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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60214]항상 기뻐할 수 있는 비결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비결 살전 5:16-18

(2016214일 설교자: 마경훈 목사 비전교회)

 

경영의 전문가인 베이스 씨가 세계에서 성공한 CEO 1,500명을 조사한 결과 그들의 공통분모는 두 가지였습니다. 그 중 하나는 더 훌륭한 경영자가 되기 위해, 경영을 더 잘 하기 위해 시간을 아끼며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자기 일을 기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일을 즐겁고 기쁘게 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뻐해야 합니다. 가끔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세 가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항상 기뻐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성경에 기쁨, 즐거움 그리고 희락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세 단어는 원어는 다르지만 특별히 구분시켜서 사용하지 않아도 무방할 정도로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우리 말 표현이고 희락은 한문식 표현으로서 같은 의미로 풀이해도 무방합니다.

주님은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세례요한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자기 어머니 엘리사벳을 찾아왔습니다. 그때 세례요한은 마리아 뱃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뻐하며 뛰어놀았습니다. 1:44을 보겠습니다.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참 신기하죠. 주님은 어머니 태중에 있던 세례요한에게도 기쁨을 주셨던 분이십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함께 사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진짜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의 특징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강력한 특징이 바로 기쁨이 충만한 생활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함께 살면 기쁨이 충만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이유는 주님을 만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어둡고 우울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죄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함께 살면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에덴동산에서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므로 사망선고를 받았습니다. 땅이 저주를 받았고 남자는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으며 여자는 임신하는 고통이 크게 더해지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쁨입니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여러분 에덴의 뜻이 무엇입니까? 기쁨입니다. 에덴동산은 기쁨의 동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죄의 삯은 사망인데 죄의 삯 중에는 기쁨의 상실도 포함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죄 때문에 기쁨을 잃었는데 우리 주님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함께 살면 죄사함 받고 그 결과 기쁨도 회복된다는 말입니다.

3:19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하나님을 떠났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바로 죄사함의 복입니다. 그런데 죄사함을 받은 사람에게는 새롭게 되는 날이 임하게 됩니다. 여기서 새롭게 되는 날은 개역성경에서 유쾌하게 되는 날로 번역했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죄사함을 받게 되고 죄사함을 받으면 마음이 유쾌하게, 상쾌하게 됩니다. 주님을 만나면 마음이 즐거워지는 것입니다. 기쁨이 회복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의 강도는 세상이 주는 어떤 기쁨보다 더 강력합니다. 4:7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농부가 한 해 농사를 잘 해서 추수를 해보니 곡식이 풍성합니다. 추수를 마치고 너무 기분이 좋아서 잔치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이 때 농부의 마음이 얼마나 흡족하고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주님이 자신의 마음에 기쁨을 두셨는데 그 기쁨은 풍년으로 인하여 곡식을 풍성하게 거둬들인 농부의 마음보다 더 큰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좀 더 피부에 와 닿게 표현하면 해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한 아들이 대학에 붙었을 때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쁘죠.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그것보다 더 크다는 말입니다.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이 수많은 회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취업에 실패를 했습니다. 몇 년을 백수로 지내며 이력서만 수 십장 넣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대기업으로부터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 때 그 청년의 마음이 얼마나 기쁠까요? 말로 표현할 수 없지요.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그 기쁨보다 더 크다는 말입니다. 고시생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이 사람이 해 마다 낙방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너무 많이 떨어지니 이제 가정에서도 골치 덩어리가 되었고 자신도 거의 포기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고시에 합격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말로 표현이 어렵죠.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그것보다 더 크다는 말입니다. 어느 부부가 결혼 후에 아기가 안 생깁니다. 10년을 기다려도 아기가 생기지 않으니 부부는 시험관 아기도 시도 해보고 좋다는 약도 다 써봤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어느덧 결혼 한지 20년 차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기 갖는 것을 포기하고 입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입덧을 하기 시작합니다. 아기가 생긴 것 같습니다. 병원에 가서 확인을 해보니 아기가 확실합니다. 이때 그 부부의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지요.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이 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운동선수가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최고의 선수지만 국제대회에 나가면 예선 탈락입니다. 군대문제가 있으니 반드시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해야 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됩니다. 이제 나이도 찼기 때문에 군대 입대 날짜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경기에서 의외의 선전을 해서 우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군대에 가지 않고 계속해서 운동선수 생활을 해도 됩니다. 이 때 이 선수의 기쁨이 얼마나 클까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요.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이보다 더 큰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제 선거철입니다. 정계에 입문하고 싶은 욕망이 큰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선거 때마다 출마를 했지만 번번이 낙선의 쓴맛을 봤습니다. 그동안 쓴 선거 자금이 많아서 이번에 출마하고 이후에는 출마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도 의외의 선전을 해서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상대와 박빙이었지만 몇 표 뒤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판에 몰표가 나와서 국회의원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정말 말로 다 표현 못하지요.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이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비슷한 내용의 예를 여러 번 반복했을까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어떤 기쁨보다 크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에녹은 65세에 주님을 만난 후 300년간 주님과 동행했는데, 저는 18살에 주님을 만난 후 35년간 주님과 동행했습니다. 보통 저는 주님과 손을 잡고 함께 걸어왔습니다. 제가 좀 침체 되었을 때는 주님과 조금 떨어져서 걷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주님 가까이에서 주님과 함께 걸어왔습니다.

저는 목사이지만 보통사람입니다. 저도 육신을 입고 있고, 마음에 욕망도 있습니다. 저도 죄를 범하기도 하고 실수하여 넘어지기도 합니다. 제가 저를 돌아보니 제가 주님의 손을 잡고 주님과 함께 걸을 때는 제가 처한 환경이나 주변 사람들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기쁘게 생활을 했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육신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때는 교회 성가대 자리에서 3년간 잠을 자던 시절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주님과 아주 친밀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그 3년 동안 늘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했었습니다. 돌아보니 제가 주님과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지 또는 얼마나 먼지에 따라서 기쁨의 크기도 커지기도 했고 작아지기도 했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쁨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원치 않게 기쁨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난이 너무 지나치면 기쁨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또 갱년기 대 호르몬의 변화로 인하여 기쁨을 잃어버릴 대도 있습니다. 하지만 속히 회복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기쁨을 잃었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과 거리가 멀어졌다는 말입니다. 물론 주님과 가까이 지내지만 기쁨을 잃을 때도 있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이 있을 때는 주님과 함께 있어도 기쁨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보편적인 것은 아닙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린 생활을 하는 것은 저주입니다. 28:47,48을 보겠습니다.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48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을 것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 중의 일부입니다.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는 핍절한 상황을 말씀합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적을 섬기게 되고 대적이 철 멍에를 만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대적은 마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대적이 멍에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메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귀의 포로가 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렇게 되는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47절만 읽어봅시다.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신앙생활 하는데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기 때문에 그런 저주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듣는 모든 분들에게는 항상 기뻐하는 능력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마음을 아프게 하는 가시와 독을 제거하라.

이상근 주석으로 유명하신 한국 교회의 보배이셨던 이상근 목사님이 16살 때였습니다. 발에 병이 나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3년 동안 출입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다닌 나이인데 움직일 수 없으니까 학교도 포기하여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한약을 붙인 것이 덧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 하니까 대학 진학도 못 하게 되었습니다. 집안에만 틀어 박혀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는 꼼짝 못 하고 앉아서 성경을 거의 다 외웠습니다. 성경박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에서는 드문 주석책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성경 대학자가 되는 계기를 하나님이 마련하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후 60년 동안 발 때문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1993년 그가 은퇴하면서 외과 의사의 권유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받으면서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발뒤꿈치에서 1cm 가량 되는 머리카락 굵기의 철사가 나온 것입니다. 어렸을 때 맨발로 다니다가 철사에 찔린 것이 속에 들어가서 그의 평생 가시가 된 것입니다. 그 것을 거의 60년 만에 발견한 것입니다. 이 철사 때문에 책만 보다가 대학자가 되었지만 그 가시 때문에 60년 간 너무 고통을 당했던 것입니다.

사람 마음에는 가시와 독이 있습니다. 가시와 독을 10년을 품고 다니면 10년을 마음에 기쁨을 잃고 고통스럽게 사는 것이고, 60년을 품고 다니면 60년을 마음에 기쁨을 잃고 고통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마음의 가시와 독은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가시와 독은 경쟁심, 열등의식, 비교의식, 욕심, 낮은 자존감 분노와 염려, 미움 등등입니다. 이런 가시와 독이 제거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마치 가시에 찔리고 있는 발처럼 아프고 괴로워서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기 마음에 있는 가시와 독을 제거하려면 먼저 자기 속에 무슨 가시와 독이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보지 않으면 어떤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것이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제거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 비추심을 받아야 자기 안에 있는 가시와 독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찾고 찾으면 그분의 빛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고 주님의 빛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 안에 있는 가시와 독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8:12입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사방이 캄캄한데 가로등이 하나 환하게 켜져 있습니다. 내가 빛 아래 있으려면 가로등 아래로 가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을 찾을 때 우리는 주님의 빛 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할 때 우리는 빛 아래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리면 자기 안에 빛이 임하여 자기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르며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의 빛 아래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영적인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24:4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발람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고백했습니다. 발람의 자기고백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둘째는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입니다. 셋째는 엎드려서 눈을 뜬 자입니다. 엎드린다는 말은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눈을 뜬다는 말은 빛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에 하나님의 빛이 임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의 빛 안에 거하며 자기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주님의 빛 아래 나아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빛이기 때문입니다. 119:105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우리가 예배나 기도를 드리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가 주님의 빛이 임하여 내 안에 있는 가시와 독이 보이면 어떻게 제거해야 할까요? 먼저 가시와 독과 관련된 죄가 있다면 회개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피로 씻어주시고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셔서 치유해 달라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독과 가시는 내 힘으로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2. 상처를 치유 받으라.

사람의 마음은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상처가 생기면 아픕니다. 괴롭습니다. 마음에서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상처는 할 수만 있으면 빨리 치료 받아야 합니다. 상처가 오래가면 세균이 번식하고 상처가 깊어지고 합병증까지 발병하게 되는 것처럼 마음의 상처도 오래되면 마음에 쓴뿌리가 생겨서 마음이 괴롭게 되고 믿음도 약해집니다. 12:15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마음의 쓴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되고 심지어 더러움에 빠지게 됩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합시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으며 나도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 상대를 이해해야 합니다. 상대도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는 원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상처를 준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은 타인에게 상처를 잘 줍니다. 상처가 많을수록 자기 방어 기재를 사용하다보니 상대를 힘들게 합니다. 손이 아픈 사람의 손을 반갑게 잡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방어를 위해서 손을 뿌리칠 것입니다.

셋째,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에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용서하면 용서하는 순간 내가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도 하나님께 용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6:12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내가 상대를 용서하는 순간 내 마음의 상처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3. 성령충만하라.

14:17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여기 희락이 기쁨입니다.

11:2-3입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이 말씀은 초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실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2절에서는 성령님의 특징 6가지를 말씀했고, 3절에서는 성령님이 임하시면 어떻게 되는가를 말씀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충만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기쁨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충만은 기도생활과 깊은 연관이 있고, 기도생활은 기쁨의 생활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하면 기쁨이 충만하듯이 기도생활을 하면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다. 16:24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기도생활은 우리에게 충만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세례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찾아갔을 때 태중에 있던 세례요한이 기쁨으로 뛰어 놀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복중에 있으면서 무엇을 알아서 그렇게 기쁘게 뛰어 놀았을까요? 그 이유는 세례요한이 성령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1:15입니다.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세례요한은 모태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해서 주님을 섬기는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충만의 다른 표현이 신전의식입니다. 흔히 코람데오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16:11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그 분 안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살면 행복한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면 기쁨이 넘칩니다.

클레이 폴이라는 철학 교수가 친구 집에 가서 두 팔과 두 다리가 없는 친구의 여동생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두 팔과 두 다리가 없어서 몸뚱이만 갖고 사는 그 여동생이 너무나 쾌활하고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클레이 폴 교수가 그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만일 내가 네 처지라면 나는 못 견딜 것 같다. 그런데 너는 그 몸으로 어찌 그리 기쁘게 사니?” “아저씨, 내게 팔 다리는 없어도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입이 있고 좋은 명작을 읽을 수 있는 눈이 있고 가족의 사랑이 있고 친구의 사랑이 있습니다. 더더구나 내게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계신데 내가 기뻐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령충만의 결과입니다.

4. 하늘을 바라보라

우리는 땅을 밟고 살아갑니다. 아무리 신령한 사람도 땅과 상관없이 살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땅을 밟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기보다 땅을 바라봅니다. 땅을 바라보니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땅을 바라보니 상대적인 기쁨만 느끼는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절대적인 기쁨이 부어집니다.

5:11,12을 보겠습니다. “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주님을 믿는 다는 이유로 우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말도 하는데 우리가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왜요? 하늘의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향해서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말도 하는데도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은 기뻐할 수 있습니다.

10:20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복음 전도자에게 귀신들이 항복하는 일은 너무나 신나고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아마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들도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인하여 즐거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땅에 가치를 두지 말고 하늘에 가치를 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본향이 있습니다. 천국이 우리가 돌아갈 본향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3:20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우리의 시민권도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늘을 바라보고 사시므로 기쁨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국민일보에 실린 내용입니다. 미국의 제6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아주 초라한 집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한 친구가 오랫 만에 그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집의 벽은 허물어지고 지붕은 누더기처럼 낡은 것을 보고 친구는 깜짝 놀랐습니다. 바람이 불면 사방에서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친구가 애덤스에게 말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까지 지내신 분이 어떻게 이런 초라한 집에서 지낼 수 있습니까. 이 집은 매우 위험해요애덤스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바람에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가끔은 관현악단의 연주로 들릴 때도 있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집이 위험해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 생각입니다친구가 반가운 얼굴로 다시 물었습니다. “어디로 이사를 가십니까그러자 애덤스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습니다.“저 곳으로하늘나라는 영원한 본향입니다. 하늘의 소망을 품은 사람은 세상의 고통을 하찮게 여깁니다. 하늘의 소망을 두고 늘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글쓴이 : 마경훈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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