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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갈2:20(1): 갈2:20, 빌1:20-21 그리스도가 중심입니다 2010.8.29(일)

2:20(1): 2:20, 1:20-21 2010.8.29()

그리스도가 중심입니다

긴 여름을 지나고 가을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을은 영적인 계절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말이 살찌는 계절, 이번 가을에도 우리에게 하늘이 열리고 영혼이 살찌시기 바랍니다. 만일 이 시간 어떤 분이 여러분에게 성경에서 당신이 목숨처럼 붙잡고 있는 말씀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사람마다 붙잡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삶의 여러 가지 환경을 통하여 힘이 되고 능력이 된 말씀입니다. 오랫동안 질병으로 고생하던 미국의 한 청년이 병상에서 요한32절을 붙잡았습니다. 요한3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을 붙잡은 청년은 그 후 기적처럼 일어났고 훗날 세계적인 대학과 병원을 세웠습니다. 그가 오랄 로버츠목사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한 젊은이가 폐병에 걸려 사경에 헤매고 있었습니다. 선교사의 전도를 받은 이 청년은 어느날 같은 요한32절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그 는 일어났고 훗날 세계적인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가 조용기 목사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킨 것은 많은 말이 아닙니다. 많은 사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 하나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미국 워싱톤에 가면 링컨 기념관이 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조용히 앉아 미국의 수도 워싱톤을 바라 보고 있습니다. 그 동상앞에 가면 성경 한 권이 펼쳐 있고 그 성경에는 빨간색으로 밑줄친 한 구절이 눈에 띱니다. 34:4, “내가 여호아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바로 링컨 대통령이 붙잡았던 말씀입니다. 나라가 노예문제로 남북으로 갈리고 개인적으로는 많은 시련과 고난이 계속되던 시대, 링컨은 이 말씀을 붙잡았고 드디어 나라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말씀을 붙잡고 있습니까? 23, “여호아는 나의 목자시니입니까? 1:9, “너는 두려워 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입니까? 18: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아여입니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입니까? 4:13,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입니까? 저는 오랫동안 렘33:3절을 붙잡았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것을 네게 보이리라”. 신학교 시절부터 이 말씀은 저에게 힘이 되었고 하나님은 저에게 크고 비밀한 일을 많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부터 갈2:20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저는 평소에 이 말씀을 잘 안다고 생각했고 암송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말씀은 저에게 크게 다가왔습니다. 무엇보다 이 말씀은 이중표 목사님이 남긴 감동과 은혜로 제 마음에 깊히 남았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평생 이 말씀에 사로 잡혀 살았습니다. 목사님의 모든 설교와 삶의 중심에는 이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목사님이 돌아갔을 때 이 말씀은 감추어진 보화로 우리에게 남았습니다.

 

미국 뉴욕경찰서에 가면 이런 표어가 붙어 있다고 합니다. “One is for all and all is for one”. 뜻은 이렇습니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이 말은 경찰관 한 사람이 잘하면 모든 사람을 살리고 모든 사람은 결국 한 사람을 위해 있다는 말입니다. 경찰관의 사명을 강조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경찰관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영적 원리에도 해당되고 성경에도 해당됩니다. 성경 한 구절이 곧 성경 전체입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가 성경 한 구절입니다. 모든 성경은 갈2:20로 요약되고 갈2:20은 곧 모든 성경입니다. 이번에도 어떤 사람 하나가 범죄하고 도망갔습니다. 결국 잡혔는 데 이유가 단순합니다. 그가 방에 남긴 자국과 그의 운동화에 남아 있는 땀의 DNA가 일치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땀 한 방울이 그 사람 전체일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여러분은 갈2:20 한 귀절속에 나타난 하나님 위대한 구원의 메시지를 듣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다시 이 말씀을 보십시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보기에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말씀은 결국 누구를 증거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크게 보면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 부분은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뒷부분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하는 일입니다. 앞부분에서 그리스도는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지금은 내 안에 계십니다. 뒷 부분에서 그러므로 이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삽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하신 일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할 일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인의 일생 과제가 두 가지인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것입니다. 두 가지 지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를 아는 지식입니다. 칼빈이 쓴 기독교강요를 두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고”, 그것이 성경의 요약입니다.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윌리 로먼 부인이 자기 남편의 묘비를 이렇게 썼습니다. “그는 일생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다”. 여러분, 사람이 죽는 것도 억울한 데 죽을 때 자기가 누군지 평생 몰랐다고 묘비에 쓴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가 누군지 잘 모르고 삽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영국의 죤 웨슬리가 쓴 <웨슬리의 일기>에 보면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성령을 체험하기 전에 경험한 한 사건을 기록합니다. 웨슬리는 아메리카 인디언을 복음화한다는 생각으로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그가 미국에 거의 도착했을 때, 때마침 독일인 목사 스팡겐베르크를 만납니다. 이 진지하고 경건한 이 독일목사는 웨슬리에게 아주 본질적인 질문을 합니다. 모두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형제는 성령님이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합니까?” 둘째, “형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셋째, “형제는 형제 자신을 압니까?” 옥스퍼드 대학에서 우수하게 신학공부를 한 웨슬리였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목회해온 웨슬리였습니다. 그런데도 웨슬리는 그날 아무런 답변도 못하고 매우 당황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성경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상당히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본질적인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당황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두 가지 본질적인 질문을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누구인가?” 둘째, “나는 누구인가?” 어떻습니까? 여러분, 대답할 수 있습니까? 2:20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성경적인 대답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2:20 앞 부분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지금은 내 안에 살아 계신 분입니다. 둘째, “내가 누구입니까?” 2:20 뒷 부분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신 그 분을 위해 평생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어떻습니까? 분명합니까?

 

그런데 이 두 질문의 한 가운데 가운데 계신 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누구냐라는 질문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냐라는 질문의 중심에도 서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중심에 계신 분, 어떤 분은 이것을 거울을 비유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비춰주는 거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냐 물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사람이 누구냐 물을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봅니다. 우리가 직접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사람도 사람 자체로 100% 그대로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사람이든 하나님이든 거울을 통해 바라 봐야 보입니다. 그 거울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을 보고, 이것이 성경입니다. 2:20은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신앙과 삶의 중심에 모시고 있습니까? 2:20은 이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2:20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갖는 소원은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우리 주변에 서성거리게 했던 그리스도를 이제 우리 삶과 신앙의 중심에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갈2:20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세 가지 중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의 중심. 둘째는 교회의 중심, 그리고 셋째는 우리 삶과 죽음의 중심입니다.

 

먼저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어떤 책이라고 생각합니까? 성경이 어떤 책이냐 물을 때 갈2:20이 해답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성경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가 중심에 있는 책입니다. 성경은 마치 바다와 같은 책입니다.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 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무 크기 때문에 가끔 종교의 집대성, 모든 사상의 총화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주요 고대 근동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들의 종교, 사상, 신화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있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신앙, , 언어, 생활 관습이 다 있습니다. 성경은 인류 문화가 시작되고 로마로 꽃필 때 까지 인류 역사의 한복판을 가로 지릅니다. 그 시대가 가졌던 규범, 율법, 문화, 종교, , 가치관을 다 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모든 종교의 잡동사니는 아닙니다. 모든 것을 품되 한 가지 목적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속에서 행하셨던 구원의 드라마입니다. 성경은 약 1600년동안 40여명의 각기 다른 사람이 썻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방향은 일치합니다. 예수님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구약은 율법이 중심이고 신약은 예수님이 중심이 아닙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을 말하고 신약은 예수님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예수님이 중심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말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입었던 통옷이다”. 또 말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누어 있는 구유이다”. 전체로 하나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몸이요 한 옷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말씀했습니다.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에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

 

제가 이번에 성경을 일독했습니다. 특히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의 중심은 철저하게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다시 알았습니다. 마태복음, 구약에서 예고한 메시아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예수님이 종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예수님은 유대인 뿐 아니라 모든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예수님은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네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께 집중하면서 구원과 관한 다른 차원을 보여 줍니다. 마태복음은 구원의 길이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구약시대부터 오랜 세월의 기다린 구원의 메시아입니다. 마가는 구원의 깊이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의 음부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누가복음은 구원의 넓이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병자든 강도든 누구나 구원합니다. 요한은 구원의 높이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높은 데 계신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신 분입니다. 바울이 쓴 모든 서신도 그리스도를 집중합니다. 로마서,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합니다. 고린도서, 예수님은 교회의 주님입니다. 갈라디아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에배소서, 빌립보, 골로새서, 바울이 감옥에서 쓴 책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신앙의 근거요 기쁨의 근원이요 역사의 주인입니다. 데살로니가,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디모데서, 예수님은 모든 교회 생활의 규범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계시록 마지막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것이 성경입니다.

 

언제나 성경에서 예수님은 보아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표어가 여기에도 해당됩니다. “One is for all and all is for one”. 예수님, 한 사람을 통해 성경 전체를 보고, 성경 전체에서 예수님 한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옛날 도가에 손가락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스승이 달을 가르키며 제자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제자는 스승의 손가락만 쳐다봅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썻습니다. “아름다운 밤에 한 스승이 손가락으로 밝은 달을 가리키며 그 자태를 찬탄했다. 제자는 달을 바라보지 않고 스승의 손가락만 바라 보았다. 스승은 다시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지만, 제자는 여전히 스승의 손가락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스승은 잠시 침묵하더니 칼을 빼내어 들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스승은 단숨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버렸다. 그때 제자는 달을 바라 보았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볼 것은 사람들의 손가락이 아닙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학자, 신학자, 성경학자, 신비가, 영성가, 역사가, 설교자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외의 것은 필요한 만큼 두고 잘라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성경의 중심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중심입니다.

성경의 중심인 예수님이 교회에도 중심입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의 원리는 교회생활에도 적용됩니다. 교회 생활의 가장 큰 은혜는 예수님이 교회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에서 벗어나면 교회는 세상보다 못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나옵니다. 처음에는 상당한 기대를 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실망이 생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본질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교회 생활이 중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필립 얀시가 말한대로 우리가 교회오면 세 가지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위입니다. 다음은 옆입니다. 마지막이 밖입니다. 무엇보다 위를 먼저 바라 보아야 합니다. 위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분을 바라보는 눈으로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그 분을 바라보는 눈으로 밖에 있는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옆을 보고 밖을 볼 때도 끊임없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예수님 놓치면 바라보이는 것이 풍랑입니다. 그래서 시험들고 바다에 빠지는 것입니다.

 

2천년 교회의 역사는 교회의 중심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역사였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교회의 중심에 예수님보다 베드로위에 놓을 수 있는 위험을 보여준 역사였습니다. 카톨릭 교회의 본부인 베드로 성당 밑에 가면 베드로의 무덤이 있습니다. 1939년에 교황 비오 12세는 베드로의 무덤을 파고 그 안에 있는 유골이 진짜 베드로의 유골이라고 까지 공표했습니다. 베드로가 교회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의 무덤이 예수님의 빈 무덤보다 더 중요시되면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은 중세 카토릭교회가 잃어버린 교회의 주인을 회복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교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목숨걸고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라고 강조해서 개신교회가 생겼지만 정말 우리 교회의 모든 조직과 교리, 모든 교회 생활이 예수님을 중심에 모셨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몇 년전 스위스 제네바를 방문하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도시에 칼빈이 목회하던 성 피에르 교회가 남아 있습니다. 교회와 제네바시를 여기 저기 구경하고 마지막에 칼빈의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안내자가 말합니다. “사실 칼빈의 무덤은 없습니다. 칼빈은 오랫동안 제네바에서의 성공적인 목회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죽을 때 염려가 생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잊어 버리고 나만 기억할지 모른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유언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절대 내 무덤을 만들지 말라“. 그래서 지금까지 누구도 칼빈의 무덤인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주인이요 중심입니다. 교회의 모든 조직, 구조, 신학, 교리, 규범, 방향, 정책, 예배, 교육, 선교, 목회, 모든 중심에 예수님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것 아닌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는 이삭의 우물을 메웠던 흙더미처럼 걷어 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보는 기준이듯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것이 우리가 교회생활하는 기준입니다.

 

그리스도는 신앙과 삶의 중심입니다.

또 하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가 있습니다. 신앙과 삶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볼 곳은 교회만이 아닙니다. 우리 삶과 죽음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바울은 빌1:20에서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다같이 살든지 죽든지”. 다른 성경에 의하면 사나 죽으나”. 신앙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예수님이 중심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정 일에 예수님이 실제적인 영향을 미칩니까? 자녀교육할 때 예수님이 가르치는 방식으로 가르칩니까? 자녀를 진학시키고 진로를 결정할 때 예수님의 가치로 합니까? 자녀들 결혼시킬 때 예수님의 기준으로 합니까? 여러분의 부부관계의 중심은 예수님입니까? 부부간에 문제가 있을 때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하고 대화합니까? 시어머니를 대할 때 예수님대하듯 합니까? 며느리를 대할 때 예수님의 마음으로 합니까? 안될 때 어떻게 합니까? 그때 돌아갈 표준,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1:20, ”아무 일에든지 사나 죽으나“.

 

어떻습니까? 직장생활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습니까? 직장에서 일할 때 예수님이 목수일하는 자세, 예수님의 희생적인 마음으로 합니까? 직장에서 상관을 대할 때 예수님 대하듯 합니까? 부하직원을 대할 때 예수님 사랑으로 대합니까? 그때 잘 안됩니까? 그때 돌아가는 기준,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1:20, “아무 일에든지. 살든지. 죽든지”. 대학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정말 힘들고 그만 두고 싶습니다. 그때 붙들 말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대학을 졸업하고 간신히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하필 까다로운 상관을 만나 마음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회사를 그만 둘까 말까 고민합니다. 그때 붙들 말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아무 일이든지. 사나 죽으나“. 가정에서 사소한 일로 아내와 다퉜습니다. 화가 나서 집을 나갔습니다. ”다시는 집에 들어오나 봐라“. 큰 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막상 집을 나가자 갈 데가 없습니다. 혼자 거리를 걷다가 어느 전봇대 앞에 섰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두 개의 네온싸인이 보입니다. 하나는 술집 네온사인, 다른 하나는 교회 십자가 네온싸인, 그때 떠올릴 말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길 지쳐 마음 괴롭고 하는 일은 안되고 죽고 싶어 술 한 잔 마시고 거리를 헤멜 때 그때 붙잡을 말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1:20, “아무 일에든지. 살든지. 죽든지

 

한때 세상에서 하나님을 떠나 살던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와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데 몇 주 전부터 교회를 안 나옵니다. 심방을 갔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목사님도 아시다싶이 저는 구원받기 전 흥청망청 살았습니다. 그 뒤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와서 그동안 하나님께 못한 충성을 다 했습니다. 주일날은 거의 교회에서 살고 평일에도 매일 교회에서 일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제 마음에 늘 갈급하고 만족이 없습니다. 옛날 세상 살 때와 비슷해요. 답답해요”. 제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말했습니다. “집사님, 기분나쁘다 생각지 말고 잘 들으세요. 제가 볼 때 집사님은 하나님께 돌아왔지만 삶의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온 지금이나 똑같은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다만 달라진 것은 옛날에는 세상에 살고 지금은 교회에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것은 사는 장소를 교회로 바꾼 것이 아니라 사는 방식을 바꾼 것입니다. 옛날에도 집사님은 자기 힘으로 살았고 지금도 집사님은 자기 힘으로 삽니다. 옛날에도 집사님은 자기를 위해 살고 지금도 집사님은 자기를 위해 일합니다. 바꾸셔야 합니다. 핵심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입니다. 목표도 그리스도로, 방식도 그리스도로 바꾸셔야 합니다. 그래야 회복됩니다”. 그는 순종했고 지금은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무슨 일을 하든지 살든지. 죽든지, 사나 죽으나”. 방법과 목표가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그리스도와 함께 보아야 합니다. 교회 생활도 그리스도와 함께 해야 합니다. 모든 삶과 신앙도 그리스도와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것이 시작입니다. 이 시작이 잘 될어야 축복받습니다. 브라질에 가면 리우 데 자네이루에 거대한 그리스도 조각상이 있습니다. (사진). 해발 700미터 산위에 세워진 그리스도 조각상은 키가 27미터, 무게는 1320, 조각상의 머리만 2.7미터이며, 좌우로 쫙 펼친 두 팔의 길이는 무려 19미터나 됩니다. 그런데 이 조각상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눈이 없습니다. 물론 눈 모양은 있지만 시력이나 눈동자는 없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놀랍게도 심장이 외투 바깥에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심장은 몸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조각은 심장이 밖으로 나와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는 시력이 없고 심장이 밖에 나와 있을까? 두 가지를 묵상하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눈동자가 없는 것은 사람들의 죄를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닐까? 차라리 인간의 죄를 안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으신 것 아닌가? 그런데 심장은 밖으로 나와 있습니다. 안에 두기에는 너무 가슴이 아파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닐까? 세상을 향한 사랑이 너무 뜨거워 심장을 차마 안으로 숨겨둘 수 없어서는 아닐까? 세상을 사랑하여 차마 그 죄를 보지 않으려는 그리스도의 눈, 세상을 사랑하며 안에 있는 심장이 밖으로 니온 그리스도, 그 분을 가지면 이 세상에 무엇이 부족할까? 그분과 함께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 분이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 되어 평생 행복하기를 바랍니다.