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시 23:4(2016년 2월 7일 주일)
설교자: 마경훈 목사(비전교회)
마틴 루터가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사탄이 자기 졸개들을 데리고 회의를 하는데, 어떻게 하면 기독교를 박멸할 수 있나 하는 회의였습니다. 첫 번째 귀신이 말했습니다. “기독교인이 광야를 걸어가는데 사자를 보냈습니다. 사자가 입을 벌려 한 입에 삼키려고 하는데 사자 앞에서 기도를 합디다. 그래서 실패했습니다.” 두 번째 귀신이 말했습니다. “기독교인이 항해를 하는데 풍랑을 일으켜서 파선 시켰더니 헤엄쳐 암초에 올라앉아 기도하고 찬송하더이다. 그래서 실패했습니다.” 세 번째 귀신이 말했습니다. “내가 좋은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한 교회를 택해서 10년 동안을 아무 일도 없이 편안하게 복을 주고 성도들이 복을 받게 했더니 이제는 교회가 영육간에 썩어져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고난이 복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은 편안하고 하는 일이 잘 되면 좋을 것 같으나 영적으로 무너지기 쉽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만나면 괴롭고 힘들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기 때문에 영적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고난은 누구든지 피해가고 싶어 합니다. 오늘 설교는 고난에 대한 주제입니다.
시 23편은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시 중에 가장 사랑 받는 시입니다. 여러분은 시 23편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저는 목자이신 하나님이 떠오릅니다. 여러분은 시 23편에서 어떤 말씀이 좋습니까? 저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도 좋고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도 좋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도 좋습니다.
시 23편의 표제에는 단지 저자가 다윗이라는 사실만 밝히고 있기 때문에 언제 어떤 배경에서 지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시 23편은 다윗의 생애 후반기의 어느 평화로운 시기에 다윗이 과거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며 지은시라고 보는 견해가 강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윗처럼 인생의 후반기에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자신을 구원해주시고 자신을 인도해주시고 늘 함께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복된 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시 23편 중에서 4절 상반절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자신의 인생에는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와 같은 평화롭고 안정적인 시기도 있었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과 같은 고난의 시간도 있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은 생애를 돌아보면 생명이 위험한 순간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자기의 장인이며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계속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다윗의 침실로 자객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사울이 계속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니 다윗이 두려워서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을 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기스와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았습니다. 다윗은 아기스로부터 살기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미친 체 했습니다. 대문을 그적거리며 입에서 침을 질질 흘렸습니다. 아기스가 이 모습을 보고 정신병자를 데리고 왔다고 야단을 치며 다윗을 쫓아냈습니다. 이렇게 다윗의 인생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그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에도 주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확신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십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고 도와주십니다. 아멘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아버지요 예수님이 구세주요 성령님이 함께 하시니 고난이 없습니까? 인생길에 대로만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도 고난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믿고 신앙생활을 잘해도 고난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크게 두 가지를 다룹니다. 먼저 고난의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나누겠습니다.
1. 고난의 원인
양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이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를 지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목자의 인도를 받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이 골짜기를 지나면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들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통과시키는 것입니다. 양은 골짜기 너머에 있는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가 보이지 않습니다. 양에게는 지금 자기가 통과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만 보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답답합니다. 하지만 목자는 골짜기 너머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이 그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이 힘들지만 그곳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면 거기가 자신의 인생에 종점이나 되는 것처럼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은 길고 지금의 고난은 과정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양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가는 또 다른 이유는 목자의 인도를 받지 않고 제 마음대로 갔기 때문인 경우도 있습니다. 양은 시력이 좋지 않아서 목자를 떠나는 순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목자를 떠난 양이 목자 없이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에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왜냐하면 이리의 공격으로부터 양을 보호해줄 목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고난이 찾아오는 이유는 많습니다. 다양한 이유를 몇 가지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1) 죄 때문입니다.
창 3:17-19을 보겠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셔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수고해야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얼굴에서 땀을 흘려야만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복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기 때문에 고난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2) 마귀의 역사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는 대적이 생깁니다. 원수 마귀입니다. 마귀는 성경에서 도적놈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마귀는 우리들이 가진 영생과 평안과 건강과 물질과 관계를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역사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의 일군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영적 군사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고 마귀는 하나님의 나라를 헐려고 하기 때문에 충돌이 있는 것이고 그로 인한 고난도 있는 것입니다. 벧전 5:8을 보겠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마귀가 마치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롬 8:17을 보겠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입니다. 우리는 천국과 천국의 영광을 상속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상속자로서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과정이 우리에게는 고난입니다.
고대의 왕자들은 왕이 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왕이 되는 훈련은 혹독한 훈련이었습니다. 왕이 된다는 말은 왕의 자리에 앉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로마의 5대 황제 네로는 당시의 최고의 지성 세네카에게 제왕학 과외를 받았습니다. 네로는 세네카가 너무나 훌륭하니까 “당신은 너무나 고상해서 자살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고 합니다. 로마에서 황제를 만들기 위한 제왕학 수업 중에는 글쓰기 칼쓰기 등은 물론이고 신하들을 상대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의 수업도 받는다고 합니다. 그 수업 중에는 이런 시간도 있다고 합니다. 어떤 주제로 토론을 하는데 선생님들이 학생을 비꼬는 듯한 질문을 던지며 자꾸 기분을 상하게 합니다. 그랬을 때 제왕학 수업을 하는 왕자는 전혀 얼굴 표정도 하나 바꾸지 않으며 대답하고 그 상황을 이끌 수 있는 훈련을 한다고 합니다. 제왕학 수업은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힘든 훈련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천국의 상속자들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토록 왕 노릇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영광을 받기 위하여 이 땅에서 고난도 받는 것입니다.
4)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완성된 교회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주님의 희생으로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론에서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교회의 터가 되시고 기둥이 되시지만 나머지 부분은 우리들이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골 1:24에서 바울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고난을 채웠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워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된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서로 사랑하고 무슨 일을 해도 기름칠이 잘 된 기계가 조용히 돌아가듯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천상의 교회는 승리교회이지만 지상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입니다. 전쟁을 하는데 평안을 바라는 것은 욕심입니다. 전쟁 중이기 때문에 교회는 시험도 있고 문제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시험과 문제 속에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워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5) 잘못 심었기 때문입니다.
개미와 배짱이 이야기를 아시죠? 여름에 땀을 흘리고 수고했던 개미는 겨울이 풍성했습니다. 열심히 일한 결과였지요. 그러나 여름에 놀고먹던 배짱이는 어땠습니까? 배짱이는 춥고 배고픈 겨울을 보내야 했습니다. 심은대로 거둔 것입니다.
인생은 심고 거둠의 연속입니다. 갈 6:7을 보겠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심지 않았는데 거두려고 하는 것과 좋지 않은 것을 심어놓고 좋은 것을 거두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날마다 게으름이나 부리며 살면서 부자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과 남에게 심지 않으면서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사람입니다. 남을 대접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마 7:12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심어야 거둡니다. 좋은 것을 심어야 좋은 것을 거둡니다. 심지 않았거나 좋지 않은 것을 심었다면 고난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6) 연단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고 복되게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용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자들의 삶에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욥 23:10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서 불순물을 제거하시고 우리를 존귀하게 만드시기 위하여 연단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는 고난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40년간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돌리고 또 돌리셨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낮아지고 또 낮아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연단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 8:16을 보겠습니다.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하여 40년 간 낮추시고 시험하셨던 것입니다. 연단은 고난입니다.
7) 자아파쇄 때문입니다.
사람은 겉사람과 속사람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롬 7:22을 보겠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속사람이 있습니다. 엡 3:16입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여기서도 속사람을 말씀합니다. 고후 4:16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겉사람과 속사람을 말합니다.
우리의 영이 속사람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감지할 수 있는 존재가 겉사람입니다. 우리 속사람은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겉사람을 입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분 자신과 그분의 생명을 두신 곳은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속사람이 흘러나오는 사람입니다. 겉사람이 뚫릴 때 속사람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속사람이 출구를 얻도록 겉사람을 파쇄하시는 것입니다. 겉사람의 파쇄는 고난입니다.
요 12:24을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주님이 한 알의 밀알 되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땅 속의 온도와 수분 등의 작용으로 껍질이 갈라지고 그 안에서 생명이 나오고 그 생명이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많은 열매를 맺으신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한 알의 밀알 되신 주님처럼 겉사람을 파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속사람이 흘러나오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 속에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껍질이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껍질을 깨고 속사람이 흘러나오게 하시려고 역사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더 단단하게 보호하고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 주님은 깨고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더 단단하게 보호하는 긴장관계가 계속됩니다.
워치만니는 [자아 파쇄와 영의 해방]이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을 두 가지 다른 상태로 분류했습니다. 하나는 생명이 제한받고 감금되고 포위되어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그의 몸에서 길을 뚫어서 그에게서 생명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유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문제는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생명이 어떻게 나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주님의 사역 중에 한 번은 여인이 옥합을 깨서 주님에게 향유를 부은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순전한 나드 향유와 같은 속사람이 있습니다. 속사람이 흘러나오려면 옥합과 같은 겉사람이 깨어져야 합니다. 이 깨어짐이 고난입니다.
보배는 질그릇 안에 있습니다. 누가 질그릇을 원하겠습니까? 교회 안에 필요한 것은 질그릇이 아니라 보배입니다. 주님은 질그릇과 같은 겉사람을 깨는 작업을 하십니다. 그래서 보배와 같은 우리의 속사람이 나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우리에게는 고난인 것입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고난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애매히 당하는 고난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 중에는 우리의 지성으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도 많습니다.
2. 그리스도인이 고난 중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고난 중에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기도해야죠. 감사해야죠. 회개해야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죠. 성경에서는 그 외에도 우리가 고난 중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다양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다양한 일들을 오늘 이 시간에 다 말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본문에서 고난 중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시는 것을 나누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고난을 만날 때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요 5:17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요 6:29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아들도 일하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믿는 것입니다. 믿으면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서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칼빈이 말한 기독교의 진리 중에 특이한 진리가 있습니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시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숨어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은 숨어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이 심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야곱의 인생에는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하셨습니다. 창 28장에 보면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을 가다가 벧엘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자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창 28:15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그 이후 늘 야곱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험악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나이 130세가 되었을 때에 바로 왕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험악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지만 야곱은 고난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지만 야곱은 험악한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쉽게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그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 해서 고난 중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함께 하셔도 고난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대부분의 경우 숨어계십니다.
야곱의 인생에서 하나님은 대부분 숨어계셨고 가끔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가 무서워서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갈 때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나타나셔서 위로하셨습니다. 야곱이 외삼촌의 집에서 죽도록 고생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그동안의 수고를 보상해주시기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가는 중에 형이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자기를 죽이기 위하여 온다는 말을 듣고 얍복강에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또 나타나셔서 야곱을 도와주셔서 에서가 야곱을 반기게 하셨습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으나 벧엘로 올라가겠다는 하나님과 약속을 지키지 않고 세겜에 있다가 딸 디나가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위로와 용기를 주셨습니다. 요셉이 야곱을 애굽으로 초청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숨어계신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나타나셔서 도와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느끼지 못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고 우리를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그때 하나님은 숨어계실 뿐이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먹구름이 끼어서 태양이 보이지 않을 때 태양이 없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은 숨어계실 뿐이지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변장된 축복이라면]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시의 3절이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노래합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고난이 변장된 축복이라면/ 사랑의 눈을 열어/ 고난 뒤에 서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기 원하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보기원하네”
우리가 눈이 열리지 않아서 고난 뒤에 서계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주님은 축복 중에도 함께 하시고 고난 중에도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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