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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예수님! (막3:1~6)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예수님! (막3:1~6) 


막3: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막3: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막3: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막3: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막3: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막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만 그 방법만 남았을 뿐이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그 동안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들도 내쫓아주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을 했습니까?


요5: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여기에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이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신봉하는 자들을 일컫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서른여덟 해 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누가복음 13장에서는 몸이 꼬부라진 여자를, 누가복음 14장에서는 수종병이 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의 병을 고쳐주신 날은 모두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지키던 전통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병을 고치지 못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일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고의적으로 안식일을 범한다고 보았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신성 모독을 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칭하셨습니다. 또한 요10:30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감히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는다고 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막2:5에서 예수님은 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막2:28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들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출34:14을 보면,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한다고 보았습니다. 게다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명백하게 신성 모독을 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떠한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물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생각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과 타협을 하시거나, 그들을 달래기 위한 회유책을 쓰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하나님에게는 거짓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예수님은 진리만을 말씀하시며, 진리만을 따라서 행하셨습니다. 그 어떠한 고통이 따르더라도, 예수님은 언제나 진리를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우리도 늘 진리 안에서 참되게 살아갑시다. 또한 요20:28에 있는 도마의 고백처럼,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분명하게 고백합시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말씀을 네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1~2절).


막3: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눅4:16을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늘 회당에 가셔서 백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막1:39에 의하면, 예수님은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때는 어느 안식일이었습니다. 장소는 갈릴리에 있는 어느 회당이었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눅6:6은 “또 다른 안식일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서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와 같은 안식일이 아니라, 그 후의 또 다른 안식일이었습니다.

그 날 그 회당에는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중풍에 걸려서, 그의 한쪽 손이 마비되었을 것입니다. 눅6:6을 보면, 그의 오른쪽 손이 말랐다고 말씀합니다. 누가는 의사였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마가보다도 좀더 정확하게 묘사를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오른손잡이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도 분명 오른손잡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오른손이 말라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그는 생계를 이어나가는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신약성경의 외경인 묵시복음과 히브리인의 복음에 의하면, 그는 본시 석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오른손이 말라버려서, 그는 더 이상 석공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구걸을 해서 먹고 살아가는 거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날 그가 예수님을 보게 되자, 그는 예수님이 자기의 병을 고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게 자기의 병을 고쳐주시도록 간청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더 이상 수치스럽게 남에게 구걸하면서 살지 않게 해달라고 예수님에게 호소했습니다.

마12:10에 의하면, 그 모습을 보면서 바리새인들이 먼저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들에게는 병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만을 애써 찾고 있었습니다. 


막3: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여기에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기회를 노리던 자들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그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눅6:7에 의하면, 이 때 서기관들도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함께 찾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때의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에 속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주시하고 있다”라는 동사의 시제가 미완료형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계속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에게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음을 의심치는 않았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의 각종 병을 고치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과연 예수님이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시는가에 있었습니다.

출20:10을 보면,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에 덧붙여서, 수도 없이 많은 조항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자신들의 전통으로 삼아 지켰습니다. 

예컨대 안식일에는 병든 자를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일을 하는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물론 안식일이더라도, 생명이 위급할 경우에는 예외였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위급한 경우더라도, 죽지 않을 정도로만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상은 안 되었습니다.

그들의 탈무드에 보면, 이와 같은 실례가 나옵니다. 사고가 나서 무너진 집에 사람이 깔렸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살아있으면, 안식일이더라도 그를 구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죽은 것으로 판명되면,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손 마른 사람은 긴급하게 그의 생명을 구조해야 할 필요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그의 병을 고치면 안 되었습니다. 물론 안식일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그를 고쳐주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눅6:8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요2:25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다 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전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때는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회당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는 데 있었습니다. 분명 그들은 속으로 이와 같이 외쳤을 것입니다.

“얼른 그를 고쳐주어라. 그러면 너는 그 길로 끝장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악의에 찬 시선으로 줄곧 예수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은 어떠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사랑의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셨을 것입니다.

호6:6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제사나 예배를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긍휼히 여기기를 바라십니다.

요13:34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먼 곳에서 사랑하려고 들지 맙시다. 민족이니, 겨레니, 지구촌이니, 인류니 하는 거창한 말로 사랑을 떠들지 맙시다.

작은 것부터, 또한 가까운 곳부터 사랑을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바로 이 자리부터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 사랑하기 어려운 그 사람, 사랑하고 싶지 않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서 먼저 사랑합시다. 바로 이것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질문입니다(3~4절).


막3: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시기를 내심 바랐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에게 병을 고치시는 능력이 있는지를 확인하고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할 수 있는가”에 있지 않고, “할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한다고 고발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눅6:8 말씀과 같이, 이 때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드러내시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실 수 있으셨습니다. 또는 안식일이 지나고 내일이나 모레쯤, 그를 고쳐주시겠다고 그에게 약속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고 하셨습니다. 회당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를 볼 수 있도록, 예수님은 회당 한 가운데에 그를 세우셨습니다.

눅6:8을 보면, “그가 일어나 서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오른손이 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리에 앉아있을 수도 있었고, 자기 힘으로 그 자리에서 일어설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기 발로 걸어서 회당 한 가운데로 나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생사의 기로에 서있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지키던 전통에 의하면, 그는 안식일에 고침을 받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전통을 무시하신 채, 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려는 듯 그를 회당 한 가운데에 서게 하셨습니다.


막3: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마12:10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먼저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전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시지 않고, 그들의 용어를 사용하셔서 그들에게 되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 대답은 물론 yes!입니다. 다른 날도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식일에 악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 대답은 물론 no!입니다. 안식일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날에도 악을 행하면 안 됩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대답은 of course입니다. 그것은 비단 안식일뿐만 아니라, 일주일 내내 해야 할 일입니다. “안식일에 죽이는 것이 옳으냐?” 대답은 of course not입니다. 그것은 안식일을 포함해서, 그 어느 때라도 옳지 못한 일입니다.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것은 분명히 선한 일입니다. 반대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분명히 악한 일입니다. 약4:17 말씀과 같이,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는 것은 그의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가 유대교의 전통에 얽매여 있으면, 그의 영혼은 구원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는 그를 죽이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악을 행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옳습니까?

예수님의 질문에 바리새인들은 대답하기가 난처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안식일에 선을 행하며,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으니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더라도,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악을 행하며 죽이는 것이 옳으니이다”라고 그들이 대답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들은 뭇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은 악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정죄하는 셈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4절 끝 부분을 보면, “그들이 잠잠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수도 없고, 저렇게 대답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정답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1: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안식일에는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배워서 선행을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마15:6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자기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떠나면, 비극과 불행이 초래됩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믿으십시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십시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서 사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내내 말똥말똥하다가도 성경만 읽으면, 하품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내 정신이 또렷또렷하다가도 설교 시간만 되면, 졸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시19:10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정금보다 더 사모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송이꿀보다 더 달게 여깁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발의 등이 되고, 내 길에 빛이 되어 나를 인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에 기쁨과 축복을 안겨줄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치료입니다(5절).


막3: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예수님의 질문에 바리새인들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잠잠했습니다. “잠잠하다”라는 동사의 시제도 미완료형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입을 다물었습니다. 따라서 그 자리에는 한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둘러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심령을 꿰뚫어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비친 그들의 마음은 완악했습니다. 헬라어로 “완악하다”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는 “대리석처럼 단단하다”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도 그들은 전혀 뉘우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한편으로는 탄식하시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탄식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죄악에 대해서는 노여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딤전2:4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십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사랑이 오늘 본문에서는 탄식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채찍을 들고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공의가 오늘 본문에서는 노하심으로, 곧 의분으로 나타났습니다.   

사1:5을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고 말씀했습니다. 마음이 완악해서 돌아서지 않으면 망합니다. 예수님이 탄식하실 때, 죄악 된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늦기 전에 돌아서야 합니다. 돌아서면 용서를 받고, 고침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실제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진리를 말씀하시며, 예수님은 언제나 진리를 따라서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손 마른 사람은 그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요1:3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이 때도 예수님은 창조의 역사를 일으키셔서, 순식간에 그에게 새로운 손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십시오. 그리하면 나의 메마른 것을 예수님이 회복시켜주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심을 확신합시다.  


넷째로, 바리새인들의 음모입니다(6절).


막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마른 손이 즉시 성한 손, 정상적인 손, 건강한 손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이 때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마땅하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아니시고야, 어떻게 이와 같은 기적,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시는 창조의 역사를 예수님이 행하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해야 옳았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눅6:11을 보면,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그만큼 완악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나가자말자 곧바로 헤롯당을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님을 죽일까 의논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헤롯당은 유대교의 종파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유대교는 네 파로 나누어졌습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그리고 열심당파였습니다. 헤롯당은 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종의 정치 세력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교만에 가득 찬 사람들이었습니다. 헤롯당은 로마를 등에 업고서, 정치 권력을 즐기던 속물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 둘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사이였습니다. 그렇지만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은 오로지 로마인들에게만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장이라도 예수님을 죽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로마를 등에 업고 있는 헤롯당과 의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눅23: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이것은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고발을 당하신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거나, 신성 모독을 했다는 말은 전연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유대교의 종교적인 문제로는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 다른 죄목들을 뒤집어씌워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헤롯당과 함께 이것을 의논을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여러 가지 정치적인 허위 사실들을 내세워서 예수님을 고발하기로 음모를 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23:15에서 말씀하신 대로, 결국 그들은 “지옥의 자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행15:5을 보면,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회개하고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빌3:5에 의하면, 사도 바울도 본시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심하게 교회를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은혜를 받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어, 순교하는 날까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충성을 다했습니다.

결론을 내립니다. 행4:12 말씀처럼, 예수님 이외의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결론은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믿으면 삽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멸망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믿어야만 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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