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물러가신 예수님! (막3:7~12)
막3: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막3: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막3:9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막3: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막3: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막3: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이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마12:15을 보면,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로 물러가신 것은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막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예수님은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지키던 전통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병을 고치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전통을 무시하셨습니다. 그들의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틀리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 권력의 비호를 받던 헤롯당과 함께 그 문제를 의논했습니다.
막10:45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막10:32 말씀과 같이, 때가 되자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하여 스스로 자원하여 앞서 나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전에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그들을 사도로 세우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박해를 피하여, 일단은 갈릴리 바다로 물러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특별한 사건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도 없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오늘 본문은 그 동안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행하신 사역을 요약해서 설명합니다.
TV나 비디오를 보면, 후편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전편의 내용을 요약해서 보여주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로써 예수님의 초기 갈릴리 사역이 끝나고, 이제부터 후기 갈릴리 사역이 시작되는 셈입니다.
줄거리를 요약해서 보여줄 때는, 가장 중요한 내용을 골라서 보여주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마가복음의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밝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증거는 명백하며, 충분합니다. 또한 그 증거는 압도적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말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명성입니다(7~9절).
막3: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헤롯당과 함께 그 방법을 의논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음모를 아시고,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로 물러가셨습니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고, 또한 제자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세베대의 두 아들, 곧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었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세리였던 레위, 곧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빌립과 나다나엘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다나엘은 바돌로매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일곱 명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나머지 다섯 명의 이름은 오늘 본문 바로 뒤에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로 물러가실 때, 이미 그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일곱 명과 이제 곧 그의 제자로 부름을 받게 될 다섯 명이 함께 동행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때 큰 무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많은 무리가 예수님에게로 나아왔습니다.
막3:7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막3: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막1:39에 의하면, 예수님은 온 갈릴리에 다니시면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따른 큰 무리 가운데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직접 듣고,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을 직접 본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 각처에서 많은 무리가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먼저 남쪽의 유대와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이들 두 곳은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이두매는 구약시대의 에돔과 같은 곳입니다. 히브리어 에돔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 이두매입니다. 이두매는 유대보다 더 남쪽입니다. 이 곳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섞여서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요단 강 건너편은 요단 강의 동편을 일컫습니다. 이 곳은 일명 베레아(Perea)라고 불립니다. 성경에는 그 이름이 등장하지 않지만,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에는 자주 등장합니다. 이 곳에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된 곳은 두로와 시돈입니다. 이들 두 곳은 페니키아, 곧 성경에서 말하는 베니게입니다. 베니게는 행11:19과 행15:3, 그리고 행21:2에 등장합니다. 이 지역은 오늘날의 레바논에 해당합니다. 여기에는 이방인들만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갈릴리에서 시돈까지 모두 일곱 개의 지명이 나옵니다. 이는 완전수입니다. 그러니까 비록 본문에는 갈릴리와 유대 사이의 사마리아가 빠졌고, 또한 베레아 북쪽의 데가볼리가 빠졌더라도, 완전수 안에 이 곳들도 다 포함이 됩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각처에서, 또한 이스라엘의 근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사역을 목격한 이들도 있었지만, 소문을 듣고서 찾아온 이들도 있었습니다.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지만,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본문 7절에는 “큰 무리”라고 했고, 본문 8절에서는 “많은 무리”라고 했습니다. 막6:44을 보면,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여자와 어린이들을 합치면, 이만 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때도 수만 명이 예수님에게 몰려왔을 것입니다.
그들은 집과 가족과 생업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먼길을 걸어서 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처에서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왔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8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예수님이 하신 큰 일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각종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들도 내쫓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적에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예수님의 능력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명성은 저절로 급속하게 퍼져나갔습니다.
당시에는 의료기술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각종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큰 일을 소문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그들은 병 낫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에게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3:9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크고도 많은 무리가 예수님에게 몰려왔습니다. 오늘 본문 10절 말씀처럼, 그들은 병 낫기를 바라면서 저마다 예수님을 만지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을 서로 먼저 만지려고 에워싸 밀다보면, 자기들끼리 짓밟히거나 다치게 될 소지가 많습니다.
이와 같은 불상사를 막기 위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시몬을 비롯해서, 여러 명의 제자들은 본시 어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명하시는 대로, 그들은 즉시 예수님을 위하여 작은 배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리가 있었고,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서로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도 달랐습니다. 자연히 결과도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리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육신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 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헌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겸손히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무리는 예수님을 에워싸 밀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명하시는 대로, 작은 배를 대기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리는 나중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질렀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나중에 예수님을 위하여 죽기까지 충성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늘 나라 영광의 보좌에 앉게 되었습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예수님께 왔더라도, 무리에 속하면 안 됩니다. 제자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시다. 예수님을 위하여 헌신합시다. 그리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영광의 보좌에 앉히실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능력입니다(10~11절).
오늘 본문 10절은 “이는”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예수님의 명성이 순식간에 퍼져나가서, 각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왔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10절은 병을 고치신 예수님의 능력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11절은 귀신들을 내쫓으신 예수님의 능력을 말씀합니다.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막3: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막1:29 이하에서, 예수님은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치셨습니다. 막1:34을 보면, 예수님은 그 날 저녁 시몬의 집 앞에 모여든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또한 막1:40 이하에서,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막2:1 이하에서,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아울러 막3:1 이하에서는, 예수님이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이미 많은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님에게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지고자 했습니다. 막1:41을 보면,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실 때 그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반대로 막5:27을 보면,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댐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또한 막6:56에서도,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만져주시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만지든지 효과는 같았습니다. 똑같이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와서, 예수님을 에워싸 밀려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요1:3 말씀과 같이,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습니다. 지은 것이 하나도 예수님이 없이는 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와 같은 창조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위해서 순간적으로 새로운 피부를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위해서는 곧바로 새로운 혈관, 새로운 힘줄, 새로운 뼈를 창조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뭇 사람들 앞에서, 분명하게 창조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롬1:4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고백합시다. 그러면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나의 심령도, 나의 몸도, 또한 나의 삶도 날마다 새롭게 창조하실 것입니다.
막3: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여기에는 귀신들을 내쫓으신 예수님의 능력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막1:21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한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리고 막1:39을 보면, 예수님은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천사장 루시퍼가 타락해서 마귀, 곧 사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추종하던 천사들이 타락해서 귀신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마귀는 귀신들의 우두머리이고, 귀신들은 마귀의 졸개에 해당합니다.
오늘 본문은 “더러운 귀신들”이라고 말씀했고, 마12:45은 “악한 귀신”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따로 있고, 악한 귀신이 따로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귀신들이 본질적으로 더럽고 악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귀신들은 예수님 앞에서는 항상 엎드렸습니다. 귀신들이 사람 앞에서는 엎드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귀신들은 사람 안에 들어가서, 그 사람을 다스립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예수님 앞에서는 엎드립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귀신들이 사람을 무서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예수님 앞에서는 언제나 부르짖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면서 소리를 질렀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들을 영원한 불못으로 던지실 심판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더러운 귀신들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귀신들은 본시 하늘 나라에서 예수님을 섬기던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막3:17을 보면,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더하셨습니다. 이는 야고보와 요한이 바로 우레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모두 네 권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입니다. 네 권의 복음서는 모두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마지막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에 잘 요약되고 있습니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네 권의 복음서가 기록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밝히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도 시작하는 말씀부터 이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요20:28에 있는 도마의 고백처럼,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믿으면 삽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각자의 몫입니다.
찬송가 544장의 가사를 기억합시다.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입니다. 그러나 “믿으면 되겠네”입니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밖에 없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리가 병 고침을 받으며 귀신이 나갔다고 해서,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야,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심을 반드시 믿고 고백해야만 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경고입니다(12절).
막3: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귀신들은 예수님을 볼 때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사실을 부인하지는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셨습니다.
막1:34을 보면,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막5:7을 보면, 귀신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면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귀신들에게 경고하셨을 때, 그 자리에 모든 귀신들이 다함께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귀신들이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까? 우선 요8:44을 보면, 사탄이나 귀신들은 본질상 거짓말쟁이들로 낙인이 찍힌 자들입니다. 그러한 귀신들이 예수님을 나타낸들, 누가 그들의 말을 믿으려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막3:22을 보면,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귀신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을 나타내면, 그들은 더욱 거세게 예수님과 귀신들을 한 패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빌립보에 이르렀습니다. 그 곳에 귀신 들린 여종 하나가 있었습니다. 행16:17을 보면, 그는 바울과 그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귀신은 바른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귀신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여종에게서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귀신의 증언은 거룩한 사역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혼란을 줄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똑같은 맥락입니다.
또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귀신들이 노리는 바가 있었습니다. 귀신들은 사람들을 선동해서 예수님을 정치적인 왕으로 세워보려고 꾀했습니다. 말하자면 귀신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지 못하도록, 기를 쓰면서 막아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막1:25 말씀처럼, 예수님은 귀신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막1:34 말씀처럼, 예수님은 그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아울러 오늘 본문 말씀처럼, 예수님은 귀신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은 사람들의 각종 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육의 세계를 다스리시는 권세가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을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영의 세계를 다스리시는 권세도 있으십니다.
또한 마가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자연 세계를 다스리시는 권세도 있으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육의 세계, 영의 세계, 자연 세계를 모두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이 분명합니다. 오직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와 자연 세계를 모두 다스리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사실 이외에는 이를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결론은 똑같습니다. 결론은 매번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믿으면 삽니다. 믿지 않으면 멸망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믿어야만 합니다.
믿고 생명을 얻었으면,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합니다. 잠잠하지 말고 입을 열어,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래야 구원을 받습니다”라고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사람,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가정,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교회가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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