님! (막1:21~28)


막1: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막1: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막1: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막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막1: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막1: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막1: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막1: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지난 주일에 우리가 살펴본 대로,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통해서, 예수님은 그가 우리를 악의 세력에서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보여주셨습니다.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여기서 예수님은 마귀와 그의 사자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계20:2의 말씀과 같이, 마귀는 사탄과 동일한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귀가 바로 사탄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귀의 사자들은 귀신들을 가리킵니다.

본시 사탄이나 귀신들은 모두 천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계5:11의 말씀과 같이, 천사의 수는 만만이요 천천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천사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무수하게 많습니다. 그들은 하늘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러던 중 천사장 가운데 하나인 루시퍼가 교만해서,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자 했습니다. 계12:4 말씀에 의하면, 그 때 천사들의 삼분지 일이 그를 따랐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하늘에서 내쫓기고 말았습니다.

이 때 하늘에서 내쫓김을 당한 천사장 루시퍼가 바로 사탄입니다. 그리고 이 때 천사장 루시퍼와 함께 하늘에서 내쫓김을 당한 천사들, 곧 타락한 천사들이 바로 귀신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바로 마귀의 사자들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들은 사람처럼 죽는 법이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사람처럼 장가가거나 시집가는 법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수는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처음 창조되었던 수에서 조금도 변함없이 그 수 그대로 영원토록 유지됩니다.

아울러 그들은 사람처럼 육신을 가진 존재가 아니기에, 쇠약해지거나 고단함을 느끼는 법이 없습니다. 그들은 잠을 자면서 쉬는 법도 없고, 휴가를 가는 법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끊임없이 악한 일만 계속해서 행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더러운 귀신”이 나옵니다. 이것은 귀신들 가운데 더러운 귀신이 있고, 반면에 상대적으로 좀 깨끗한 귀신도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귀신의 본질이 바로 더러움 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귀신들은 언제나 더럽고도 악한 짓만 행할 뿐입니다.

사탄이나 귀신들에게는 깨끗함이나 선을 행함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회개도 없고, 죄 사함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운명은 필연적으로 영원한 불못에 던짐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귀신 들린 사람이 나옵니다. 귀신 들린 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선 이것은 정신병과는 다릅니다. 정신병은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신병에 걸린 사람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말이나 행동이 비정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아이의 경우처럼, 귀신이 비정상적인 행동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에게 말을 할 때 보면, 언제나 멀쩡하고도 정상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귀신 들린 것과 정신병은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귀신 들린 것과 귀신에게서 영향을 받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을 보면, 귀신들이 사람을 미혹합니다. 그 결과 귀신에게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더러운 사상을 따르기도 하며, 더러운 태도를 가지기도 하고, 또한 더러운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딤전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약3: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약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약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이와 같이 더러운 귀신은 사람들을 미혹해서, 그들로 하여금 더러운 사상에 빠지게 하거나 더러운 짓을 하게 만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모두가 귀신에 들린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귀신 들린 사람에게 나타나는 세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귀신이 몸 안에 거합니다(indwelling).

오늘 본문 25절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며,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는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의 몸 안에서 계속적으로 살고 있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둘째, 귀신이 몸을 지배합니다(controlling).

오늘 본문 23절을 보면,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이는 귀신이 그 사람의 발성 기관을 사용해서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마12:22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우에 따라서 귀신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말을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의지로 귀신에게서 영향받는 것을 거부하며,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 들린 사람은 다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귀신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귀신의 뜻을 거부하지 못하고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귀신에게서 괴로움을 당합니다(tormenting).

오늘 본문 26절에 보면, 귀신이 빠져 나오면서 그가 사로잡았던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귀신은 본질적으로 더럽고 악하기 때문에, 귀신 들린 사람에게 괴로움을 끼칩니다. 그래서 행5:16을 보면, “더러운 귀신에 괴로움을 받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약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왜 귀신들이 떱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결국에 가서는 영원한 불못에 던짐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에 떨어야 할 것은 귀신들이지, 결코 우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귀신들을 무서워할 필요는 전연 없습니다.

고전6:19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우리의 몸은 귀신들이 거하는 귀신들의 전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몸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몸에는 더러운 귀신들이 거하지 못합니다.

요일4:4 말씀과 같이, 우리 안에 계신 이는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큽니다. 아울러 롬8:31 말씀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감히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이나 귀신들을 무서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막1: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막3: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막5: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막5: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이와 같이 귀신들은 예수님을 볼 때마다, 큰 소리를 지르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예수님을 무서워하면서, 두려움에 떨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의 어떠한 점이 귀신들을 떨게 만들었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을 떨게 만들었던 점을 네 가지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차례대로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밝히 알아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말씀이 더러운 귀신을 떨게 만들었습니다(21~23절).


막1: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들은 모두 가버나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4장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산 낭떠러지에서 예수님을 밀쳐 떨어뜨리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곳 나사렛을 떠나서, 가버나움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마4:13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사셨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북서쪽에 있는 해변 마을이었습니다. 세리 마태가 세금을 거두던 곳도 바로 가버나움이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예수님이 택하신 네 명의 제자들을 데리시고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눅4:16을 보면, 안식일에 예수님은 늘 회당으로 가셔서 그 곳에서 성경을 읽으시고, 그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 

가버나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맞아 그 곳에 있는 회당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회당에 모인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셨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셨을까요?


눅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눅24: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이와 같이 예수님의 첫 설교는 성경을 읽으시고 성경을 가르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도 성경을 가르치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때 가버나움에서도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시고, 성경을 가르치셨음이 분명합니다.  


막1: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이 성경을 가르치셨을 때, 그 곳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밝히고 있습니까? 이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서기관들은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박식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율법사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백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랍비, 곧 선생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서기관들은 권위 있게 성경을 가르치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이름난 랍비들의 견해를 인용해서 성경을 가르칠 뿐이었습니다. 예컨대 이 구절에 대해서 랍비 아무개는 이렇게 보았고, 랍비 아무개는 저렇게 보았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말을 전연 인용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예수님 자신의 권위로 말씀하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언제나 분명하고 확실하여, 모든 사람이 그대로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든 성경의 원 저자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모든 성경의 원 저자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권위로, 또한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시고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


막1: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여기에 “마침”이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가복음에서 자주 사용되는 “곧”이라는 단어와 똑같습니다. 단지 우리말 성경에서 이것을 “마침”이라고 번역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성경을 읽으시고 성경을 가르치실 바로 그 때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회당에서 성경을 가르치실 때, 곧 그 곳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회당에 있던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더러운 귀신이 소리를 지른 것은 그가 두려움에 떨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선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회당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고후11:14 말씀과 같이, 사탄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마찬가지로 귀신들도 광명의 천사들로 가장하며, 사람 안에 숨어서 은밀하게 역사하기를 좋아합니다.

게다가 그 당시 회당에서 신봉하던 유대교는 진리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 당시의 유대교는 거짓 종교였습니다. 그러기에 더러운 귀신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회당 안으로 들어가서,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그 곳에 머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회당에서 성경을 읽으시고 성경을 가르치시자,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더러운 귀신은 쓰고 있던 가면을 벗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은 자기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자, 두려움에 떨면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 더러운 귀신이 떨며 소리 질렀습니까? 예수님이 성경을 읽으시며, 예수님이 성경을 가르치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성경으로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또한 성경으로 귀신을 떨게 만드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더러운 귀신들을 떨게 만들겠습니까? 세상의 학문이 아닙니다. 신비한 체험이 아닙니다. 열심 있는 봉사도 아닙니다. 특별한 은사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더러운 귀신을 떨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언제나 성경만이 순전하게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러운 귀신이 교회 밖으로 내쫓깁니다. 그래야 더러운 귀신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이 자리에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오로지 성경에만 충실한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심판이 더러운 귀신을 떨게 만들었습니다(24절 상반부).


막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이것은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가 자기의 의사에 따라서 하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의 성대와 입술을 사용하여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는 결국 더러운 귀신이 예수님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먼저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그 당시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종종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나 마2:23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오래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셨던 것입니다. 예컨대 막16:6을 보면, 천사도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곧이어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에게 두 가지를 물었습니다. 첫째 질문은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입니다. 여기서 더러운 귀신은 “우리”라는 복수형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모든 귀신들을 대신해서, 더러운 귀신이 예수님에게 물었던 셈입니다.


마8: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가복음이 로마인을 위한 복음이라면,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위한 복음입니다. 여기에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대구법이 나타납니다. 대구법이라 함은 그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뜻이 같거나 비슷한 내용의 말씀을 반복해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앞에 나오는 질문, 곧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물음의 뜻은 무엇입니까? 뒤에 나오는 같은 내용의 질문이 그 의미를 분명하게 해줍니다. 이것은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왜 우리들을 그냥 좀 내버려두지 아니하십니까? 왜 우리들을 상관하면서, 우리들을 괴롭히십니까?”

이와 같은 뜻으로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에게 푸념 섞인 하소연을 했던 것입니다. 곧이어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에게 둘째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말하자면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이 그들을 영원한 불못에 던지시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옛날 사탄과 귀신들이 하늘에서 내쫓겼습니다. 그 때 누가 하늘에서 그들을 내쫓으셨습니까?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따라서 더러운 귀신은 앞으로도 때가 되면, 예수님의 심판으로 그들이 영원한 불못에 던짐을 당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마24:36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릅니다. 당연히 귀신들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더러운 귀신은 이제 그 날과 그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떨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멸망할 때가 이르렀나이까? 이제 우리가 영원한 불못으로 던짐을 당해야 하나이까?”

이와 같이 더러운 귀신은 그들에게 임할 예수님의 심판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대로, 때가 되면 심판주이신 예수님은 그들을 불못에 던지심으로 그들을 멸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면서 떨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론 우리는 그 날과 그 때를 모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 모두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그 날과 그 때를 준비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날과 그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삽시다. 언제 우리에게 그 날과 그 때가 임하더라도, 아무런 아쉬움이나 뉘우침이 없도록 삽시다. 그리해서 주 앞에 설 때에, 주께로부터 칭찬을 받으며 크고도 영원한 상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거룩하심이 더러운 귀신을 떨게 만들었습니다(24절 하반부).


막1:24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더러운 귀신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거룩하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십니다. 반면에 귀신은 더럽습니다. 언제나 더러움은 거룩 앞에 두려워하며 떨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서 더러운 귀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신 예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두려워하며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을 때, 그는 떨었습니다. 예수님의 세 제자가 변화 산에서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은 무서워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거룩하신 예수님을 뵈었을 때, 그는 두려워서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조차도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는 두려워하며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하물며 더러운 귀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신 예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어찌 두려워하며 떨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사탄과 귀신들이 하늘에서 내쫓긴 것도 그들이 거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신 예수님은 더러워진 그들을 하늘에서 내쫓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룩하신 예수님은 더러운 그들을 영원한 불못으로 내쫓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러운 귀신은 언제나 예수님의 거룩하심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 거룩하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물론 거룩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와 같이 우리 안에 거룩하신 예수님이 사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러운 귀신을 무서워할 필요가 전연 없습니다. 오히려 더러운 귀신이 우리를 무서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 안에 거룩하신 예수님이 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거룩하신 예수님이 사십니다. 늘 거룩하신 예수님으로 충만해서,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의 거룩하심을 밝히 드러냅시다. 그리해서 더러운 귀신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능력과 권세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예수님의 권세가 더러운 귀신을 떨게 만들었습니다(25~26절).


막1: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여기에 예수님의 권세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의 질문에는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증언한 것에 대해서도 가타부타 말씀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향하여, 두 가지를 명하셨습니다. 첫째 명령은 “잠잠하라”입니다. “Be quiet!” 둘째 명령은 “그에게서 나오라”입니다. “Come out of him!” 이들 두 가지 명령을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명령은 “잠잠하라”입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이 예수님에게 질문하는 것도, 또한 더러운 귀신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더러운 귀신이라도 예수님에 대해서 바르게만 증언을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막1: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귀신들이 자신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을까요? 요8:44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사탄도 귀신들도 다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러니 거짓말쟁이인 귀신이 증언을 한들, 그 증언에 무슨 효력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예수님을 배척하던 자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힘입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귀신들이 예수님을 증언하면, 그들은 더욱 거세게 예수님과 귀신들은 한 패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 명령은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입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내쫓으시기 위하여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과 대화를 시도하시면서, 그를 설득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 들린 사람의 몸을 밧줄로 단단히 묶으라고 말씀하지도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도구도 사용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떠한 주문도 외우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곳에는 안찰도 없었고, 안수 기도도 없었습니다. 단지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향하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명령하실 때, 천지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천지와 만물을 향하여 명령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으십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할 따름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살펴본 대로,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명령에는 그 누구도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바람과 바다와 물결도 순종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더러운 귀신도 예수님의 명령에는 그대로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막1: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예수님의 명령에 더러운 귀신은 그 사람의 몸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오기가 싫었지만, 예수님이 명령하시니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의 본질이 더럽고 악하기 때문에, 더러운 귀신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그 사람을 괴롭혔습니다.

더러운 귀신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눅4:35에 의하면, 그 사람은 경련을 일으키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상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가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주셨던 것입니다. 

마침내 더러운 귀신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그 사람 몸에서 내쫓겼습니다. 말하자면 더러운 귀신은 또다시 두려움에 떨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때 더러운 귀신은 무엇에 떨었습니까? 그를 내쫓으시는 예수님의 권세에 떨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과 귀신들을 하늘에서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귀신 들린 사람의 몸에서 내쫓으셨습니다. 장차 예수님은 사탄과 귀신들을 영원한 불못으로 내쫓으실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예수님의 권세가 더러운 귀신을 떨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막1: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이제 오늘 말씀의 결론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또다시 놀랐습니다. 그들은 22절에서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치심에 이미 한번 놀랐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그들은 더 크게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을 내쫓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더러운 귀신이 예수님에게 보였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을 알고, 예수님 앞에서 떨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심판과,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예수님의 권세에 계속해서 떨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보였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계속해서 놀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놀라면서, “이는 어찜이냐”고 서로 물었습니다. 말하자면 아직도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을 제대로 깨닫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을 알고 떨었지만, 그가 가야할 곳은 영원한 불못입니다.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한다면, 그들이 가야할 곳도 역시 영원한 불못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막1: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예수님의 소문은 어떠한 내용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권위 있는 새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에게 명하시면, 더러운 귀신도 그대로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소문은 그 즉시 온 사방에 퍼져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내쫓으심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알고, 날마다 그 앞에 떨며 나아갑시다.

우리를 악의 세력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깊이 감사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본받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널리 증거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